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픈 마이크라는 행사
캐나다에서 가게를 하며 나름 하루하루 바쁜 시간을 보낸다고는 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한가하고 무료한 시간들이 많다. 한국에 살 때는 회사에서의 과중한 업무 이외에도 자의던 타의던 각종 사회생활에 어떻게든 엮여 지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가족과 친척은 물론 친구들과 선후배들을 우정 차원이던 관리 차원이던 만나야 하고 시도 때도 없이 각종 행사나 의식에도 참여해야 했다. 그리고 이민을 와서 이곳에 살기 시작하면서 나를 감싸고 있던 그 모든 사회생활이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고 말았다. 한국에서 알게 모르게 이어져 왔던 각종 인간관계가 갑자기 뚝 하고 끊겨 버린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 학연도 지연도 없는 곳에 갑자기 굴러 들어온 내가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사회는 아주 제한적이었다. 덕분에 이민을 와서 처음 몇 년간 나와 우리 가족은 내가 한국에 살며 도저히 할 수 없었던 패밀리 라이프를 즐겼다. 아침저녁으로 난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었고 아내와도 함께 장을 보거나 저녁을 준비하는 자상한 남편으로 거듭 태어났다. 세월이 흘러 아이들이 크면서 각자 이곳 사회에 자연스레 섞이며 각자 바쁜 하루들을 보내고 있었지만 난 여전히 내 가게를 둘러싼 몇몇 인간관계를 제외하고는 아주 단조로운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무언가 이곳 사람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매개체가 없을까 생각하던 차에 문득 떠오른 것이 ‘음악’이었다.
나름 음악을 사랑한다고 자부하는 나는 어떤 식으로든 이곳 뮤지션들과의 음악적 교류를 꿈꾸기 시작했다. 몇 년 전에 통기타를 좋아하는 이곳에 사는 한국분들과 어울려 가게에서 조그마한 음악회를 개최한 일이 있었다. 고국을 떠나와 타국에 살며 느끼는 적적함을 음악으로 나마 풀어 보자는 아주 건전한 의도였고 이곳 교포들의 반응도 상당했었다. 무대를 만들만한 공간도 없는 가게 여서인지 본의 아니게 무대와 관객이 쉽게 하나가 되는 자리가 만들어졌던 기억이 난다. 시간이 지나오면서 이왕 음악을 하는 것이면 이곳 현지인들과도 함께 어울려 보고 싶었다. 그렇게 시작한 이벤트가 오픈 마이크이고 몇 년 전부터 이어온 가게 행사이다. 음악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10분 정도의 시간을 할애받아 자신의 음악을 선보일 수 있는 무대를 펼쳐보이는 이벤트이다. 이곳 캘거리에는 이런 식으로 스테이지를 마련하는 ‘뮤직 베뉴’들이 곳곳에 있다. 순수 아마추어이던 나름 프로페셔널하게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던 그들이 연주하기 적당한 곳들을 적당한 시간에 찾아다닌다. 개중에는 완벽한 사운드 시스템과 조명을 갖춘 라이브 뮤직을 전면에 내세운 레스토랑이나 술집들도 있고, 우리 가게와 같이 테이블을 옆으로 밀어 놓고 뮤지션들이 설자리를 겨우 마련하는 조그마한 가게들도 있다. 그렇게 산골마을의 해산물 식당은 한 달에 한두 번씩 마이크와 앰프 그리고 각종 악기들이 함께하는 라이브 하우스로 변신하고 있다.
내가 추구하는 행사는 ‘어쿠스틱’스러운 것이다. 솔로나 듀엣 정도의 규모로 심플한 악기를 연주하며 공연하는 팀들을 환영한다. 통기타 하나로 노래하는 솔로 뮤지션이 대부분이지만 간혹 피아니스트도 있고 만돌린이나 아코디언 플레이어도 눈에 띈다. 개중에는 어린 학생들도 있고 은퇴한 노인들도 있다. 컨츄리를 부르는 사람들도 있고 월드 뮤직이나 자신의 오리지널을 연주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 역시 이 행사를 통해 내 안에 있는 뮤지션이라는 정체성을 드러내는 기회를 만든다. 귀에 익은 노래를 내 나름대로 편곡해서 무대 위에 올리는 재미가 쏠쏠하다. 부끄럽지만 내가 만든 자작곡들도 아주 가끔 연주하는 영광도 누린다. 관객은 대부분 뮤지션 들이다. 자기 차례를 기다리며 남의 노래를 들어주는 것이다. 간혹 자신이 연주할 수 있는 곡들을 다른 뮤지션들이 공연할 때면 자연스럽게 함께 연주하는 모습들도 보인다. 이런 음악적 교감은 특별히 많은 대화를 따로 나누지 않더라도 우리 모두를 빠른 시간에 친구관계로 발전시켜왔다.
