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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FRAU Jul 01. 2021

나의 과거와 마주하는 일

스위스 일기

(표지 사진 : Basel, Schweiz / Photo by. @JOFRAU)


1

드디어 유닐* 등록 준비를 마쳤다.

*유닐 : University of Lausanne : UNIL


2

유닐을 등록하면서 마음이 무거워진 순간이 있었다. CV를 작성할 때였다. Curriculum Vitae. 이력서.


물론 한국에서도 이력서를 작성한 적이 있었지만, 나의 이력을 오랜만에 적어 내려가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정말 기가 막히게도 지금까지의 내 이력에, 내 시간들 속에 임용고시의 공백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마음이 무거워졌던 것 같다. 이력서라는 게 결과적으로 얻은 것들, 과정보다는 결과에 중심을 둔 문서 이기 때문에 임용고시의 공백은 나에게 너무나도 크게 느껴졌다.


대학 졸업 후, 약 4년 간의 공백.

그 시간에 나는 이룬 것이, 그러니까 이력서에 쓸 만한 그 어떤 것을 이룬 것이 없었기에 그 시간은 냉정하리 만큼 정확하게 비어있었다. 뭐라도 어떻게 만들어서 채워 넣을 수도 없게 철저하게 비어있었다. 그 시간 동안 어디 다른 세상에 다녀온 것처럼 그렇게 비어있는 공백을 마주하니 꽤 속상했고, 기운이 빠졌다. 그리고 그런 내 모습을 남편이 가장 먼저 알아주었다. 남편은 무슨 일이냐고, 왜 그러냐고 다그치며 묻지 않았다. "왜 갑자기 기운이 없어 보이지?" 하고 나의 대답을 바라기보다 "천천히 해." 하고 토닥여주는 느낌이었다. 그 한 마디의 말은 나에게 필요한 위로의 전부가 되었다. 나는 별 일 아니야 하고 웃어넘겼지만 남편은 알 것이다. 언젠가 내가 먼저 직접 말해 줄 것이란 걸. 그래서 지금은 그냥 옆에서 모르는 척 나를 웃겨주었다. 고마웠다.


잠깐이었다. 

4년의 시간이 머릿속에서 스쳐 지나간 시간은 정말이지 잠깐이었다. 그게 생각보다 또렷했고, 생각보다 마음속에 또 머릿속에 콕 박혀서 그래서 잠깐 쿵 내려앉았던 것뿐이다.


괜찮다.

나는 그 시간을 후회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애틋하고, 뿌듯하고, 자랑스럽다.


3

CV 작성을 마치고 솔직히 남편에게 보여주기가 부끄러웠다. 왜냐면 "나는 쓸 내용이 없어!" 하고 괜히 큰 목소리로 장난치듯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실은 그게 장난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 스스로 그 시간은 후회하지 않는 시간이라고 말하면서도 실은 부끄러웠던 것이 사실이고, 슬펐던 것이 사실이고, 다는 아니더라도 분명 후회하는 시간들이 존재했었기에 보여주기가 더 힘들었다. 그래서 작성을 하고 몇 줄 안 되는 내용을 고치고 저장했다가 다시 수정하고 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그다음 날이 되어서야 남편에게 보여줬다. 남편은 그저 잘 썼다고 해줬고, 이렇게 하면 더 보기 좋을 것 같다며 조언도 해주고, 심지어 같이 수정도 해줬다. 또 나 혼자 걱정했나 보다. 별 일 아닌 일을 별 일로 만드는 나의 특기는 아직도 여전한가 보다. 이력은 채워가면 그만이고, 과거도 중요하지만 미래 특히나 현재가 중요한 건데. 오늘에서야 비로소 나의 과거와 제대로 마주한 순간인 것 같아 감정이 복잡했다. 


그래도 결론은, 괜찮다. 

나는 지금의 내 모습이 좋다. 

나는 내가 애틋하고, 뿌듯하고, 자랑스럽다.


나의 인생 첫 스위스 대학 지원 후기 :) 


4

비어 있던 그 시간을 부끄러워하지 말자.

물론 후회할 수 있다. 더 열심히 살걸.


하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다.

후회해도 이미 늦었고, 후회해봤자 달라질 거 없다는 것을.

그리고 다시는 후회하지 말자고 다짐해도 어차피 또 하게 될 사람이라는 것을.


그러니 너무 가혹하게 살지 말자.

앞으로가 또 지금이 중요하니 지금 시간에 충실하자.


큰 꿈을 꾸되 작은 일부터 실천하고, 실패에 대한 변명을 찾기보다 사실을 마주하고, 온전히 받아들이고, 무엇보다 지금의 내 모습을 남과 비교하지 말고 과거의 나와 비교하자.


하고 싶은 일 천천히 해도 되니까 포기만 하지 말자.


5

"요즘 어떻게 지내?"

"학교에서 프랑스어 배워."



2020.04. 스위스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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