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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조하 May 13. 2020

열등생은 처음이라

델프 시험 도전기 #1

내 입으로 말하기에 조금 부끄럽지만, 나는 줄곧 우등생이었다. 뭐 그렇게 뛰어난 아이는 아니었지만 어디를 가도 뒤쳐지지는 않았다. 무엇이든 빠르게 익히고 적응했고, 그 덕에 우리 엄마는 나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자신의 아이는 천재라는 모성애적 생각을 입증시키는 나의 적응력은 엄마를 들뜨게 했을 것이다. 어린 시절의 나는 공부이든 예체능이든 시키면 줄곧 잘했기에 피아노, 미술, 발레, 논술, 웅변 등 다양한 학원을 다녔다. 물론 단 한 번도 뛰어난 적은 없었지만 엄마는 그 사실만 외면했던 것 같다. 자신의 딸이 천재라고 굳게 믿은 것 같기도 하다. 어찌 됐든 덕분에 새로운 것에 두려움이 없는 성격을 갖게 되었다. 어릴 적부터 워낙 많은 새로움을 접해서 혹은 그렇게나 많은 새로움을 접해도, 항상 잘 해낼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에.

 

중학생이 되어서도 좋은 성적을 유지했다. 공부를 좋아하지 않았기에 그다지 최상위권 성적을 받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열등하지 않았다. 수업을 이해하지 못한다거나, 원하는 만큼의 성적을 얻지 못한다거나, 내가 뒤쳐지는 듯해서 힘들어해 본 적이 없다. 고등학교 시절도 마찬가지다. 대학을 위해 부단히 힘써야 했던 고3 시절을 제외하고는, 어느 정도의 성적을 받았다. 수준별 수업을 하던 모교에서 나는 항상 a반에 속해있었고 더군다나 3년 내내 감투를 쓰고 있었기에 선생님의 지원도 많이 받았다. 역시, 열등생과는 거리가 멀었다. 


대학생이 된 이후로 나는 더욱 공부와 손절하기 시작했다. 오래 앉아있는 것도, 오래 집중하는 것도 싫어하는 탓에 보다 더 효율적인 공부를 했다. 좋아하는 과목만 공부했고, 좋아하는 수업만 열심히 들었다. 물론 좋아하는 과목에서는 원하는 성적을 어렵지 않게 받았다. 공부하는 만큼 좋은 학점을 얻었고, 시간을 쏟은 과제는 모범 과제로 소개되기도 했다. 공부와 손절을 했다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등반에 속한 적이 없었다.  스스로를 적당한 수준에 위치할 수 있는 만큼만 공부했다. 문제는 편식이었다. 원하는 것만, 좋아하는 것에만 시간을 쏟으려 하다 보니 과목 사이에 편차가 생겼다.

그 편식은 나를 점점 전공 공부에서 멀어지게 했는데, 싫어하던 것이 하필이면 전공이라는 것에 유감이다. 전공수업에서 도태되기 시작한 시점이 언제인지도 모른 채, 그저 수업시간을 흘려보내었다. 그러다 문득 망가진 학점을 마주하고는, 취업에 문제가 생길 것이라 예감했다. 그렇게 나의 뒤늦은 전공 공부가 시작되었다. 꼭 수업시간에 잠을 자고 다 늦은 새벽에 부랴부랴 공부하는 아이들처럼, 나는 졸업을 앞두고 부랴부랴 학원에 등록해서 시험을 준비했다. 


나의 전공은 프랑스어이다. 영어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데 제2 외국어를 하는 일을 벌이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나의 전공 기피의 가장 큰 이유이다. 또한 프랑스어로 돈을 벌어먹고 살 마음이라고는 단 1도 없었다. 해서 멀리했던 내 전공이, 취업 발목을 잡을 줄은 몰랐다. 아니 사실, 만약 내가 뛰어난 스펙과 자질이 있었다면 그 정도의 결점은 발목 잡을 정도는 아니었겠지. 하지만 나는 그저 그런 스펙과 증명할 수 없는 잠재력만을 가지고 있기에, 학점이라도 탄탄해야 했다. 그 학점 복구를 위해 자격증이라도 만들 심산이었다. 

학원을 등록하고 공부를 시작했다. 23만 원이나 하는 응시료를 대출금으로 지불했다. 학원비 또한 대출금이다. 공부를 하려 해도 돈이 필요한 이 욕짓거리 나오는 상황을 속으로 삭히며 자격증 준비를 시작했다. 프랑스어 시험 중에서 가장 공신력 있는 델프 시험 준비를 시작했다. 그래도 전공이 프랑스어이니, 기초 공부는 생략하고 시험 준비반을 들어도 되겠지 하고 넘겨짚었다. 그래 아주 심각하게 넘겨짚었다. 그 언어가 익숙한 것일 뿐이지 제대로 된 공부 지식은 내 머리에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열등생이 되었다. 


불어로 설명하시는 선생님의 말은 초싸이언적인 집중력을 발휘해야 80프로 정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질문을 해도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우선 그 질문의 답을 몰랐고, 알아도 내 생각을 불어로 표현하기 만만치 않았다. 독해 지문의 문제 5개 중에서 5개 모두 틀렸을 때 그 상실감은 잊을 수가 없다. 내가 제출한 작문 답지는 선생님에게 이해를 할 수 없는 수준이었기에, 첨삭 없이 나에게 되돌아왔다. 처참했다. 열등반에 속한다는 것이 이런 기분이구나 처절하게 느꼈다. 

열등생이 되어보니 참 서럽더라. 앞에 앉은 우등생과 선생님만 소통하는 수업 환경이 조금은 원망스럽기도 했다. 선생님은 모르면 모른다고 하라지만, 그럴 수가 없다. 내가 모르는 것을 말했다가는 아마 수업시간 내내 나의 질문으로만 가득 찰 것이기 때문이다. 열등생도 안고 가려고는 하시지만, 수업은 그럴 수가 없다. 열등생이 이해할 때까지 모든 질문을 설명하기에 시간적 제약이 있고, 그랬다가는 나머지 학생들의 반발이 심할 것이다. 그러니 나는 질문도 못하고, 대답도 못하고, 눈치로 이해하며 우등생과 선생님의 의사소통을 구경한다. 이게 바로 수준별 수업이 필요한 이유인가, 교육과정에 대한 심도 깊은 고민을 하기도 한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내가 어린 학생이 아니란 것이다. 반에서 도태되는 것이 무서운 나이는 아니다. 내가 정말 무서운 것은, 응시료가 증발되는 것이다. 손을 덜덜 떨며 결제한 그 23만 원을 기부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 서러운 감정이 오래가지도 않고, 상처 받지도 않는다. 나는 지금 자격증이라는 분명한 목표를 위해 수업을 듣고 있다. 해서 열등생이건 아니건, 문제는 자격증에 합격하는 것이다. 환불? 불가능하다. 이미 저질러 놓은 응시를 되돌릴 수가 없다. 결국 할 일은, 시험 날짜까지 아주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 것. 그것뿐이다. 그러니 오늘 수업에서도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을 혼자 풀기 위해 애써본다. 선생님께 질문조차 못했던 그 문제들을 혼자서 끙끙 앓다 보면 결국엔 풀리긴 할 터. 다른 것들을 생각할 시간 없이 앞으로의 모든 시간을 자격증을 위해 애써보겠다. 오늘 수업은 정말 살짝 울 뻔했지만, 앞으로 백번 울어도 되니, 합격증만 받았으면 좋겠다. 응시료 23만 원이 불합격으로 돌아오면 그땐 정말로 울어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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