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붕 위의 소음은 날로 커지고 연기처럼 남자를 쫓던 실루엣은 더욱 짙어졌다. 콩콩, 지붕 위를 뛰는 고양이의 발소리라고 여긴 소리는 여자가 마당으로 나오면 사라졌다.
"당장은 아니지만 너랑 헤어져 줄게."
상대가 바라는 것을 해주면 그는 행복해질까. 헤어지자는 남자에게 여자가 이별을 예고하자 방금까지 함께 있던 남자가 희미해지고 뿌연 연기만이 맴돈다. 그리고 실제인지 환영인지, 과거인지 현재인지 구분하기 힘든 장면이 하나씩 지나갔다.
연기가 흐르는 방향을 따라 여자가 휘청이며 걷는다. 그 길의 끝에 남자의 공방이 나타난다. 늦은 밤 문은 활짝 열려 있고 작업실의 불도 환하게 켜져 있다. 매일 오가는 길인데 왠지 걸음이 떼어지지 않는다. 그저 귓가를 때리는 불쾌한 소음에 고막이 찢어지고, 사람의 형체를 닮은 검붉은 연기에 눈이 멀 것 같은데.
한 걸음, 한 걸음...... 여자가 문 앞에 서고, 작업실에는 남자 혼자 있다. 작업대 위에 안주를 늘어놓고 술을 홀짝이는데 가만, 맞은편에 누가 있는 것처럼 눈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인다. 여자가 안으로 들어서자 뒤돌아 앉은 '갈래'(양갈래 머리를 한 늙은 여자)가 조금씩 얼굴을 드러낸다.
'이리 늦은 시각에 마을 사람과 또 술판이라니......'
여자는 구설수에 오를 것이 끔찍이도 싫어서 남자를 쏘아본다. 그 순간 '갈래'의 모습이 다시 연기처럼 사라지고. 남자는 구부린 등으로 계속해서 술을 입에 넣는다.
"등이 아프다고 해서 집에서 찜질팩 가져왔어. 그리고 나...... 네가 원하는 대로 할게."
남자에게 찜질팩을 건네며 이별을 말하는 순간, 바깥의 고목이 굉음을 내며 가지를 꿈틀거린다. 남자는 고개를 들고 여자가 아닌 다른 곳에 시선에 두는데 그곳에 선명해진 '갈래'가 있다. 맴돌다가 사라지길 반복하는 지긋지긋한 연기. 여자가 바닥에 눈을 두고 말한다.
"둘이 할 얘기가 있으니까 나가 주세요."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오해하지 말고 진실한 사랑을 해봐!"
'???'
본명도 직업도 가족도 온통 연기처럼 불명확한 것이 공방을 들락날락하다가 오늘은 앞뒤가 잘린 말로 여자에게 진실한 사랑을 운운하고 있다.
'오해? 설마...... 본인이 여성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나와 남편 사이가 왜 좋은지 알아?"
'안 궁금해.'
"우리는 서로를 믿기 때문이야!!"
그 순간 소리를 지른 '갈래'의 입이 몸집보다 커져 괴물의 턱처럼 부딪힌다.
'그래서 한밤중에 남편과 자식을 두고 동네 남자랑 술을 마시는구나.'
여자가 동요하지 않자 이번에는 '갈래'가 남자에게 동조를 구하며 턱을 벌려댄다.
"야, 세상에는 프레쉬하고 매트한 관계도 얼마든지 있다고!!! 알잖아?!!!"
'조선 마을인데 웬만하면 한국말과 존댓말을 쓰지.'
여자가 '갈래'를 먼지처럼 밖으로 털어내며 묻는다.
"혹시 눈치 없어요?"
"뭐야?"
"나가시라고요."
"못 나가!!!! 오늘은 내가 온 게 아니라 쟤(남자)가 불렀어!!!!"
'네 발로 왔든 불러서 왔든 관심 없다고.'
버티고 있는 '갈래'를 무시하고 여자가 남자에게 묻는다.
"지금 여기서 '내가' 나가면 되는 거야?"
