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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FRAU Jun 30. 2021

괜찮아, 크리스마스니까

여행일기(스위스)

(표지 사진 : Wengen, Schweiz / Photo by. @JOFRAU)


1

스위스에서 인연이 된 지인 부부에게서 연락이 왔다. 크리스마스 주에 벵엔(벵겐, Wengen)에 있는 샬레를 예약했는데 혹시 시간 되면 같이 가서 스키를 타자는 연락이었다. 연락을 주신 게 감사했고 무엇보다 우리끼리 스키캠프(?)라니 마다 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 넷은 함께 크리스마스 주간 스키캠프를 가게 되었다. 6일 정도 되는 기간 동안 스키를 타게 되다니 기대 반 설렘 반으로 짐을 싸고 준비를 했다.



2

Wengen : 벵엔(벵겐)


역에 도착해서 숙소를 향해 가는데 주변이 온통 샬레로 가득했다. 지붕 위로 하얗게 내린 눈이 샬레를 더욱 신비롭게 만들었다. 곧 우리가 앞으로 지내게 될 샬레에 도착했다. 외관은 꽤 오래되어 보여서 실내도 그렇지 않을까 은근히 기대를 하며 들어갔는데 웬걸,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바닥은 대리석? 아무래도 이곳에 스키를 타러 오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손님들을 위한 내부 인테리어 공사를 진행한 듯 보였다. 물론, 이 샬레 주인의 개인적인 계획이었을 수도 있고. 나에게 숙소 샬레는 처음이라 뭔가 실내로 들어가면 천장, 벽, 바닥이 다 나무로 되어 있고, 나무 냄새가 물씬 나고, 벽난로도 있고, 걸을 때마다 삐그덕 삐그덕 나무 소리가 나지 않을까 싶었는데 생각보다 현대적인 모습에 조금 놀랐다. 하지만 그건 잠시 첫날부터 마지막으로 샬레를 떠날 때까지 6일 동안 정말 편하게 잘 먹고 잘 잤다. :)


도착한 우리는 짐 정리를 하고, 배를 간단히 채우고 바로 스키를 타러 나갔다.

우리의 숙소, 샬레 / Photo by. @JOFRAU



3

지인 부부는 두 분 다 스키 능력자 셔서 같이 블루를 타다가 그분들은 곧바로 높은 블루로 올라가셨다. 나는 아직 미숙해서 남편의 도움과 가르침을 받으며 블루에서 열심히 연습했다.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내 옆을 슝슝 지나가고 급격한 내리막길에서도 거침없이 내려가는 것을 볼 때면 조금 놀라고 움찔하기도 했지만 또 부럽기도 했다. 여행 첫날이라 설레는 마음도 컸고, 날씨도 좋았고, 남편한테 칭찬도 많이 받고 완벽했다.



4

넘어졌다.

조심해야 했던 코너를 잘 돌다가 눈앞의 설경이 너무 예뻐서 ‘예쁘다’ 하는 순간 넘어졌다. 스키 타면서 넘어지는 건 정말 순식간인데 지금도 넘어지는 모습이 그려지는 것을 보면 꽤 크게 넘어졌던 거 같다. 상체가 바닥에 부딪혔는데 쿵 소리가 났고 꽤 아팠다. 남편은 내가 넘어진 것을 봤지만 먼저 내려가 있었기에 올라와서 도와줄 수가 없었다. 나 혼자 수습(?)을 해야 했다. 이래서 남편이 나 먼저 가라고 했구나. 나는 천천히 일어서서 옷을 털고 벗겨진 스키를 잘 놓고 잘 신고 폴대도 잘 챙기고 남편이 있는 쪽으로 내려갔다. 괜찮냐고 걱정스럽게 묻는 남편에게 나는 괜찮다고 했다.



