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취방 연대기 #8
집에 대한 기억보다 사람이 우선하던 내 여섯 번째 자취방. 오로지 집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자면, 아침마다 거실과 발코니 사이의 큰 창으로 해가 많이 들어섰다. 우유에 커피가루를 타고, 햇빛을 등지고 테이블 앞에 앉아 책을 읽었다.
어학원을 졸업하고 시간이 남아돌 때였다. 언제 귀국을 해야 하나 고민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그곳에서의 생활이 좋아서 마치 돈과 시간이 넘쳐나는 사람처럼 굴었다. 아침이면 책을 읽고 커피를 마시다가, 오전 일을 끝내고 온 플랫 메이트A와 점심식사를 했다. 그 친구가 다시 오후 근무를 위한 직장에 출근하면 그제야 씻고 나갈 준비를 한다. 집에서 약 10분 거리에 있는 도서관에 가서 읽고 싶은 책을 둘러보고, 공부할만한 책을 골라 까무룩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산책을 하기도 했다. 도서관에서 바다는 고작 10분도 걸리지 않은 거리에 있었고, 바다 근처에는 광장이 있어 풀밭에 털썩 앉아 글을 쓰거나 읽기도 했다. 플랫메이트B가 퇴근할 시간이 되면 함께 장을 보고 플랫메이트C의 퇴근을 기다렸다가 함께 저녁을 먹었다. 먹다 보면 오후 근무를 갔던 친구, 플랫메이트A가 퇴근해서 다시 야식타임을 가진다. 한참 동안 수다를 떨다 보면 밤이 늦었고, 각자 방으로 들어간다. 나는 하루를 정리하고 일기를 쓰고 라디오를 듣다 잠에 들었다.
참으로 건강했던 생활패턴이었다. 함께할 사람이 있고, 시간을 보낼 공원은 넘쳐났고, 여행할 곳도 많았다. 마치 긴 여행을 하는 것처럼 살았다. 여행을 가면 쓰는 돈이나 앞으로 해야 마땅한 것들을 고려하지 않고 그 순간을 즐기려 하지 않나. 그러니 나도 모르게 몸이 건강해졌다. 즉 살이 쪘다는 말이다. 매일 밤 맥주를 마시고, 기름진 고기를 먹고, 키위(뉴질랜드인을 가리키는 말)들의 집에 놀러 가 바베큐 파티를 했으니. 살이 붙을 수밖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건강했다. 정신 또한 여유를 만끽하여 살이 붙었기 때문일까. 그동안 달고 살았던 걱정인형을 저 멀리 내다 버린 느낌이었다. 돈 문제는 여전히 골칫거리였다. 여행의 메리트는 이미 사라진 상태였던 것. 하지만 현실 문제에서 도피해서인지 경제적 문제를 뼈저리게 당해 내고도 건강한 정신으로 오클랜드 시내를 뛰어다녔다. 당시 일기의 한 부분이다.
"바다가 내 뒤에 있고 해는 아주 뜨겁지만 내 위에 있다. 덕분에 하늘이 푸르다. 뜨거운 해를 걱정하듯 바다에서 세찬 바람이 불어온다. 소풍 나온 사람들도 먹고 떠들고 돌아다니는 것만으로 에너지를 내뿜는 중이다. 그 속에서 나는 커피를 마시며 일기를 쓴다. 언젠가의 여행에서 소소한 일을 하며 일상인 듯 보냈던 것처럼. 분명히 여행이었지만 특별하다할 것이 없게 여유를 즐겼다. 그 여유가 내 일상 속에 들어온 것이다. 일상 같은 여행을 하는 것이 아닌 여행 같은 일상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졸업도 취직도 미루고 싶었다. 전공 공부와 취직을 위한 공부도 하기 싫었다. 그래서 영어공부라는 그럴듯한 이유로 일상에서 벗어났다. 나는 여행으로 시작해 일상이 되어가는 오클랜드 생활을 그래도 여행이라 믿고 있다. 왜냐하면 다시 돌아갈 곳이 있고 돌아가면 현실을 마주해야 하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이 곳에는 새로운 것이 많다. 다 해 볼 것이다. 다 느끼고 기억하여 돌아갈 것이다. 나는 긴 여행을 하는 중이라고 믿고 있다.” -2017/02/17
일기에 적은 것처럼 나는, 기나긴 여행을 하는 것처럼 시간을 보냈다. 그 시간은 나의 건강을 책임져주었다. 더불어 여유를 가지며 사는 법을 알게 했다. 나를 채찍질하지 말고 천천히 살아가자고 마음먹으며, 불안정한 심리가 찾아오면 언제든 여행을 가기로 다짐했다. 내 머릿속의 걱정 인형이, 내가 여행을 가면 사라지는 것을 깨달은 것.
여행을 마음껏 갈 수 없는 지금, 스트레스를 다룰 나만의 해결책을 실행하지 못해 괴로운 지금, 얼른 상황이 나아져 모두가 자유롭게 돌아다니길 염원한다. 나뿐만 아니라, 걱정과 현실의 무게를 떨칠 방법이 여행인 사람들 모두에게 자유와 해방을 선사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