'......'
남자는 이곳에 혼자인 것처럼 말이 없고.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갈래'가 여자에게 악다구니를 쓴다.
"이러면 네가 뭐라도 된 것 같지?!!!!!"
'주제 없는 말과, 눈치 없는 천박함.'
'갈래'가 방향을 모르고 공방을 떠돈다. 그 순간, 바깥의 고목이 가지를 틀고 서서히 공방으로 다가온다. 이때, 허연 기운이 훅! 하고 여자를 덮친다.
'갈래'가 여자의 얼굴에 쉼 없이 담배 연기를 내뿜는다. 비어 있는 동공, 퀴퀴한 낯빛, 비뚤어진 얼굴에는 '인간의 무언가'가 느껴지지 않고. 이어 여자와 남자가 자욱한 연기에 가려진다.
사람이 아니야. 밖으로 빠져나갈 때까지 지켜보자.
한동안 작업실을 메운 연기가 다시 너울처럼 일렁이자 여자는 숨쉬기가 곤란해진다.
"치우라고."
여자가 '갈래'의 담배를 탁, 하고 친다. '갈래'는 여자의 손길을 피하고, 여자는 연기를 몰아내는 손짓으로 부채질을 한다.
"네 둘, 나한테 왜 이러는데!!!!!!"
'연기다......'
발에 걸리는 것들을 걷어차며 '갈래'가 마침내 밖으로 빠져나간다.
처음부터 '사람'이었던 적이 없다. 통성명을 하는데 자신의 본명을 알리지 않을 때에도, 하는 일을 정확히 알 수 없을 때에도, 마을에서 허구한 날 술판을 벌일 때에도 늘 시뿌연 '연기' 같았다. 양갈래 머리의 늙은 여자, 담배 백 개, 시뿌연 연기...... 괴상한 이름들이 늘수록 언젠가는 남자에게 마귀처럼 들러붙을 거라고 예감했는지도 모른다. 예상은 현실이 되고 여자의 충격은 말로 할 수 없는데.
연기가 모두 빠지고 술잔을 내려놓는 남자에게 여자가 묻는다.
"내가 뭘 잘못했어? 어떻게 이런 일을 겪게 해?"
"......"
입을 다물고 있는 남자에게 여자의 인내심이 바닥을 친다.
"무슨 말이라도 해봐!"
더러워진 하루, 쪼개진 우리, 망가진 꿈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 여자가 먹다 남은 안주거리를 남자의 얼굴에 바르고 뺨을 후려친다. 이때 공방을 나간 줄 알았던 '갈래'가 쿵쿵, 발을 구르며 다시 들어온다.
"나한테 왜 이러냐고!!!!!!! 왜!!!!!!!"
상스러운 고성이 밤의 마을을 깨운다. 그 순간! 공방을 뚫고 들어온 고목의 가지가 '갈래'를 칭칭 휘감고 천장과 바닥을 때린다. 우두둑 부러지는 가지들을 사방에 떨어뜨리고......
연기와 함께 사라진 천 년 고목.
둘만 남은 공방.
여자는 사력을 다해 숨을 고르고 남자에게 말한다.
"너를 애지중지하다가 또 잃었네."
남자에게 마지막 말을 남긴 여자가 조금 전까지 '갈래'의 자리에 있던 유리컵을 깨부순다. 그때서야 남자도 손에 잡히는 것을 내던지기 시작한다. 어쩌다 이리되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현실. 그동안 '애지중지한 우리'가 기도를 놓치고 땅에 떨어진 별똥별처럼 바닥에 쿡 처박혔다.
남자는 '갈래'와 아무 관계가 아니라고 해명했다. 다른 마을 사람들처럼 그저 생각 없이 어울린 술 상대였을 뿐이라고. 하지만 여자는 처음부터 남자에게 부탁을 했었다. 거북한 기운이 느껴지니 멀리하라고. 그것이 9개월 전의 일이었다. 결코 몸을 섞지 않았다고 했지만 술을 섞어서 연인에게 무례를 범한 것 또한 잘못이었다.
