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과 후반 지향형 챔프

by john ater

1. 결전의 시간



어린 시절, 한참 친구들과 롤을 했을 때, 내가 즐겨 했던 챔프(캐릭터)는 베인이었다.

(놀랍지만 롤은 역사가 10년이 넘은 게임이다. 어린 시절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오바가 아님)


베인의 컨셉과 대사에서 기인한 손맛과 타격감이 좋았던 것도 있지만, 후반 지향형 능력치와 스킬도 맘에 들었다.


베인을 흔히 왕귀챔(왕의 귀환형 챔프)의 대표주자로 꼽는데, 이는 게임 초반 어느 챔프보다 스킬 구성 및 능력치에서 불리하지만 중후반으로 가면 갈수록 웬만하면 막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해진다는 의미이다.


그런 만큼 초반에는 서포터(베인과 같은 원거리 딜러들을 보조하는 역할) 및 다른 플레이어들의 전적인 도움을 받아야 하고, 혹 적절한 지원을 받지 못하여 초반에 크게 망한다면 재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베인을 플레이 할때는, 초반에는 상대방과 반반을 가져간단 마음으로 최대한 몸을 사리며 성장만을 추구하다가, 중후반이 오면 적을 쓸어 담으며 그동안 받은 서포팅에 대한 결과물을 팀에게 돌려줘야 한다.


이런 컨셉을 의식하는 건지, 베인이 갖고 있는 궁극기 스킬*의 이름이 '결전의 시간'이다.


* 모든 캐릭터(챔피언)들은 길게는 3분, 짧게는 1분의 시전 지연 시간이 요구되는 궁극기 스킬을 갖고 있는데, 이 궁극기가 캐릭터의 성격을 나타내고, 게임 내 역할을 크게 좌우한다.


그동안 적에게 받던 설움을 갚고, 팀원들의 기대를 현실로 실현하는 결전의 시간인 것이다.


근데, 이 결전의 시간이라는 궁극기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다른 캐릭터(챔프)들의 화려한 궁극기에 비해 별다른 임팩트가 없다.


그냥 "펑1"하는 소리와 함께 박쥐인지 까마귀인지가 조금 날라다니고, 평소에 베인이 등에 매달고 다니던 큰 곡궁을 손에 쥐고 조준하는 자세를 취할 뿐이다.


새롭고 강력한 투사체를 던진다거나, 순간 이동한다거나 하는 기존의 기술(스킬)과 차별화된 무언가가 아니라 베인의 기존 스킬이 강화되거나 기본 능력치가 향상된다.


임팩트가 크지 않고, 다수를 제압하거나 공격하는 것이 아니다 보니 베인을 플레이하는 유저의 실력에 따라 더욱더 결과물이 좌우된다.


그래서 베인을 플레이하는 유저가 베인의 스킬 및 능력치 컨셉을 활용함에 있어 가장 큰 어려움은 적과의 큰 싸움이 벌어졌을 시, '결전의 시간'인지', '(그래도 아직은 적당히 사리면서 플레이 해야하는) 인내의 시간'인지 판단하여 팀 내 포지션을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몸을 사리며 적에게 얻어맞았던 기억을 떨쳐내고 용기를 내어 적들을 향해 뛰어가는 인식의 전환이 순식간에 이루어져야 한다.


혹은 팀원들이 모두 적에게 달려드는 상황에서 욕먹을 각오를 하고 전투에서 한 발짝 떨어져 후일을 도모하겠다는 판단이 순식간에 이루어져야 한다.



2. 후반 지향형 챔프는 재미있는가?


그래서 베인을 플레이할 때 가장 희열을 느낄만한 시나리오는, 인고의 시간을 거쳐 무사히 성장 한 후에 큰 전투에서 한두 차례 적들을 쓸어 담고 팀을 승리로 견인하는 것이다.


반대로 가장 절망스러운 시나리오는, 무사히 성장하지 못해 게임이 끝날 때까지 팀의 짐 덩어리 취급을 받으면서 무력하게 패배하는 것이다.


그리고 중간 단계쯤인 싱숭생숭한 시나리오는, 성장만 추구하다가 제대로 된 전투 한번 하지 못하고 팀원들의 활약으로 게임이 일찍 끝나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베인의 특성으로 인해 펼쳐질 시나리오에 대해 재미를 느끼는 플레이어들은 따로 있는가?

그런 것 같다.



얼마 전, 아내와 재정상태에 대해서 얘기하는 와중, 아내가 부동산 유지에 너무 많은 돈이 들어가니 욕심을 낮추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도 좋지 않겠냐고 말했다.


