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oeyee Jan 03. 2019

거기서도 잘 지내니?

보고 싶다 친구야...

그 녀석을 처음 만나건 내 가게에서 조그마한 음악회를 열었을 때였다.   이벤트의 총책임을 맡았던 나는 공연이 다 끝나고 나서야 구석자리에 혼자 앉아 있던 녀석과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3개월 전에 워킹홀리데이로 와서 Leon이라는 이곳 가구점에서 일하고 있고… 캐나다에 오기 전 여수박람회에서 이런저런 이벤트 봉사활동을 했었다는 짤막한 소개가 이어졌다.   공연 잘 봤다며 깍듯이 인사를 건네는 녀석에게 난 우리 음악동호회를 추천해주었다.   지금도 녀석을 떠올리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그 환한 미소가 그날 처음 내게 훅 하고 들어왔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날 이후 한인의 날 행사에 참가했던 나는 말춤과 사물놀이 팀에서 눈에 띄게 존재감을 발휘하는 녀석을 다시 볼 수 있었다.   

날씨 너무 좋아요 형님!


사실 나이로 따지자면 나와는 까마득하고 오히려 내 아들과 별 차이 안 나는 세대이지만 형님으로 불리는 건 언제건 기분 좋은 일이었다.   동호회 모임에 참석한 녀석은 특유의 친화력으로 순식간에 사람들 사이로 녹아들었다.   음악에 대해서 많이 알거나 기타 솜씨가 좋거나 한 것은 없었지만  어떻게든 음악을 통한 주변 사람들과의 소통에 모든 열정을 쏟는 듯한 인상을 받은 것도 그때였다.   녀석은 이곳에 온 지 몇 달 되지도 않아 벌써 버스킹 신청을 하여 공원으로 다리 위로 노래를 부르러 다녔다.   영어가 자유로울 턱이 없었지만 녀석 특유의 부침 성과 환한 미소로 주위 사람들과 어울려 갔다.   만난 지 몇 달 지나지도 않아 나는 벌써 그 녀석의 라이프 스타일에 매료되고 있었다.   처음엔 그 친구의 외향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이 부러웠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건 녀석의 성격이 아니라 삶에 대한 태도라는 사실을 알았다.   내가 소극적인 것은 내가 내성적 이어서가 아니라 나에 대한 확신과 책임이 부족해서 생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이후 나는 녀석 덕분에 여러 가지 행사나 이벤트에 참가할 수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으로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도울 수 있다는 보석 같은 경험을 할 수 있었다.   현재 우리 가게에서 정기적으로 함께하는 오픈 마이크 행사도 그 녀석이 있었기에 시작할 수 있었다.   그 녀석에게는 큰 것을 작게 하고 작은 것을 크게 하는 힘이 있었다.   어렵고 망설이게 되는 일을 그냥 일단 편하게 저지르고 한편으로 무시될 수 있는 스치는 인연이라도 그 상대방의 기억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 녀석에게는 여러 가지 행운도 함께하여 캐나다에 온 지 2년째 되던 해에 영주권이 주어졌다.   나와 같이 아예 독립이민 자격으로 들어오지 않고 이곳에서 신청하여 받는 영주권은 상당히 복잡하다.   더군다나 워킹홀리데이로 들어와서 영주권을 받는 것은 바늘구멍 통과인데 그 친구는 너무나도 쉽고 자연스럽게 이민자가 되었다.   직장에서도 인정을 받아 승진을 거듭했고 어느 날 만나니 새 차를 샀다더니 그다음은 집을 구입했다며 집들이에 초대를 했다.   모든 것이 초고속으로 진행되었던 것은 역시 녀석의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삶의 태도가 뒷받침되어 가능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며 젊은 나이에 혼자서 이루어가는 꿈이 부럽기도 하였다. 

원래는 여기서 이렇게 마무리되어야 하는 이야기다

행복 바이러스를 전파하는 녀석의 밝은 기운으로 외로운 이민생활이 결코 외롭지 않다는… 그 녀석과 함께하는 새로운 이야기가 앞으로도 펼쳐진다는…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결론으로 끝맺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곧 닥쳐올 비극을 누가 상상이라도 할 수 있었을까… 

아버지의 병세 악화로 한국에 잠시 나가 있던 내게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그 녀석의 사고 소식이었다.   캔모어라는 이곳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호수로 물놀이를 갔다가 발생한 일이었다.   

녀석이 죽었다


뭐? 죽었다고?   설마… 말도 안 돼… 아버지 병실을 지키며 들은 이 끔찍한 소식은 너무나도 현실감이 없었다.  뭔가 잘못된 일이려니 하고 캘거리 친구들한테 연락을 했다.   캘거리로 돌아온 나는 급속도로 진행된 현실과 마주치게 되었다.   주변의 친구들은 사고가 난 후 하나가 되어 여러 가지 일들을 분담해서 처리하는 중이었다.   녀석의 부모와 형제는 끔찍한 비극을 머나먼 타국에서 맞은 아들과 동생의 죽음에 믿기지 않는 듯 망연자실 그 자체였다.   어떠한 말로도 위로될 수 없었고 그 이전에 나 자신이 믿을 수가 없었다.


녀석이 주위에 뿌려놓은 여러 인간관계들은 나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이곳에서 진행된 장례식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녀석이 내게 느끼게 해 준 그 따뜻한 온기를 그 모든 사람들도 각자 품고 있으리라 생각되었다.   음악을 좋아하던 친구답게 녀석의 핸드폰에는 자신의 연주 영상이 여러 장면 남겨져 있었고 그것은 장례식에 모인 우리 모두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그 이후 녀석의 유골은 결국 가족들과 함께 고국으로 모셔지게 되었다.   상상하기 힘든 슬픔을 마주한 가족들을 어떻게 해서든 위로해 드리느라 뭐가 뭔지 모르는 하루하루를 보내던 나에게 결국 유골이 떠난 후 녀석의 빈자리가 갑자기 엄습해 왔다.   내가 처음 녀석을 만나자마자 느꼈던 그 따뜻한 이미지가… 그 이후 줄곧 함께 해온 여러 순간들이 오버랩되기 시작했다.   녀석과의 시간들은 내가 저장해놓은 영상에도 녹음파일에도 여러 가지 일정 문제로 오고 간 문자 속에도 그대로 남아있다.   녀석의 죽음은 그가 내게 남겨놓은 그 어떠한 기억에도 일말의 단서가 없기에 더더욱 나를 무너지게 했다.   


인생을 강렬하게 살다 간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뭔가를 확실히 남기고 간다는 것이 아님을 녀석을 통해 깨닫게 된다.   녀석을 생각하며 느끼는 그 친구의 일관된 모습과 성격 만으로 내게는 평생 잊지 못할 무언가가 각인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너무나도 짧은 생을 살다 간 녀석이지만 어쩌면 내가 녀석의 두 배 세배를 더 살아도 못 따라갈 녀석의 기록 이리라.


녀석은 앞으로도 우리에게 계속해서 언급될 친구이다.   녀석이 뿌려 놓은 것이 그만큼 많다는 얘기이다.   앞으로도 녀석의 자취와 녀석과의 기억을 조금씩 꺼내 보며 지내기를 희망한다.   생전에 서로 바빠서 그렇게 자주는 볼 수 없었지만 어쩌면 이제부터는 언제든 늘 내 곁에 있어 줄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며 오늘 하루를 시작해 본다.      

이전 10화 어느 버스 드라이버 이야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