아주 높은 하늘에 뜬 별 같은 남자였다. 남자는 연인의 부탁을 등한시했고, 자신의 번아웃과 우울증을 오직 술과 술상대에게 기댔으며 그럼에도 죽기 살기로 관계를 붙잡고 있던 여자를 놓아버렸다. 별을 매어 놓은 실이 싹둑 잘린 그날, '우리'는 추락했다.
'나의 별이 똥이 되었네.'
떨어진 별이 다시 솟아오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애지중지하다가 잃어버린 별, 아니 똥을 만지작거리면서 여자는 한동안 참고 참았던 울음을 밤낮으로 쏟아냈다. 어떤 상황에서도 상대의 손을 먼저 놓지 않았다. 끝까지 관계를 지키려고 애쓴 노력과 절대로 사람을 버리지 않겠다던 다짐 끝에 또 자신이 버려졌다.
부서진 조각을 원래대로 맞추는데 만 년이 걸려도 이유를 알 수만 있다면 다시 맞추고 싶었다. 인간으로 백 번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해도 그럴 수 있었다. 하지만 제3의 손이 군데군데 조각을 빼고 달아나버려 처음처럼 완성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몸은 말라가고 눈물은 마르지 않았다. 방안을 헤엄치는데도 몸이 눈물에 빠져 죽지도 않고 둥둥 뜨기만 했다.
그와 함께한 순간들을 하나씩 건져내어 벽지에 적었다. 연필의 키가 날이 갈수록 작아졌다. 신나고 행복했던 시간을, 아프고 다투었던 시간을, 빠짐없이 벽의 한 면을 빼곡히 채우자 눈물로 꽉 찼던 방안의 수면이 점차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다 다시 비극을 달래고 억울함을 누르고 분노를 토하기를 계속했다. 그런 날이 반복되던 어느 날 새벽, 잊고 있던 불쾌한 소음이 집 밖에서 들려왔다. 쿵쿵... 쿵쿵... 둔탁한 발소리가 나다가 잠시 멈추었다.
현관문을 열었을 때, 여자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남자가 네 발을 짚고 마당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본인의 의도와 상관없는 몸짓으로 바닥에서 두 손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스스로 배를 뒤집지 못하는 곤충처럼 여자가 일으켜 세우려고 해도 엎드린 채로 아프다고 비명을 질렀다. 늦가을의 축축한 새벽이었다. 마을에 들어온 지 두 해가 지나고 있었다.
"내가 왜 이러는지 나도 모르겠어. 몸이 내 마음대로 안돼."
억지로 상체를 들고 몸을 일으킨 남자가 악을 지르며 여자 앞에 무릎을 꿇었다.
"미안해. 내가 전부 잘못했어."
이 순간을 찍는다면 화면에 무엇이 보일까, 하고 여자는 생각했다. 두 사람과 안개 자욱한 밤, 저수지에 고인 물, 눈앞을 가리는 잔벌레 그리고 또...... 남자의 우는 소리가 여자의 정신을 세차게 한 방 후려쳤다.
빠져나가야 해.
네 발 달린 짐승처럼 수그린 남자를 보고 나서야 여자는 깨달았다.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고.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터에서 더이상의 절규를 끝내야 할 때가 왔다.
'아무리 아름다워도 여기는 내가 살 수 없는 천국이야.'
여자는 지난 일들을 돌이켰다. 정체 모를 슬픔에 갇혀서 미치도록 답답했던 날들. 600년의 역사 중에 이곳에서 살았던 시간은 단 2년. 끔찍했던, 자신만의 작은 전설이 끝나고 있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떠나기로 했다.
나의 반려인간에게.
담이 아주 높았으면 좋겠어요. 지붕은 두꺼우면 좋겠고요. 발 없는 말이 한 발짝도 들어올 수 없는 천리 너머의 땅이었으면 해요. 숨 쉴 수 없는 천국보다 숨 쉴 만한 지옥이라면 그런 집으로 가겠어요. 아니라면 살지 마세요, 구경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