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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 밟았다

그것도 오지게

by 애셋요한

“어떻게 하다 보니 골프 치러 나가게 됐어.”

“아 진짜? 너 애 본다고 시간 안된다며?”

“응... 그냥, 똥 밟은 거지 뭐.”


이 대화, 왠지 낯설지 않다.

요즘 사람들 사이에서 “똥 밟았다”는 말은 주로 나의 시간과 공간이 참해받았을때 쓴다.

의도치 않게 빠져든 대화, 어쩌다 들어가게 된 약속, 예상 못 한 깊이의 관계...

그 순간, 우리 머릿속엔 딱 그 말이 떠오른다.

‘아, 나 지금 똥 밟았네.’


현대인의 대화는 보통 얇고 넓다.

날씨 얘기, 요즘 뭐 봤는지, 주말엔 뭐 했는지.

1cm 깊이의 대화를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아, 그냥 이 정도면 됐다' 싶은 선이 생긴다.

그런데 이게...

상대방의 최애 주제를 건드리는 순간, 판도가 완전 달라진다.

“골프 좀 치세요?”라는 가벼운 인사 한 마디가

3시간짜리 장비 토론과 필드 추천, 티타임 예약으로 이어지고,

“한 번 같이 가시죠”라는 말이 진짜 일정 잡힌 라운딩으로 이어질 때,

딱 그때 우리는 마음속으로 생각한다.

“이거... 진짜 똥 밟았다.”


피상적인 관계를 유지하던 동료가

갑자기 ‘인생을 바꾼 TED 강연’ 얘기를 꺼내고,

나도 모르게 진지하게 맞장구치다 보니, 다음날 그 링크가 메일로 도착할 때.

이런 순간도 있다. 안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뜻밖의 공통 관심사에 빠져 서로 인생 얘기를 꺼내게 되는

밤. 그 밤은 길고 피곤하다.

하지만 이상하게 어떨 땐 이 느낌이 나쁘지만은 않을 때도 있다.


이건 육아도 똑같다.

아이와 평소엔 "학교 어땠어?", "밥은 먹었어?" 같은 짧은 대화를 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티니핑 이야기나 공룡의 분류 체계 같은 주제를 꺼내면

그때부터 진짜 텐션이 올라간다.


“아빠, 티니핑 중에 하츄핑이 제일 좋은 이유 알아?”

“아빠, 티렉스는 사실 육식공룡이 아니라 잡식일 수도 있어.”

눈을 반짝이며 말하는 아이를 보며 나는 생각한다.

‘아... 나 지금 또 똥 밟았다.’


처음엔 피곤하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고, 듣다 보면 졸리기도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걸 참고 들어주다 보면 아이의 진짜 관심과 성격,

생각하는 방식이 하나하나 보이기 시작한다.

아, 이 셋째는 이런 걸 좋아하는구나.

이때부터 진짜 대화가 시작된다.

나의 태도를 고치기 위해선 작은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난 똥을 밟은 것이 아니라 관계을 여는 복을 밟은 것이다."


꿈에서 똥을 보면 복이 온다는 말이 있다.

실제로는 너무 생생해서 식은땀이 흐르지만, 해몽은 늘 ‘대박운’이다.

그리고 현실에서도,

똥 밟은 것처럼 시작된 대화가

결국엔 그 사람을 더 깊이 이해하고, 예상치 못한 관계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게 꼭 골프가 아니어도 좋다.

커피 원두 얘기, 육아 정보, 동네 맛집,

또는 사소한 장난감 하나를 두고 나누는 아이와의 열띤 토론.

이런 것들이 우리를 사람답게 만든다.

복잡하고 피곤하지만, 결국 나와 누군가를 연결해주는 끈이 된다.

그래서 요즘은 똥 밟았다는 생각이 들면 그냥 이렇게 생각하려 한다.


“아, 이 똥은 복덩이다...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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