5

9km.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길고 오랫동안 스키를 탔다. 언제 넘어졌냐는 듯이 나는 곧바로 회복했고 지인 부부가 기다리고 있는 높은 블루로 올라갔다. 그리고 코스 하나를 추천받았다. 아이거글래쳐(Eigergletscher)에서 그린델발트 터미널(Grindelwald Terminal)까지 쭉 타고 내려가는 코스였다. 그곳에 도착해서 버스를 타고 바로 숙소로 갈 수 있었다. 우리 네 명은 그 코스를 쭉 타고 내려왔다. 마치 스키를 타고 퇴근하는 기분이 들었다. 중간에 한 번 경사가 꽤 급한 코스가 있었지만 나는 세 분의 도움과 격려로 넘어지지 않고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기분이 너무 좋았다. 성취감이 들었다고 할까.

아이거글래쳐(Eigergletscher) / Photo by. @JOFRAU



6

성취감으로 마무리되었던 나의 2020년 첫 스키는 첫날이 마지막 날이 되었다.

블루 코너에서 넘어졌던 일이 생각보다 좋지 않았다. 퇴근길 스키의 설렘과 성취감에 취해서 아픔을 몰랐던 걸까. 첫날 일정을 마치고 샬레에 돌아와 씻으려는데 상체를 숙일 수도 젖힐 수도 없었고 결국 난 그날부터 웃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슬퍼서 라기보다 웃긴 데도 못 웃는… 갈비뼈에 문제가 생긴 게 분명했다. 혼자 누울 수도 일어날 수도 없었고, 웃긴 이야기에 웃기도 힘들었고,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 남편은 걱정스럽게 보다가 안 되겠다고 응급실에 가자고 재촉했지만, 나는 괜한 억지와 함께 애써 현실을 부정하며 괜찮다고 일단 자고 내일 상태를 보자고 남편을 안심시켰다. 아픈 건 맞지만 넘어지고 나서도 9km를 내려오면서 전혀 불편하지 않았고, 오랜만에 스키를 타서 근육이 놀랐을 거라며 나는 말도 안 되는 자가진단을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정말이지 내일 하루 쉬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다음 날이 되고, 그다음 날 또 그다음 날 되었지만 아픔은 여전했고, 결국 그렇게 나의 스키여행은, 스키캠프는 끝이 났다. 너무 속상하고 안타까웠지만 더 큰 부상을 입기 전에 쉬는 게 낫겠다고 판단하고 나는 내 스키를 고이 가방에 넣었다. 남편에게도 같이 온 지인 부부에게도 너무 미안했다. 나 혼자 샬레에 있으면 얼마나 신경이 쓰일까. 같이 여행 와서 이런 민폐가 없다. 미안한 마음이 민망한 마음이 되었다가 다시 미안 해졌다가를 반복하며 마음이 너무 불편했다. 하지만 너무 감사하게도 남편과 두 분은 이런 나의 생각을 알아주셨고, 나의 ‘기차여행’ 계획을 함께 세워주셨다. 기차, 곤돌라 탑승 등이 포함된 스키 패스를 가지고 있었기에 관광지도를 펼치고 스키를 못 타는 나를 위한 기차여행 계획을 함께 세웠다. 또 언제, 몇 시에, 어디에 와서 같이 점심 먹자는 일정도 잡았다. 그렇게 나는 5일 동안 스키 패스를 가지고 제대로 Wengen 기차여행을 했다.


여행은 정말 여행이다.

놀러 가서 아프면 슬프다 가도 또 새로운 곳을 보고 힐링을 하게 되다니. 기대했던 스키캠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여서 다행이었고 다음번에는 더욱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으니 그것 또한 다행이다. 계획에 없던 기차여행이었지만 눈이 닿는 곳마다 너무 예뻐서 마음을 빼앗겼던 Wengen 설경은 또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었다. 2020년 12월 크리스마스는 스키캠프로 기억될까 갈비뼈로 기억될까..

벵엔(Wengen) / Video by. @JOFRAU



2020.12. 스위스, 벵엔(벵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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