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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eyee Jan 06. 2019

어느 버스 드라이버 이야기

리타이어 민트

드디어 올해도 어김없이 겨울이 찾아 왔고 기온이 심각하게 떨어지며 폭설이 내리기 시작한다.   영하의 두 자릿수 날씨는 이곳 캘거리 사람들에겐 익숙한 환경이지만 이 계절이 시작되는 처음 며칠 동안은 거리마다 혼란이 빚어진다.   밤새 내린 눈에 뒤덮인 차는 우리 집 차고 앞에 없었으면 차의 형태조차 못 알아볼 지경이 된다.    집 앞에 쌓인 눈은 치우면 쌓이고 또 치우면 또 쌓이는 끝없는 대결구도가 계속된다.    금요일인 오늘은 원래 아내와 함께 차로 가게를 가게 되어있는 날이었다.   TV의 로컬 뉴스에서는 겨울의 시작을 알리듯 여기저기 기어가는 긴 차량의 행렬과 눈길속의 사고 소식이 이어졌다.   하물며 오늘은 항상 일찍부터  와서 기다리는 단골손님이 예약이 잡혀있는 날이어서 서둘러야 하는데 차로 움직이다가는 무슨 일이 생길지 예상하기 힘들었다.


버스와 전철을 이용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판단된 나는 아내보다 먼저 집을 나섰다.   푹푹 파이는 눈길을 뚫고 도착한 버스 정류장에는 나와 같은 결정을 내린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동네 정류장은 상당히 가파른 언덕을 올라와야 하는 상황이라 가끔은 버스도 중간에 퍼져 운행이 끊기는 사태도 벌어진다.   10분 정도 추위에 발을 구르며 제시간에 와주기를 기도하고 있을 때 저만치서 버스가 힘겹게 올라오고 있었다.   버스는 이런 날씨와 도로 사정인 날에는 더더욱 구원자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다.


이곳 버스 드라이버들은 정기적으로 운행 루트와 시간 배치를 재편성한다.   같은 시간의 같은 루트라도 매번 같은 드라이버를 만나지는 못하지만 오늘은 최근 몇 달째 우리 코스를 운행해온 그 아저씨가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하얀 곱슬머리에 긴 수염을 기른 모습이 버스 운전사 라기보다는 물리학 박사쯤으로 보이는 인상을 가진 사람이다.   그분은 매번 승객들이 타고 내릴 때마다 일일이 인사를 건네고 마주오는 버스의 동료 운전사들에게도 멋진 재스츄어로 눈인사를 나눈다.   내가 타는 정류장은 중간 교류장이기에 가끔 조금 일찍 도착하는 때는 가방에든 샌드위치를 조용히 꺼내 먹으며 가벼운 스트레칭을 하는 아저씨의 모습을 볼수도 있다   


줄을 지어 버스에 오르는 사람들을 맞이하는 아저씨가 오늘따라 약간 긴장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어딘가 아프시기라도 한 걸까 생각하며 버스 안으로 오른 나는 그제야 그 이유를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운전석 옆에는 조그마한 플래카드가 붙어 있었는데 “Happy Retirement”라고 쓰여 있었다.   말 그대로 오늘이 아저씨의 은퇴 날이었던 것이다.   이런 풍경을 처음 접하는 나는 어떻게 말을 걸어야 좋을지 약간 당황하며 그저 “Congratulation” 하며 머쓱하게 인사하고 좌석 쪽으로 들어가려는데 운전석 바로 뒤에 아저씨의 사모님으로 추정되는 분께서 민트 캔디 한 통을 내게 권했다.   가방 가득 담은 캔디 통을 승객들 모두에게 나누어 주고 계신 아주머니는 긴장된 아저씨와는 대조적으로 흐뭇하고 편안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흔히들 그 어감이 비슷한 이유로 Retirement에 Retire Mint를 기념 이벤트로 이용한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 수 있었다.   자리에 앉은 나는 무심코 운전대를 잡은 아저씨와 그 뒤에서 계속해서 승객들에게 민트를 전하는 아주머니의 모습을 번갈아 살펴 보게 되었다.   눈이 내리는 미끄러운 도로는 상당한 난이도를 요구하는  운전이 필요할 것이고 어쩌면 오늘, 이 마지막 운전이 두고두고 아저씨에게 기억에 남는 날이 될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전철역까지는 비록 십여 분 정도밖에 안 걸리는 거리이지만 이런저런 생각이 교차하다가 내릴 때는 나도 모르게 그분과 악수를 교환하고 엄지손가락을 추켜올려 보였다.   


문득 그분의 내일부터의 삶이 궁금해졌다.   정해진 시간과 정해진 코스를 반복적으로 운전하며 승객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했을 그분의 내일부터의 삶은 어떨까…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언젠가는 맞이하게 되는 ’마지막 업무’를 하게 되는 날 … 물론 인생이 끝나는 것도 아니고 삶이 특별히 바뀌는 것도 아니겠지만 무언가가 일단락 지어지는 그 순간은 어떤 기분일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전철에 올랐다.


조금 전에 받은 민트를 꺼내어 보니 겉포장에 무언가가 쓰여 있었다.   우선 그분의 이름은 Bill이고 지난 32년간 운전대를 잡아 오셨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뒤쪽에는 내일부터의 자신에 대해 언급해 놓았다.   여행을 떠나고, 종교에 좀 더 적극적으로 귀의하고, 등등… 무엇 보다도 제일 위에 써 놓은 글이 내 눈에 들어온다.   그것은 ‘지난 36년간 함께 걸어온 내 아내를 앞으로도 사랑할 것이다’였다.   은퇴 후의 삶에 대한 다짐이나 죽기 전에 이루고 싶은 버킷리스트 같은 것들에 대해 사람들은 얘기하고 나 역시도 어디에 가고 무엇을 배우고 같은 막연한 상상은 해 본 적이 있다.   하지만 그분의 다짐에 제일 먼저 쓰여 있는 아내를 사랑하는 일을 보고 많은 것을 느끼게 되었다.   비록 개인적으로 알지는 못하지만 그분의 인생을 관통하는 중심을 알 수 있었다.   상식적이지만 비범하고 소박하지만 무언가 대단한 큰 힘이 엿보였다.


얼마 전에 TV를 보다가 우연히 전 일본 국가대표 축구 선수였던 나카타 씨의 얘기를 접했다.   그는 축구 선수생활에서 은퇴하고 지금은 전 세계에 일본의 각종 사케를 홍보 판매하는 인물이 되어 있었다.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나카타 씨는 아직까지 자신에게 따라 붓는 축구 선수라는 것이 때로는 부담스럽고 싫다고 했다.   축구를 할 당시엔 축구에 미쳐있었고 지금 현재는 사케라는 아이템에 자신의 모든 열정을 바치고 있을 뿐 나카타는 나카타 일뿐 이라는 다소 멋진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 사람을 표현하는 수식어가 그 사람의 사회적 위치나 직업으로 이루어 지기 보단 그 사람의 성품과 좋아하는 것들로 설명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개인적으로 대화를 나눈적은 없지만 Bill 아저씨는 분명 멋진 인생을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갈 것이라는 것이 이 조그마한 민트 캔디 통 안에 담겨 있었다.


민트를 하나 꺼내 입속에 넣어 본다.   혀를 통해 느껴지는 산뜻함에 순식간에 기분이 좋아진다.   부디 오늘 하루 끝까지 마지막 버스 운전 무사히 잘 마무리하시길... 그리고 내일부터 멋진 Bill 아저씨의 새로운 시작을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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