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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eyee Jan 07. 2019

미안해... 고마워...

결혼기념일에 부쳐

결혼기념일이 일주일 후로 다가왔다.   아내와 함께 걸어온 시간이 21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작년에는 20년이라는 딱 떨어지는 해 였지만 어찌 된 건지 흐지부지 서로 잊어버린 듯 지나가 버리고 말았다.   올해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하던 차에 아내가 먼저 내게 제안을 해 온다.   어디라도 좋으니 호텔에서 하루 외박(?)을 하고 오자는 것이다.   기념일 당일은 어차피 나는 가게에 늦게까지 있어야 하고 아내도 금요일이라 학교 수업이 저녁까지 있는 날이다.   어딘가로 여행을 가기에도, 조용한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기에도,  애매한 시간이다.   함께 인터넷으로 써치를 하고 캘거리에서 가장 오래된 나름 전통을 갖는 호텔로 예약을 한다.  비싸기는 하지만 그래도 오래오래 기억에 남아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요즘 들어 아내는 식당 일에 많이 익숙한 모습이다.   이민 와서 줄곧 해온 식당이지만 아이들이 어릴 때는 가게는 나와 동업자가 운영을 했었고 막상 본격적인 아내의 등장은 최근 몇 년이다.   남앞에 나서기를 꺼려하는 아내는 고객을 대하는 태도에 늘 자신이 없어한다.   혹시나 서비스가 소홀하거나 실수라도 저질러 고객에게 불평이라도 받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선다.   시간과의 싸움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 런치타임에 그 몇 초 동안의 머뭇거림이 결과적으로 큰 재앙을 부를 수 있다.   나는 그 미묘한 순간을 못 참고 아내와 말다툼을 하고 내 방식을 주입하려 애쓰지만 타고난 성격은 어쩔 수 없나 보다.   시간은 흐르고 아내의 가게일도 점점 익숙해져서 이제는 손님들도 그녀의 접객 방법에 만족해하는 듯하다.   방식이야 어떻든 손님을 대하는 진정성이라는 면에서 볼때, 아내는 분명 나보다 한수 위이다.


내 인생에서 가장 호황이었던, 지금도 그 시절을 떠 올리면 현실감이 없는, 나의 미국 유학 시절에 아내를 처음 만났다.   그녀는 긴 생머리를 뒤로 묶고 파란 재킷에 하얀 바지를 입은 전형적인 일본 올림픽 대표 선수단 복장으로 학교 카페테리아로 들어왔다.   나는 마치 TV에서나 보던 체조 선수를 눈 앞에서 확인하는 긴장감으로 그녀의 행동을 무심코 바라보게 되었다.   이미 앉아있던 같은 그룹의 사람들에 합류한 그녀는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한참을 웃고 떠들고 있었고 난 전혀 안 들리는 연극을 아주 멀리서 바라보듯 멍하게, 하지만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어낼 수가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그녀 주변의 사람들의 모습이 지워지고 나중에는 오로지 그녀만이 또렷이 내 시각 속에 들어왔다.   그날 이후 어느 공간에서든 그녀가 나타나는 순간 그녀의 출현을 감지하는 능력이 내게 생겼고 나는 그녀에게 말을 걸 용기를 찾고 있었다.   내가 다니던 대학을 스폰서 하는 일본의 회사에서 단체로 단기 어학연수를 온 그룹에 속한 그녀와는 자연스럽게 대화 파트너로 만날 수 있었다.   원칙은 내가 영어를 가르치고 그녀가 일본어를 가르쳐 주는 것이었다.    지금이야 너무나 자연스럽고 흔하겠지만 그 당시 일본인들과 한국인들이 만나는 일은 상당히 드문 일이었고 어쩌면 서로가 많이 다르다는 것을 느낄 뿐 무엇이 다른지 확실하지가 않았다.   어쨌든 그 당시 우리는 서로의 나라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고 서로의 국민성이나 문화 차이 같은 것들은 일단 접어두고 가슴을 울려대는 사랑이라는 감정 하나에 충실했던 것 같다.   


캐나다에 오면서 꿈꾸었던 나의 비즈니스에 대한 포부는 여러 가지 시행착오와 실패와 그 밖의 복잡한 요인으로 인해서 많이 수정되고 축소되어 결국 지금은 아내와 내가 단 둘이서 운영하는 식당이 우리의 삶의 터전이 되었다.   물론 난 아직도 꿈을 꾸고 있고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아내의 나에 대한 무조건 적인 신뢰가 있어서 인 것을 안다.   아내에 대한 미안한 생각을 좀 더 멋지고 건설적인 결과물로 만회해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돈 버는 기술이 부족한 나는 “그때 그랬더라면… “ “그걸 안 하고 넘어갔더라면…” 같은 갈림길 에서의 잘못된 판단들을 거치며 오늘까지 이어오고 있다.   물론 돌이켜 판단해서 느끼는 과거의 일 이기에 그 당시로서는 그 결정에 내 마음이 끌렸거나 혹은 최선이었거나 한 것이다.   매 순간 중요한 결정의 시점에 아내는 부재중 이다.   정확히 말하면 아내는 내 결정을 그저 통보받을 뿐 의사결정에 관여하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내리는 결정에 관여할 수 없다는 것을 그녀는 이미 알고 있는 듯 그저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   그리고 그 이후 어떤 고난이 오던 과거에 만들어진 것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나는 그녀에게서 많은 것들을 보고 배운다.   결국 우리는 오늘을 살아갈 뿐이고 행복 이라는 느낌 마저도 매 순간 이루어지는 것 일뿐 과거의 후회 없는 선택이 지금의 나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못한다는 단순한 진리를 일깨워 준다.


