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 이해, 화해, 항해

[호구] 2부 10화 _우리집 반려인간의 20년 호구 인생사

by 조해야 Johaeya



무덤에 소복소복 눈이 내리고 도저히 죽을 것 같지 않던 지난 사랑들이 땅속에 잠들었다. 그중 가장 깊은 곳에 나의 반려인간이 묻혀 있다.


'헤어질 때부터 호구는 아니었어요.'


묘비의 글자를 가린 희끗희끗한 눈을 나의 꼬리로 쓸어내면서 무덤가를 얼마나 지켰을까. 유독 별이 많은 밤, 땅속에서 꼼짝 않던 여자가 볼록한 무덤들을 헤치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눈에 주저앉은 무덤에 새 흙을 올리고, 얼룩진 묘비를 새것으로 갈면서 무덤마다 하나씩 별이 박히기를 기다렸다.


사랑으로 살아내고 사랑으로 죽어버린 날들. 어린 날의 놀이터였던 땅에는 날마다 무덤이 늘어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모래로 사람을 묻는 일이 되어버렸다. 그럴 때마다 여자는 함께 숨이 끊긴 자신을 간신히 살려놓고 물었다.



'그래도 사랑을 하겠는가.'


세상은 순정뿐인 공동묘지. 여자는 이제 사랑이 무섭지 않았다.





새해가 왔다.

처음 보는 실루엣이 현관문에 어른거렸다. 여자는 비쩍 마른 몸을 남의 몸처럼 구경하다가 건강검진을 예약했다. 연말이면 숙제처럼 하던 일을 올해는 연초에 해보자는 심산이었다. 도떼기시장 같았던 검진센터가 비수기 휴양지처럼 한적했다. 전에는 차례를 기다리면서 '혹여나...' 하는 마음으로 검사를 받다가 오늘은 대기 시간도 없이 경쾌하게 검사를 마쳤다.



'지난해 고생 많았어. 올해는 많이 아껴줄게.'


실연을 치른 몸에게 약속을 고하고 바닷가 집으로 돌아오다가 노을을 만났다. 다 타버리고 재도 남기지 않을 것처럼 보랏빛 태양이 커다랗게 불타 내리고 있었다. 떠난 체중, 떠난 집, 떠난 번호, 떠난 SNS, 떠난 사람...... 온통 내가 떠난 것들 투성이. 하지만 분명 남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사랑이 드나들고 있는 '상태'였다.


여자는 여전히 섬의 풍경을 사랑했고, 곁에 머무른 이들과 개들에게 열렬히 사랑받고 있었다.





여자가 스스로 입을 열기까지 기다리던 여자의 엄마가 해가 바뀌어서야 마침내 묻고 싶은 이야기를 꺼낸다.



"딸. 또 헤어진 거야? 왜 헤어진 거니?"


엄마에게 딸의 결별은 좀처럼 받아들이기 힘든 소식이다.


"이유가 있을까, 헤어질 팔자였겠지?"


남자를 유독 아꼈던 엄마는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하고 말을 잇는데.


"참 이상하구나, 딸아."


"뭐가?"


"아니, 딸은 엄마 팔자를 닮는다잖아. 그럼 네 팔자가 그럴 리가 없는데."


오직 한 남자와 50여 년 동안 결혼생활을 이어가는 중인 엄마에게 딸의 호구 연애는 언제나 불가사의한 것이다.



'나 친자식은 맞지?'


실없이 튀어나오려는 말을 목구멍으로 도로 쑤셔 넣고 엄마의 진심 어린 위로를 받든다. 온몸이 부스러져라 키운 소중한 내 자식이 다 자라서 '호구 연애 전문가'가 되었다. 동네방네 자랑할 수도 없는 엄마의 팔자에 못지않게 슬퍼졌다. 이제는 자신이 엄마를 달랠 차례이다.


"엄마. 내 사주에 남자복이 어마어마하대잖아~"



"그러니까 그 복은 언제 오냐고."


"엄마 기도 때문에라도 들어주시겠지!"


자식의 안녕을 바라는 엄마의 기도 덕분에 여자는 자신이 살아 있다고 늘 믿고 있었다.


"나 요즘 기도 안 한다."


"왜?"


"사는 게 바빠!"


"그것 때문이네. 기도하자 엄마."


