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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eyee Dec 27. 2018

아니 벌써...

그날의 버스 안 풍경

이곳에서의 가게 출근은 주로 버스와 전철을 이용한다.   가게 오픈 시간에 맞추어 빵과 그날그날 사야 할 물건들을 아내가 차로 운반하기 때문에 난 일찌감치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먼저 가게로 향한다.  언젠가부터 버스와 전철 안에서는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는 습관이 몸에 베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종이책을 선호하는 나는 비싼 배달료를 내면서도 매달 몇 권의 책들을 인터넷으로 주문해서 읽는 사치를 누린다.   음악은 각종 음원사이트에서 사서 듣는다.   이민 올 때 아내의 반대를 무릅쓰고 싸가지고 온 산더미 같은 CD와 레코드가 지금도 내 책장을 가득 메우고 있고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틈만 나면 CD를 구입했었으나 어느 순간 다운로드 음악으로 갈아타게 되었다.  CD가 더 이상 컬렉션의 가치가 없어서 라기보다는 매일매일 올라오는 싱글 음악들을 내 것으로 만들기에는 다운로드가 훨씬 수월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뮤지션임을 자만(?)하고 있는 나의 플레이리스트에는 힙합부터 클래식 록, 한국의 인디밴드 음악과 7080가요까지 시대와 장르에 관계없이 수많은 곡들이 빼곡하게 들어있다.   오늘 아침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버스를 기다리며 셔플 재생으로 플레이 버튼을 누른 후 이어폰을 귀로 가져갔다.   버스를 막 타려고 할 때 뜬금없이 흘러나온 노래 한곡이 아득한 옛날 그 노래를 처음 들었던 그 버스 안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중학교는 버스로 통학을 했었다.   그 버스는 유난히도 많은 학교들을 거쳐가는 노선이었고 같은 학교 친구들은 물론 고등학교 형들과 여자대학교 누나들까지 함께 버스에 실려 다녔다.   비좁은 버스에서 나이가 어린 우리들은 공간을 다투는 존재감에서 밀려나 있는 듯 마는 듯 조용히 끼여있어야 했다.   버스 안은 항상 만원이었고 엔진과 땀냄새, 그리고 빈 도시락통에서 스며 나오는 미묘한 냄새가 범벅이 되어 있었다.   거기에 더해 운전사 아저씨 마음대로 고정시켜놓은 라디오 채널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들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내 귀를 울렸다.   산울림의 ‘아니 벌써’를 처음 들었던 것은 그렇게 샌드위치 상태로 끼여서 하교하던 버스 안에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까지 내 귀가 소화해낸 대중가요들은 말 그대로 네 박자에 정직한 기타 사운드와 색소폰 연주… 거기에 구성진 비브라토의 남녀 가수들의 노래였다.   트로트이든 성인가요 이든 사랑하고 이별하는 내용의 구구절절한 노래들이 줄을 이었다.   그때 내 귀를 뚫고 들어온 ‘아니 벌써’는 한마디로 아니 이건 뭐지…??!!!이었다.  웅성거리던 버스 안이 조용해지며 친구들과 형 누나들의 눈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 충격은 우리 다음 세대 동생들이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를 듣고 받았을 그것의 백배는 더 되는 것이었다.


무언가 바로 가슴 정중앙을 직구로 뚫고 들어오는 것 같은 기타의 디스토션은 그 당시 영국이나 미국에서 유행하던 펑크록 과는 비슷하면서도 무언가 달라 보였다.  기타 사운드에 고속 엔진을 거는 듯한 드럼 소리,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튈 듯이 바쳐주는 현란한 베이스 소리, 마치 실수로 들어간 것 같은 오르간의 존재감, 거기에 그 당시로서는 단순히 노래를 못 부르는 아저씨의 가냘픈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실제로 나중에 산울림의 레코드를 방 안에서 듣고 있을 때 우리 아버지는 내게 시끄럽다고 노래 같지도 않은 노래 그만 부르라며 내가 그냥 고함지르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 당시 네 박자의 구성진 단조에 익숙해 있는 내 귀로서는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충격적인 공식이 ‘아니 벌써’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날 이후 학교에서는 순식간에 산울림이라는 세 글자가 화제가 되었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우리들은 엄격한 규율과 통제 속에 학창 시절을 보내야만 했다.   모든 것은 정리 정돈되어있어야 하고 일렬로 직선과 구령에 맞추는 것들이 훌륭한 것 들이었다.   그렇게 질풍노도의 사춘기 시절을 억지로 버티고 있던 우리에게 ‘아니 벌써’는 일종의 해방구와도 같은 상징이 되었다.