단기 연수를 마친 그녀가 일본으로 돌아간 후 나 역시 일본 회사에 인턴사원으로 체류하기 위해 도쿄로 갈 수 있었다.   미국에서 보았던 그녀의 어리숙함은 일본에 도착한 나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말로만 듣던 가깝고도 먼 나라는 쌀쌀하고 엄숙한 분위기로 이방인을 맞이했다.   그녀를 다시 만났던 때는 일본에서의 나의 힘들고 외로운 적응기간의 와중이었고 그녀는 구세주였다.   그녀의 완벽한 가이드 속에 내 자리를 찾아가던 중 문득 그녀의 꿈과 미래 같은 것들이 궁금해 물어보았다.   무언가를 아직 찾고 있다는 지극히 애매한 대답을 들은 나는 그녀와 함께 하는 미래를 생각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어느덧 짧은 연수기간은 끝나고 난 그녀와 헤어져 서울로 돌아왔다.    서울로 돌아올 때만 해도 그녀와의 또 다른 재회를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녀와의 짧은 만남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우연인지 운명인지 모를 커다란 기운이 나와 그녀를 휘감고 있었고 난 일본에서 내 첫 직장 생활을 시작하게 되면서 그녀와의 재회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도쿄와 오사카라는 먼 거리는 신칸센이라는 신속한 육상 교통수단이 해결해 주었다.   우리의 만남은 2년 남짓 일본에서의 직장생활을 마치고 다시 서울로 돌아와서도 지속되었고 그때부터 우리는 결혼이라는 목표를 위한 투쟁에 돌입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저 추억거리 일수 있으나 양쪽 부모의 엄청난 반대를 무릅쓰는 일 이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결혼을 향한 쉽지 않은 여정은 우리를 더욱 단단하게 결속시켰다.   반대로 우리 주위의 친지들 역시 어떻게 해서든 우리의 결혼을 막으려 결속했다.   투쟁과 항의, 회유와 설득의 시간이 흐르고 결국 반쪽의 결혼이 이루어졌을 때 우린 보란 듯이 행복한 가정을 꾸미기로 다짐했다.   아이들이 태어나고 시간이 흐르면서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 싶게 양가의 가족들과의 문제는 쉽게 녹아내렸다.   사실 지나고 나서 느끼는 일이지만 아내의 낙관론이 모든 문제를 극복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아무 연고도 없는 타국에서 불안할 수 있는 나날을 보낼 수도 있었지만 그녀는 어떠한 내색도 없이 따뜻한 가정환경을 만들기 시작했다.   


지금 아내는 우리가 머물 호텔에 대해 검색하고 그 주변 지리를 탐색하는데 여념이 없다.   호텔 이라야 우리 가게에서 몇 블록 떨어져 위치한 곳이고 고작 하룻밤을 머무는 곳인데도 아내는 무척 흥분해 있다.   가게의 뒷 구석에서 열심히 검색 중인 아내를 보며 갑자기 미안한 생각이 밀려온다.   비록 나의 선택과 그녀의 선택이 만든 결과물인 오늘의 우리이지만 나의 고집이 만든 선택에 아무래도 많은 무게가 실려있기에 아내에게 좀 더 잘해주지 못한 후회 같은 것이 순식간에 몰려온다.   21년이 흐르는 동안 나와 아내는 그만큼 나이가 들고 그만큼 경륜이 쌓였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불안하고 그녀는 여전히 낙관적이다.   지난 세월을 돌아볼 때 나의 불안은 우리 삶에 어떠한 도움도 주지 못했지만 그녀의 낙관은 수많은 고비를 이겨내는 힘을 실어 주었다.   지금도 열심히 인터넷 검색 중인 아내의 뒷모습을 보며 그녀를 행복하게 만들겠다는 나의 결혼 전 다짐을 생각해 본다.   그리고 그것은 잘못된 맹세였음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행복은 오늘 그녀와 내가 느끼는 것일 뿐, 어떠한 수단이나 다짐으로도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단순한 진리가 나를 새삼 놀라게 만든다.   


우리 앞에 놓인 많은 문제와 혹은 희망마저도 그녀의 생각처럼 유연하게 소박하게 흘러가길 바라보며 결혼 21주년 … 진심으로 축하하고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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