행사를 꾸준히 진행해 오면서 이곳에서 레귤러라고 부르는 단골들도 많이 늘었다. 처음 행사를 시작하면서부터 참여하기 시작한 캐서린은 프랑스에서 홀로 건너와 이곳 학교에서 불어를 가르치고 있다. 감각 있는 피아니스트인 그녀는 무대에 서는 뮤지션들의 연주를 풍성하게 해 준다. 특유의 사교성으로 캘거리의 곳곳에서 활동하는 뮤지션들을 많이 알고 있는 그녀 덕분에 나도 꽤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넓혀가고 있다. 아코디언과 만돌린, 그리고 바이올린의 합주를 선보이는 린다와 달씨는 어쩌면 우리 가게 행사에 독특한 색깔을 입힌 장본인 들이다. 남들과는 완전히 차별화되는 악기 세팅에 아무도 흉내 내기 어려운 선곡으로 무대를 이끈다. 오랜 시간 함께 연주해온 흔적이 묻어 있는 그들의 호흡에는 프로의 광채가 보인다. 난 유럽을 가본 적이 없지만 그들의 음악을 들으며 앉아있자면 어느새 동유럽 어딘가의 허름한 선술집으로 공간 이동되는 듯한 호강을 누리게 된다. 말레이시아 출신으로 오일 컴퍼니에서 일하다 지금은 은퇴한 아퀴 바바 씨는 그만의 확실한 색깔을 가지고 있다. 그가 맨 처음 가게 이벤트를 찾아왔던 때를 잊을 수 없다. 무언가 강한 카리스마를 내뿜는 외모와 의상은 스테이지에서 시작한 현란한 손놀림의 기타 실력의 전조에 불과했다. 팝의 클래식으로 등극한 ‘Ain’t no Sunshine’을 아퀴 씨 나름의 멋지고 긴 인트로와 함께 연주했을 때는 모든 사람이 숨을 죽이고 경청하게 만들었다. 그 이후로 우리 가게에 올 때마다 그 곡은 아퀴 씨의 테마송 이 되었고 이제는 나 역시 피아노로 그의 연주에 합세할 정도의 관계로 발전했다. 무엇보다도 은퇴 이후 음악에 대한 열정을 온몸으로 표현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아름답고 존경스럽다. 이곳 대학에서 생물학을 전공 중인 시현이는 우리 이벤트의 최연소 레귤러이다. 놀라운 실력의 피아니스트이면서 요즘 보기 드문(?) 아름다운 청년이다. 거의 내 아들뻘 정도인 시현이와 나는 음악적 취향이 너무나 닮아 있다. 이래서 음악은 만인이 공유한다는 실감이 난다. 가게 음식의 팬이기도 한 시현이와의 인연이 감사하다. 전형적인 캐나디언 인 린다의 노래에는 그녀의 경륜이 묻어있다. 최근에 재혼을 하고 행복한 제2의 인생을 시작한 그녀는 퀘벡 출신답게 샹송에 익숙해 있었고 내가 가끔 흥얼거리는 샹송을 흥미진진하게 들어준다. 그녀 역시 정기적으로 그녀의 집 거실이나 앞마당에서 뮤직 잼 이벤트를 개최한다. 그 이벤트에는 항상 참여하는 레귤러 멤버들이 있고 나 역시 최근에 그들과의 인연을 만들게 되었다. 제법 나이가 있는 사람들이지만 음악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은 그들의 진지한 얼굴에 새겨져 있다. 내게는 익숙하지 않지만 컨츄리송을 끊임없이 연주하고 자신의 오리지널 송까지도 최근에 녹음한 랜디, 얼마 전부터 참여하기 시작해 귀에 익숙한 러시아 민요를 멋지게 들려주는 마리아와 알렉산더, 조용하지만 자신만의 색깔로 흘러간 포크송을 연주하는 피터와 앤디, 이제 멀리 다른 도시로 이사를 가게 되는 섀론과 그랙의 멋진 하모니는 듣는 이들을 행복하게 만든다.
캐나다에는 조상 대대로 이곳에서 살아온 캐나다인 은 사실상 없다. 다들 어느 시점에선가 어딘가로부터 이주해온 사람들 이거나 그런 사람들의 자손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곳은 다수와 소수, 주류와 비주류의 개념이 모호하다. 오픈 마이크는 특별히 어떤 의도를 가지고 시작한 이벤트는 아니었다. 단순히 내가 꾸리는 비즈니스 공간에서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나와 비슷한 사람들과 공유한다는 것이 취지라면 취지였다. 지금은 월드뮤직 행사까지 함께 진행하는 나는 이곳 어딘가에 숨어있는 실력자들이 나타나 주길 기다리고 있다. 이런 행사들이 내 장사에 크게 도움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아주 작은 열매들이 천천히 열리고 있는 느낌이 든다. 지금은 그저 음악이, 사람들이, 시간이, 공간이, 인연이 나름대로의 방향을 가지고 흘러가고 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그 나침반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향하는 진북 방향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함께 가는 길이 이왕이면 꽃들도 피어있고 시냇물도 흐르는 길이었으면 좋겠다. 중간중간에 돌아가던, 쉬어가던 무언가를 향해 간다는 개척자의 마음을 잃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