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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조하 Jul 30. 2020

기억의 시작은 사람

자취방 연대기 #7

 오클랜드에서 약 9개월 동안 지냈지만 무려 2번의 이사를 했다. 짐이 크게 많지 않았고, 단기 계약이 흔한 일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오클랜드에서 세 번째 집, 즉 나의 여섯 번째 자취방은 역시 시내 중심에 있는 플랫이었다.  사실 그 집을 떠올리면, 그 집이 어떠했는지의 기억보다는 함께 살았던 사람들이 먼저 떠오른다. 함께 갔던 곳, 먹었던 음식, 있었던 일들이 그다음으로 차차 기억나니 좋은 추억으로 여겨진다.


 그 집을 떠올리면 함께 살았던 플랫 메이트가 제일 먼저 기억나는 이유, 그들이 내 긴 여행의 동행자가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한국인 4명과 동거를 하며 방 하나를 혼자 사용했다. 약 7만 원이 더 저렴한 방이었지만 방은 더 넓었다. 대신, 이전 플랫과 비슷한 크기의 집에 더 많은 사람이 함께 살아야 했다. 하지만 전혀 단점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좋은 플랫 메이트들과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함께 밥을 먹고, 한국 음식을 요리하고, 시내의 행사를 참여하면서 마치 함께 여행을 온 동행자 같았다. 함께 술을 마시러 가기도 했고, 맛집이 있으면 찾아갔다. 요일별 할인을 하는 식당을 알아내어 외식을 하는 날도 종종 있었다.

 그렇지만 좁은 집에서 부대끼면서 살다 보니 엄격한 기준은 필요했다. 청소 당번과 각각 청소하는 일자를 설정해두었고, 빨래를 하는 날도 정해져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러한 규칙들은 강력할수록 유대감을 높여주는 것 같다. 애매하게 규칙을 지키면, 집안일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편차가 커지기 마련이고, 서로 감정이 상해버리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기 때문이다. 분명한 청소 당번과 집 안의 규칙을 지켰기에 우리의 동거는 문제가 없었다. 단 한 사건만 제외하면.

 오클랜드 주방 개수대에는 음식물 처리기가 옵션으로 장착되어 있다. 개수대에 큰 음식물을 버린다 해도, 스위치를 누르면 분쇄기가 작동하여 큰 음식물도 모두 갈아내어 처리할 수 있었다. 덕분에 음식물을 따로 버리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분쇄기가 작동이 되지 않았다. 헛돌아가는 느낌이 들었고 덜거덕 거리는 소리를 내기도 했다. 플랫 메이트들과 자주 음식을 해 먹는 동시에 술도 즐겼던 우리는, 집에 맥주와 소주는 물론이거니와 소주잔도 구비해두었다. 그런데 한 소주잔이 설거지 더미에 섞여 들어갔다가, 개수대 안으로 빠진 것도 모른 채 음식물과 함께 갈렸던 것이다. 누구의 탓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해졌고, 사실 누구 하나의 잘못이라고 한들 그에게 모든 책임을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좋았던 사이가 틀어질 수도 있었다. 누구의 잘못인지 따져 물을 때 서로의 감정이 상하고, 잘잘못의 크기를 가늠할 때 서로가 원망스러울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민감한 경제적 사안이 걸려 있는 문제였다. 매일 식사를 같이 하던 메이트들의 사이가 애매해지기 딱 좋은, 그런 문제였다. 그래서 우리는 그 문제의 책임을 묻지 않았다. 그저 함께 해결을 하기 위해 애썼다. 당분간은 그 분쇄기에 대한 이야기밖에 하지 않았다.

 대신 손에 잡히는 큰 조작들을 제거했다. 작동은 여전히 원활하지 않았기에 집주인에게 알렸고, 수리에 대해 물었다. 그런데 그 분쇄기의 수리비용은 상상을 초월했다. 타지에서 돈을 조금씩 벌어 생활하던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값이었다. 그 집의 단 한 가지 단점은 집주인이었는데, 상당히 까다롭고 유난스럽게 세입자들을 대했다. 조금이나마 흠집을 발견하면 경제적 보상을 요구하는 것은 물론, 한동안 꾸지람을 들어야 했다. 사실 그 집은 2-3인용 플랫이었는데 내가 4명과 함께 살고 있다는 것 자체도, 집주인이 거실 쉐어를 두면서까지 자신의 배를 불리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집주인을 대처하는 요령이 생겼던 나와 플랫 메이트들은 해당 문제를 더 이상 집주인에게 상세히 알리지 않기로 했다. 수리보다 또 상당한 꾸지람을 듣기 전에 차단하자는 이유에서였다. 물론 수리업체를 부를 수도 없었다. 정말 상당한 비용이었기에.

 결국 우리는 공구들을 하나둘씩 구해와서 기계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무거웠던 기계를 분해하느라 성인 5명이 주방 씽크대 앞에 붙어있는 우스운 꼴이었다. 한 명이 씽크대 밑에서 기계를 받치고, 다른 한 명이 그 옆에서 기계를 들어 올리고, 다른 한 명이 나사를 풀고 또 다른 한 명이 필요한 공구를 전달하는 등 최고의 팀플레이를 발휘했다. 해체한 기계를 물로 씻고, 소주잔 잔여물을 제거하고, 청소한 후 다시 조립을 시작했다. 해체하는 것보다 조립하는 것이 배로 힘들었다. 엔진이 장착되어 무거운 기계를 들어 올려서 개수대 밑에 부착하려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한참을 함께 고생한 끝에 조립을 마치고, 다들 손 모아 스위치를 켰을 때의 염원은 아마, 그 어떤 때보다도 간절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무사히 엔진이 작동되고 날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을 때는, 정말이지 한일전을 이겼을 때보다도 큰 기쁨이었다. 


  타지 생활에서 맺은 인연들이 한국에서도 이어질 수 있었던 이유는 매일 식사를 하며 쌓은 '밥 정'도 있겠지만 그렇게 크고 작은 사건들을 함께 겪고 해결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를 통해 뜻밖의 단합력을 보이며 만들어낸 에피소드는 여전히 술자리에 오르내리는 안주거리가 되었다. 


역시 기억에는 사람이 가장 큰 부분이다. 

사소하게 지나쳤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무슨 일이 있었나 기억이 가지처럼 뻗어나간다.- 2017/02/22


 함께 보낸 시간, 함께 겪은 사건들, 얼굴을 마주하고 먹었던 수많은 음식들. 그것들이 그 집 기억의 전부이다. 때로는 장소에 관한 기억이 사람과 얽힌 것에서 시작한다. 그곳에서 누구와 있었는지, 누구와 무엇을 했는지 같은 것들 말이다. 그리고 그 기억은 그 시간을 보낸 사람들과의 공유된 추억이 된다. 나와 함께 지냈던 플랫 메이트들은 그 집의 기억이 되었고, 그 집은 우리의 추억이 되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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