노랫말은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와 별반 다를 게 없이 ‘아니 벌써 해가 솟았나 창문 밖이 훤하게 밝았네’였다.   그다음 가사는 더욱더 건전해서 가사만 따로 뽑아 읽으면 거의 국민교육헌장 수준이었다.   게다가 노래 자체의 멜로디 역시 지극히 밝은 장조로 구성되어 만약 이 노래를 그냥 목소리로만 흥얼거릴 경우 교과서 어딘가에 실려있을 법한 동요 같았다.   물론 최근 언젠가 읽은 김창완의 인터뷰 기사에서 '아니 벌써'의 원래 가사는 굉장히 비관적이고 우울했으나 그 당시 심의와 검열에 걸리는 바람에 가사 전체를 갈아엎었다고 했다.   엎어도 너무 심하게 엎은 덕분(?) 인지 그 당시 라디오에서는 ‘아니 벌써’를 하루가 멀다 하고 들을 수 있었다.  어찌 되었든 이 건전한 가사의 밝디 밝은 멜로디의 노래는 그것과는 별개의 악기 사운드와 드럼 비트로 인해 내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머리를 앞뒤로 움직이며 저절로 다리를 떨게 만들었고 내 손은 이미 에어기타의 동작을 하고 있었다.   그 당시 노래들이 3분 정도였던 것에 반해 아니 벌써는 7분이 넘어가는 긴 노래였지만 나는 마치 씻김굿을 하듯 땀을 흘리며  몰입하고 있었다.   노래가 길다 보니 그 당시 음악실 DJ 들은 이 곡을 틀고는 오랜 시간 휴식을 취했다고 한다.    


‘아니 벌써’가 친구들 사이에서 화제로 떠오른 것은 당연한 것이었고 결국 산울림의 레코드는 내가 직접 산 첫 음반이 되었다.   놀라운 속도로 앨범을 만들어 내던 산울림은 내가 레코드를 사러 갔을 때는 이미 2집이 나와있었고 난 누구보다도 먼저 들어보고 싶은 마음에 2집을 먼저 구입했다.   그리고 그 음반은 내가 생각하는 대한민국 대중음악 역사를 뒤바꾼 명반이었다.   

우드스탁이니 사이키델릭이니 제니스 조플린 지미 핸드릭스니 하는 먼 나라의 금지된 음악들은 산울림 2집 안에서 적어도 어느 정도의 연결고리를 찾을 수 있었다.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같은 곡은 첫 도입부가 시작되면서부터 이미 그 싸이키 델릭 한 분위기가 나를 몽환적 세계로 끌고 들어갔다.   다음으로 이어지는 ‘이 기쁨’이라는 곡은 김창완의 목소리에 이어 김창훈이 고성으로 이어받는 후렴 부분이 압권이었다.    ‘안갯속에 핀 꽃’에서 깔리는 하몬드 오르간의 사운드는 장엄하면서 슬프고 나를 할퀴면서 감싸 안아주었다.   후배들에게 곡을 주어 대학가요제 대상을 차지하게 되었던 ‘나 어떡해’ 역시 이 앨범에 산울림의 오리지널로 수록되어있다.   어쩌면 이 노래는 가장 성공을 거둔 노래이면서도 가장 산울림 답지 않은 곡이라는 느낌이 든다.   ‘둘이서’ 나 ‘기대어 잠들어 버린 아이처럼’ 같은 곡들은 김창완의 독특하고 섬세하고 서정적인 노랫말들이 터져 나오는 첫 신호였다.   그 외의 곡들 역시 몇 번을 들어도 물리지 않는 한마디로 앨범 전체가 적어도 나에게는 완벽한 음악적 보고였다.


난 그 이후로 산울림의 정규 앨범 모두를 사기 시작했다.   사실 산울림은 너무 자주 새 앨범을 만들어 내어 내 주머니 사정을 힘들게 했지만 그들의 실험적이고 폭발적인 노래들은 내 소비를 충분히 만족시켰다.   김창완의 동생들이 각자 음악 이외의 길을 찾으며 형제 밴드의 전설은 깨졌지만 그들이 전하고 싶었던 음악 세계는 짧은 시간 안에 충분히 전달되었다고 믿는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음악을 듣는 거로 만족할 수 없었던 나는 기타와 피아노를 독학으로 배우며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일찌감치 친구들과 어울려 밴드를 결성했었다.   그 당시 어렴풋하게 느꼈던 것이 예술은 실력보다는 창작이라는 사실이었다.   ‘호텔 캘리포니아’의 전주와 기타 간주를 완벽하게 연주하는 실력을 가진 사람보다는 고작 코드 3개 4개 정도로 자기만의 음악세계를 펼치는 사람이 더 멋있다는 것을 느꼈던 것 같다.   이런 나의 생각은 절대적으로 산울림의 영향이 크다.   짐작컨데 그 당시 프로 뮤지션의 꿈을 키웠던 밴드들 치고 산울림의 영향을 받지 않은 밴드는 없었을 것 같다.   그들의 독창적이면서도 파격적인 창작능력은 한국의 록 역사에 커다란 디딤돌이 된 것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물론 그 당시 나는 너무 어렸고 의지도 부족했기에 어느덧 음악적 열정은 식어 그 후로 몇십 년이 흐르는 동안 음악은 행하는 것이 아닌 그저 즐기는 취미가 되어왔었다.   80년대와 90년대를 지나며 국내외를 통틀어 수많은 위대한 뮤지션들이 쏟아져 나왔다.   난 그저 한 명의 음악 애호가로서 그들의 CD를 사주고 그들의 곡들을 통기타로 연주해 보는 것으로 내 취미생활을 이어왔다.


그리고 지금, 이미 중년이 된 나는 이곳 캐나다에서 새롭게 음악을 시작하고 있고, 다시금 산울림을 만나고 있다.   땀 냄새로 범벅이 된 비좁은 버스 안에서 중학생이던 내 귀에 꽂혔던 ‘아니 벌써’를 50이 넘어 머나먼 타국 땅의 버스 안에서 다시 듣는다.   버스 창 밖으로 출발하려는 버스를 손짓으로 세우며 뛰어오는 친구들이 보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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