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취방 연대기 #9
한국으로 돌아갈 때쯤, 그 집에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보증금을 온전히 돌려받지 못했던 것. 내 침대의 헤드에 생긴 흠집과 내가 구한 다음 세입자의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집주인은 나의 보증금의 절반을 돌려주지 않았다.
몇 번의 실랑이가 있었지만 어렸던 나는 어른을 상대로 진을 빼고 싶지 않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내가 만든 그 흠집 때문에 침대의 가치가 떨어졌고, 다시 되팔 때 침대의 제값을 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중고 상품의 판매가가 떨어지는 것은 당연지사. 중고품 그 값을 나에게서 보충하려는 고약한 심보였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아무리 어른이라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상대가 학생인 것쯤은 상관없다는 것, 상대의 조건과 무관하게 손익을 철저하게 따지는 것임을.
세상을 향해 나아갈수록 다양한 인간형태를 만난다. 그리고 내가 그렸던 어른, 내가 그리지 않았던 어른, 부러운 삶을 사는 사람, 경멸스러운 인간상을 실제로 마주하게 된다. 어릴 적 상상해왔던 어른의 모습은 쉽게 만날 수 없지만,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어른의 모습은 자주 만날 수 있었다. 그것이 옳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내가 그리지 못했던 것일 뿐이니. 오히려 그들을 통해 살아가는 방식을 배우고 이익을 추구하는 법을 터득하기도 한다. 그들은 나로 하여금 ‘더 이상 착하고 순진한 모습을 보이지 말아야지’, ‘더는 만만해 보이지 않도록 까다롭게 굴어야지’하는 다짐을 하게끔 한다.
인간은 만날수록 잔인했다. 어리고 만만할수록 그들의 실리를 위해 고약하게 굴곤 했다. 그동안 대부분 학생으로 살아온 나의 소감이다. 어디를 가나 막내였고, 어디 학교를 다니냐는 물음을 받던 학생. 역설적이게도 학생이고, 어리고, 가진 것 없었기에 감내해야 했던 손해가 많았다. 점차 학생 티를 벗고, 사회인이어야 할 나이가 되자 손해는 줄어들었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자던 그 다짐을 거듭한 내가 스스로 만들어낸 덕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내가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기보다는 그저, 비열한 인간들의 타겟에서 벗어난 내 나이와 더 이상 학생이 아닌 신분 덕일 것이다. 그렇게 인간은 잔인하고, 세상은 가혹하다. 나이가 들수록 깨달은 사실, 어리고 순진한 모습이 손해의 이유가 된다는 것, 참으로 서글프다.
그러나 그런 얍삽한 인간들이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있다. 아직 세상에 물들지 않은 어린 어른들은 순진한 모습 뒤에 반발심이랄까, 저항하고 개혁하려는 패기를 가지고 있다. 얍삽하고 옹졸한 사람들은 차마 가지지 못할 순수한 열정에서 기인하는 객기이다. 물론 나한테는 그런 순수한 열정 따위는 없었다. 착한 마음씨도 없었고, 무언가를 바꿔보려는 개혁의지도 없었다. 다만, 학생을 상대로 이익을 추구하려는 어른에게 보복하려는 반항감은 있었다. 그래서 각종 도구로 침대를 일부러 더 긁었다. 그 당시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했던 이유, 내 침대가 중고시장에서 가치가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했던가. 중고 제품은 원래 가치가 떨어져 있으며, 세입자에게 물건을 사용하도록 허용한 순간 생활기스는 막을 도리가 없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방을 빼기 전날, 그 침대에 강압적으로 기스를 냈다. 침대 판을 헐겁게 만들었고, 몇 개의 나사를 빼서 버렸다. 침대 기둥을 쳐내고 긁고, 매트리스를 받치는 판을 마구 긁으며 스트레스를 풀었다.
어쩌면 양아치 소리를 들을지도 모르겠다. 특히 그 집주인에게는 내가 명백한 못된 놈이겠지. 그런데 과연 내가 양아치인가? 나만 못된 걸까. 나에게 양아치는 그 집주인이다. 그의 못된 심보에 대응하는 일을 했을 뿐이다. 당하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1만 원도 손을 떨며 사용하는 나에게 몇십만 원에 달하는 돈을 돌려주지 않은 것, 충분하지 않던 이유들, 분명 내가 학생이었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래서 학생다운 복수를 했을 뿐이다. 고작, 침대를 조금 긁었을 뿐이다. 나의 하찮은 복수였다. 과연 타격이나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