월마다 들어가는 대출 상환 금액을 줄여 현금 흐름을 여유롭게 만들어, 간혹 여행도 가고 외식도 더 맘 편히 하고 새 차도 사면 좋지 않겠냐고


합당한 판단은 아니라고 생각해서,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길 생각은 안 해봤지만 곱씹어 볼 만한 의미들이 있었다.


'만족을 지연시키는 일들의 결과물이 어떠한 의미와 행복을 가져다줄 것인가?'라는 물음이었다.


그러니까 당장은 오르지도 않는 부동산을 아등바등 안고 지켜내서 결국 10년에 2배가 오른다 한들, 시드머니를 짜내서 주식에 투자하여 우여곡절 끝에 자산을 증식하든 그 끝에 무엇이 있을 것인지 묻는 것이었다.

(김칫국 원바틀 플리즈,,)


이러한 물음에는 큰 전제가 있다.


만족을 지연시키는 행위, 그러니까 베인으로 치자면 얻어터지는 인고의 세월이 행복하지 않고 재미가 없는 것이라는 전제다.


하지만 얻어터지는 시간 속에서도 작은 행복이 분명히 있다.


그리고 이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성장환경 및 유전적 요소로 인해서 굳어진 취향 같은 거라고 생각한다.


논리적으로 암만 따져봤자, 내일 당장 죽을 확률과 90세 이상 장수하며 살 확률에 어느 곳에 베팅하는 곳이 옳은지 따지는 것과 같다.


최근 모건 하우절의 <돈의 심리학>에서 이와 관련한 흥미로운 힌트를 읽었다.



부유한 은행가의 자녀는 빈곤 속에 자란 사람의 리스크와 수익에 대한 생각을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인플레이션이 높을 때 자란 사람은 안정적인 시절에 자란 사람이 겪을 필요가 없는 일들을 경험한다. 대공황기의 증권 중개인은 1990년대의 말의 영광을 온몸으로 누린 기술 노동자가 상상조차 하지 못할 일들을 겪고 모든 것을 잃었다. 30년간 경기 침체라는 것을 목격한 적이 없는 호주인의 경험을 그 어떤 미국인도 이해하지 못했다. 계속 이야기할 수 있다.


주식을 예로 들어보자. 1970년에 태어난 사람의 경우에는 10대와 20대를 지나는 동안 S&P 500 지수가 물가 상승률을 감안해도 거의 10배가 뛰었다. 놀랄 만한 수익률이다. 1950년에 태어난 사람의 경우에는 10대와 20대 기간의 물가 상승률을 감안했을 때 시장이 말 그대로 지지부진이었다. 태어난 해에 따라 나뉘는 이 두 집단은 주식시장의 원리에 대해 전혀 다른 관점을 가지고 평생을 살아간다.


(모건 하우절 <돈의 심리학> - Story 1, 아무도 미치지 않았다.)



결국 아무도 미쳐서 이해하지 못할 결정을 하는 것이 아니고, 각자가 겪었던 유년 시절의 경제 상황에 의해서 일방적인 성향을 갖게 되는 것이다.



3. 그럼에도 행복은 누구나 얻기 어렵기 때문에 공평하다.


<돈의 심리학>에서는 '행복은 누구나 얻기 어렵기 때문에 공평하다.'라고 말한다.


각자가 겪었던 유년 시절의 경제 상황에 따라, 시작점이 다르지만 시작점 이후로부터 살아나가는 과정 속에서 행복을 찾는 과정은 똑같이 어렵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건 투자 성향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장기적 투자를 지향하던, 단타를 지향하던 둘 다 미친 결정을 하는 것이 아니며 행복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내가 어떤 챔프(캐릭터)를 할 때 게임을 재밌게 했는지, 즉 투자를 통해 얻어 낼 수 있는 행복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고민들이 투자와 함께 해야 한다.


긴 시간 동안 고군분투해서 알아내기 위해서는 시장에서 퇴출되지 않아야 함을 다시금 곱씹는다.


나에게 행복은 알아내기도, 얻기도 어렵지만 '자유'라는 가치가 적어도 나에게 중요한 요인인 걸 안다.


그러므로 투자를 통해서 궁극적으로 얻고자 하는 것은 자동차나 집이 아니라 보다 추상적인 자유이다.


흔히 말하는 경제적 자유, 파이어족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난 일을 좋아하기 때문에, 일을 하되, 돈이 안되는 일도 해보고 무모한 일도 해 볼 수 있는 자유가 탐이 난다.


하지만 이 돈과 무관한 선택들은 역설적으로 든든한 자본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또한 죽음의 결정권을 갖고 있을 수 있다면 좋겠다.




투자를 공부할수록, 이게 자기개발서 인지 투자서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경제, 그리고 투자라는 것이 내가 가진 한정적인 자원으로 최대의 가치를 효율적으로 얻어내는 것을 공부하는 거라면 궁극의 자기개발서는 맞을 것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사내정치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