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인이 망각된 사회시스템에서 묵인하는 대중에게
직업에 귀천은 없다고 대중은 자애스러운 화자의 위치로 스스로를 포장하며 가볍게 말을 내뱉지만, 본인 자녀가 만약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않는 직업을 희망한다면 결코 그들의 부모는 헛소리 같은 너그러움을 본인의 자식에게 내보일 수 없을 것이다. 누구나 기피하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은 반드시 존재한다. 인간의 삶이 지속되는 한 누군가의 희생을 위해 지속되는 사회의 균형은 결코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듯이. 때문에 특정집단의 노동을 통한 혜택은 당연하다는 이유로 모두에게 평등하게 분배되지만 동시에 매우 평범한 하루의 일상에서 누군가의 존재는 반드시 망각되기 일쑤이다. 때때로 그것은 하찮다는 이유로, 누구나 대체가능한 역할이기에, 또한 그다지 많은 기술이 요하지 않다는 각종 편견으로 응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
가치 평가에 있어 그들의 급여는 작은 숫자로 환산되어 노동에 가담하는 주체를 더욱더 사회 속에서 고립시키는데, 당연하게도 그들은 스스로 원해서 사회적으로 밀려난 직무를 떠맡고 있지 않는다. 사람들이 하고 싶지는 않지만 사회가 제대로 돌아가기 위해서 누군가 해야 할 일들은 과연 무엇일까. 또 왜 사람들은 누군가의 중요한 노동을 평가절하하며 존재의 의미를 애써 지워버리려 하는가. 그들은 애초에 우리 사회에 존재하고 있는가? 무언가를 드높이고 경외의 대상임을 학습하듯이 우리는 이미 특정집단을 망각하고 무시하는 법을 터득했는지 모른다. 불쾌하고, 더럽고 역겨운 감정은 늘 내 주변에서 가능한 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했기에 본능과도 같기에 동일한 방식으로 누군가의 노동에서 비롯된 비슷한 부정적인 감정을 떨쳐내려 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과연 ‘더티워크’란 무엇을 말하는가. 이 책에서 작가는 미국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존재하는 직무를 한 꺼풀 드러낸다. ‘교도관’, ‘드론조종사’, ‘도살장 노동자’, ‘시추선노동자’, ‘실리콘밸리의 IT노동자(다만, 이들은 나열된 다른 직무와 지위가 조금은 다르다; 그들은 자신의 주체를 잊지 않으며, 의견을 내보일 수 있는 힘이 있다)’는 바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더티워커’이다.
낯설게만 느껴지는 누군가의 일은 코로나라는 전례 없는 질병으로 사회가 폐쇄되면서 오히려 다른 직업의 존재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할 수밖에 없는 시간을 강제하게 되었다. 사회적으로 주목받지 않았던 하찮은 역할들이 실로는 꽤나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해왔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없었다면 과연 일상이 돌아가는 것이 가능한지 조차 의문이 들정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도 바이러스와 직접 대치하는 의료진과 같이 평소에서 경외의 대상인 직업에 대중의 주목에 한하여 긍정할 뿐, 교도관이나, 드론조종사, 도살장 노동자와 같이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 이들은 그 존재감이 미미하기는 이전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범죄자는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기 마땅한 이유로 인해 대중의 분노를 곧이곧대로 물려받은 교도관의 폭력적인 아웃풋으로 묵인되었다. 평화를 지킨다는 대단한 이유로 적인지 시민인지 명확하게 파악할 수 없는 순간에서도 불분명하지만 위험해 보인다는 주관적인 직관을 통해 (스스로가 위험성에 노출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타인을 사살하는 버튼을 조종하는 자가 있었다. 전쟁을 위해 전쟁을 하는 계산된 국가의 논리 속에서 폭력이 정당화된 집단의 동의로 소수의 피해자는 존재하지 않으며, 기록되자 않는다. 말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지배당해야 마땅한 동물은 어떠한가. 단순히 기업의 실적을 부풀기 위한 마릿수일 뿐 사람과 공존하며 유용한 식량이 되는 식자재가 아니다. 때문에 가장 효율적이고 완벽한 숫자를 위한 관리 속에서 가금류는 손바닥만 한 공간에서 평생의 시간을 알을 낳거나 자신의 살을 바쳐야 하는 생물체가 되어야 하며, 살아있음에도 전기충격을 받거나 숨을 쉬는 가운데 칼에 찔리며 사지를 갈기갈기 분해당하는 소들처럼 가장 빠른 시간에 가능한 많은 양을 처리해야 할 도축 노동자들의 손에 의해 죽음을 당할 뿐이다.
당신이 이런 이야기를 듣고 범죄자의 인권을 무시하거나, 미사일 버튼을 누르는, 동물을 학대하는 듯 보이는 노동자가 나쁘다 비판하고 있다면 그것은 매우 부적절한 오해이다. 그들은 당신의 동의를 통한 사회의 일원으로 담담하게 오늘을 이끌어 가고 있을 뿐이다. 사람들이 오늘 점심으로 먹은 육식 메뉴가 소화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자신과는 상관없는 타인의 잘못으로 치부한다면 이것만큼 어리석은 인간은 없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오늘을 그렇게 산다. 그것은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이라고 생각하며. 이렇듯 ‘더티노동’을 수행하는 집단은 일상의 대중과 물리적으로나, 감성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 우리는 주체적으로 그들과 또 다른 계층으로 분리되기 희망했던 것일까? 시스템으로 분리된 그룹화의 계층구조는 집단을 돈독하게 하며 나름 평온한 사회를 이끌어 가는 일면으로 비치나, 그 이면에 가려진 불순하고 더러운 상태와 과정을 단순하고 조립된 이미지로 파편화하여 최대한 계층과 분리된 단계를 넘어서지 않는 강력한 구조를 강화했다. 때문에 대중은 미디어에서 게걸스럽게 고기를 먹으며 헐떡거리는 사람들 보며 기뻐하고 행복해하며 나도 그와 같이 먹고 싶다 생각할 뿐이지, 피를 흘리는 닭대가리를 나열한 축산 공장에서 오염된 역겨움을 우리는 상상조차 할 수 없으며, 심지어 그 죽임에 가담하는 노동자의 인권과 환경을 짐작조차 하지 못한다. 사회의 누군가가 할 것이라는 대리인의 ‘더티노동자’는 그렇게 탄생하며 효율적으로 돌아가고 있다.
오늘도 깨끗한 거리의 도로는 밤늦은 새벽사이에 미화원들의 일터로 작용하고 있음을 우리는 금세 잊고 지내며, 식탁의 고기가 육즙이 풍부하고 마블링이 어떤지에만 오로지 관심이 있을 뿐 전기로 소를 기절시키며 분뇨와 역겨움이 넘쳐나는 도축장의 불쾌한 공기를 떠올리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누군가의 노동을 통한 혜택을 기억하며 감사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밀려난 특정 집단을 위로하며 연민의 대상으로 삼자는 것도 아니다. 그들이 분명하게도 이 사회에 존재하고 있으며, 나는 이에 과연 무엇을 취하고 어떤 의견을 사회에 던져야 할지 조금이라도 고민해 보자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