"쌓인 기도로 충분해. 딸이 분발하자."


복 많은 남자를 맞이하는 분발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 여자는 부연 설명 없는 엄마의 당부에 쿡 웃음이 터진다. 여자의 올라간 입꼬리에 개들의 꼬리가 덩달아 흔들거리고, 그 바람에 슬픔이 소리 없이 달아나고 있었다. '엄마'와 '개'는 어김없고 변함없는 순정 그 자체, 그것으로도 여자는 어느새 살아지고 있었다.






한겨울에 이사한 집에는 바닥을 데울 기름이 기름통에 가득했고, 온수보일러용 가스통에는 가스가 그대로 남았으며, 창고에는 새것과 다름없는 전기장판이 말려 있었다. 집주인 어르신은 외풍을 염려해서 낡은 창문을 새것으로 교체하고 현관에는 중문까지 설치해 주셨다. 이 겨울. 실연한 인간들 중에서 가장 따뜻한 겨울을 나고 있는 인간이 바로 자신이라고 자부하던 날 밤에, 느닷없이 부엌 선반에서 옛날 놋주걱이 툭 여자에게 떨어졌다.


'밥 걱정 하지 말고 배부르게 살아라.'



전에 살던 할머니(집주인의 어머니)는 여자가 굶거나 떨지 않도록 집 구석구석에 보물을 숨기고 세상을 떠났다. 삶에서 가장 필요한 보물들이 먼지를 입고 보잘것없는 모양으로 할머니의 일상에 박혀 있었다. 여기까지 오지 않았다면 몰랐을 사실이었다. 찾아내는 족족 과거는 보물이 되었다.



집안의 먼지를 털고 대왕 숟가락(놋주걱)에 기름칠을 했다. 손이 닿는 곳마다 아끼는 마음을 놓았다. 그리고 그해 겨울, 여자는 살면서 가장 따뜻한 겨울을 났다.






천 일 동안



어느 날 타인과 연인이 되었다.

어찌 될지도 모르면서 사랑을 했고, 다 알지도 못하면서 오해를 했다. 헤어져서야 이해하기 시작했고, '우리'라는 세상이 사라졌을 때 화해를 이루었다. 남겨진 세상을 혼자 항해하면서 사랑해를 외쳤고, 사랑을 조금 알 것 같을 때...... 비로소 '자신'이 보였다.


호구 같아도 순정이면 되었다. 자신에게 이로운 관계란 누구에게 남는 장사가 아니라 순수한 마음이 바닥나지 않는 영혼을 뜻했다. 연인은 사라져도 순정은 남았다. 살아생전 만난 적 없는 할머니가 자신에게 '방한 종합 선물 세트'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고, 생판 처음 본 들개와 천 일을 함께한 '오늘'이 그 증거였다.


들개와 가족이 된 지 천 일이 되는 날. 휴대폰 알람을 끄고 개와 목장에 갈 채비를 한다. 돌고 돌아서 이사 온 동네가 천 일 전 개와 처음으로 살았던 동네라니. 어제까지 말썽을 부린 녀석이 오늘은 집밖을 나서려다 말고 텃밭에 가만히 앞발을 올린다. 아무것도 심지 않은 밭은 여태 작은 무덤들의 차지인데. 천 일을 같이 살아도 여자는 개의 속을 알 수가 없다. 여자가 개를 따라 오른 발을 무덤에 올리고 풀을 헤친다. 흙뿐인 줄 알았던 땅에...... 봄꽃이 오르고 있었다.



나의 반려인간에게.


세상 못나고 딱한 당신의 연애사를 폭로하다가 내가 내 발등을 찍었네요. 어디 내놓아도 부끄러운 당신이 나를 닮은 사랑을 했다니요.
이런 개 같은 사랑을 하다가 우리 함께 떠날래요? 무지개다리 너머에 있는 세상, 그곳은 바야흐로 순수전국시대...... 순정을 바친 반려인간과 동물들이 영원히 죽지 않고 사랑할 수 있는 나라로.
순정뿐인 공동묘지와 봄꽃






[호구] 끝.

작가(우리집 반려견)의 인사는
내일 오전 10시에 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반려인간 조해야-




*[호구]는 총 20화로 브런치북(1부,2부)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구독&좋아요&댓글> '3종 세트'를 남기신 분께는 작가의 순정을 드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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