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해야한다는 가공으로 기억된 날에게
초콜릿을 선물해야 한다는 강제 아닌 강요가 비공식적으로 허가받는 날이 왔다. 친분사이라면 초콜릿 조각 하나쯤 손에서 손으로 왕래하며 안부를 묻는 간편한 사회생활을 거래할 수도 있겠지만, 연인관계라는 특수한 상황에서는 용납받지 못할 죄악처럼 평가될 단조로운 하루는 결코 용서가 안될 것이다. 나 스스로도 상대에게도.
무엇을 해야 하나 고민은 했지만 막상 디데이가 다가오기까지 나는 아무 준비도 하지 않았다. 화려한 묶음으로 곁들여진 초콜릿이나 말도 안 되는 숫자로 뒤범벅이 된 가격을 지불하면서까지 나의 애정을 치환하기에 초콜릿이라는 존재는 내게 너무 초라해 보였다. 그럼에도 특별한 대책도 없고, 마냥 태평하게 시간을 보내기에 나는 막연한 뻔뻔함을 가지지 못했다. 나의 아무런 계획 없는 무방비 상태를 상대에게 드러내고 싶지는 않은 구태연한 변명의 늪에서 나는 조금도 헤어 나올 계획이 없었다. (그 당시까지는)
얼마 전 귀국길에 잠시동안 정지해 놓은 휴대전화에서 반가운 문자를 발견하지 않았다면 나는 아직도 생각과 생각의 계획 앞에서 망설임과 무책임한 고민의 정지상태에 머물러 있음을 흐느끼며 스스로를 책망했겠지. ‘공연관람 이벤트에 당첨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라는 단단한 문장이 주는 정직함은 순식간에 환희의 감정으로 변했다. (심지어 그 연주회는 밸런타인데이 당일이다!) 그때 문자를 읽던 나의 당혹감과 현재의 기쁨은 흐뭇한 미소로 남아 지금도 스스로를 우쭐하게 한다. 그래 이걸로 나의 완벽한 날을 위한 모든 준비는 마무리되었음을 확신하며.
기념일에 적합하게도 연주회가 열리는 곳이 내가 그토록 가고 싶었지만 많은 이유와 귀찮음을 반영하여 멀리하던 공연장이었다. 일본에서 온 훌륭한 사운드 마스터가 음향을 설계했다던 그 위대한 장소를 드디어 가보게 되다니. 나는 다섯 명 밖에 초대되지 않았다는 공연 티켓 이벤트 당첨확률의 성공을 뒤로하고 처음 방문하는 공연장에 대한 기대와 그것도 무료라는 기회의 희열에 나의 완벽을 향한 추구가 더욱 완성되어가는 것을 직감했다. (이때부터 엄청난 착각과 오해의 영역에 발을 들인 것인가) 공연 한 시간 반 전부터 오픈하는 티켓창구에 나는 3분 일찍 도착하여 몇몇의 사람들이 대기하는 길목에 서서 당당히 ‘이벤트 티켓교환처’로 향했다. 친구에게 힘을 주고 응원의 마음을 전달하기 위해 신청한 사연은 그렇게 현실이 되었다. 하릴없이 무료한 시간을 채울 무언가를 위함도 있었지만 그보다 좀체 손에 닿을 길이 없는 음악회에 초대된 것은 가끔 있는 이벤트처럼 낯선 떨림을 주었다.
공연장은 놀랍게도 상상 속에 부풀어진 거대함에 대비하여 작고 아담했으며, (그래 홍보가 잘 되었을 것이다) 연주가의 피아노 소리는 신기하게도 연주가와 관객의 거리와 비례하지 않게 매우 가깝고 선명했다. 아마 시각적인 이유가 아니라면 공연장 어느 구석에 앉아있어도 소리하나는 분명하고 확실하게 들렸을 것이다. 오랜만에 방문한 음악회는 신기했다. 커튼콜에 맞춰 사그라지는 조도의 확대와 노출이 그 긴장감을 더했으며, 첫마디를 누르는 피아니스트의 건반에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주목되는 시선을 보이지 않는 열기로 확인할 수 있었다. 고상한 클래식이 아니라 영화음악을 연주하는 대중성을 반영한 탓도 있었지만, 가벼움과 진중함을 넘나드는 연주 구성이 마음의 부담감을 덜어준 탓도 있었다. 나는 그 와중에 바이올린의 선율에 매료되었으며 활을 노련하게 놀리는 현악기라는 음정의 기교에 귀를 옴짝달싹이며 주체할 수 없는 기분의 고양을 몸소 나타내었다. 미세한 함성과 거친 박수갈채에 두 번이나 연거푸 앙코르를 연주하던 연주가들의 일상에 무엇이 있는지 잠시 딴 길로 생각을 옮기다가 끝냈다고 생각했지만 별책부록같이 다시 시작한 음악의 운율에 마음을 금세 빼앗기며 공연장에 녹아든 음악을 마음과 함께 매듭지었다.
저녁시간에 맞춰 시작된 공연에 앞서 지하 식당가에서 먹은 고등어구이에 나는 마음이 상해 있었다. (고등어는 상하지 않았는데) 깍두기 네 조각으로 구성된 가격대비 단조로운 식사에 나는 발렌타인데이의 완벽함에 금이 가는 것을 느끼며 심지어 금이 간 밥그릇에 그 마음을 더할 수밖에 없는 운명의 심판을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진짜 말 그대로 그릇에 틈이 있어 액체가 줄줄 새어 나왔다) 초콜릿의 달콤함에 어긋나는 메뉴선택을 자초한 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일까 아니면 식당을 관리하지 못한 사장님에게 이유가 있는 것인지 젓가락을 휘휘 저으며 생각의 고리타분함을 끄집어내는 나에게 우걱우걱 돈까쓰를 씹으며 그냥 그런가 보다 생각의 얕음으로 부정적인 마음을 멀리해 버리는 동행자가 마주하지 않았다면 나는 오늘의 행복을 멀리할 뻔했다. (그럼에도 나는 사장님에게 리뷰로 메뉴의 서러움을 토로했다)
특별할 것이라는, 그리고 특별해야 한다는 하루에도 별별일들이 많았다. 마음을 쓰기도 하고 이내 누그러져서 마음이 홀려버리기도 하고 일상을 마무리하는 어두운 하늘을 짙게 파헤치며 깊은 어둠 속에 특별했다고 기억하려는 하루에 마음을 내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