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꿈에서본시인 Apr 03. 2024

다음 세입자에게 -1-

첫 자취로 한 곳에서 6년을 살아본 기록을 전달합니다.

1.

안녕하세요. 저는 당신이 이사를 곧 오게 될 공간에서 살았던 세입자이었습니다. 반갑습니다. 이렇게 얼굴도 마주하지 않은 채로 인사를 드리게 되어 어색하면서도 생경한 기분으로 당신을 반갑게 환영합니다. 같은 집을 공유한다는 단순한 이유만으로 생전 알지 못했던 타인이 가까운 친밀감으로 다가오는 것은 왜일까요. 과거를 되새기며 이 집이 저에게 주었던 의미를 기록하며 저는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족이 길었습니다. 민망한 낯섦을 어떤 식으로든 메꾸어 보려는 개인적인 성향 탓으로 그 원인을 돌리며 인사를 마무리합니다.


새롭게 보금자리를 꾸리게 될 당신의 공간에서 저는 6년 동안 살았습니다. 2번의 전세계약 연장과, 파일 함에 켜켜이 곱게 접어놓은 전입신고서가 이제는 과거의 유물이 되겠지요. 30대에 이르러서야 저는 부모님과 함께 오랫동안 지내던 집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남들은 학업이니, 직장이니 혹은 결혼이니 하는 특별한 이유로 독립을 자연스레 시작하게 되지만 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서양 드라마에서는 20대의 앳된 나이에도 척척 독립생활을 꾸려나가는 모습은 저에게 너무나도 낯선 유물 같았습니다. 제 주변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한 마냥 환상 같던 독립생활은 그렇게 미디어 속에 그려진 타인과 같이 거추장스러운 장식물처럼 한동안 저와는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저의 직장이 마침 이 지역 금방으로 새롭게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출퇴근이 가능한 부모님 집과의 거리를 생각한다면 독립을 한다는 목표는 큰 원인이 될 수 없었습니다. 다만, 외적인 분명한 계기가 필요했으므로 저는 이직을 이유로 이 근방에서 눈에 띈 전셋집을 계약하게 되었습니다. 현재는 그 직장에서마저도 적을 두지 않게 되어 제가 이곳에 머무를 이유는 처음보다 더 불분명해졌지만, 저는 그 사실을 부모님께 고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항상 제 걱정으로 하루를 사는 분이기에 더 이상의 고민거리를 던져드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첫 자취라니. 매우 낭만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어 그 자체로도 빛이 나는 음절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이에 비등하는 단어라고 하면 저는 '새내기', '결혼', '출생'과 같은 단어가 떠오릅니다. 그 상황 자체로 시작의 대단한 서막을 내뿜는 에너지 가득한 기분을 저는 전셋집으로 대신하려 했는지 모릅니다. 사실 이 집은 제가 알아보았던 선택지 중에 하나였습니다. 심지어 4층에 위치한 이 다세대주택은 제가 처음 발견했을 때, 아직 완공이 마무리되지 않아 지도 위에 존재하지 않는 건물이었습니다. 


이곳을 저는 어떻게 알게 되었냐고요? 전셋집을 구할 당시 사회는 모든 서비스가 디지털을 통해 거래가 전환되어야 하는 시류에 휩쓸려 있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물건을 구하는 부동산 시장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TV를 보거나, 미디어에서 으레 흘러나오는 매물거래 어플 광고는 너무 자주 눈에 띄어 매물에 관심도 없는 사람들에게 이사를 고민할게 할 정도로 반복되었습니다. 한창 열을 올리는 여럿 부동산 어플을 모두 다운로드한 저는 열심히 매물을 찾아보았습니다. 인터넷쇼핑을 좋아하는 편도 아닌데, 독립과 동시에 탈출을 꿈꾸는 청년이었던 저는 열광적으로 제가 선택할 수 있는 범위 내의 집들을 즐겨찾기 하고 담아두며 연신 밤을 지새웠습니다. 사람들이 보는 눈은 엇비슷한 탓인지, 꽤 괜찮은 조건의 매물들은 금세 즐겨찾기에서 사라지며 제게 일방적인 작별을 고했습니다. 짝사랑의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 채 또 다른 매물로 마음을 옮기는 일은 쉽지 않았지만, 빠르게 전개되는 매물의 부상과 소멸을 통해 저는 새로운 사회의 규칙을 학습하였습니다. 

주말에는 아버지를 동반해서 실제 매물을 관람하기도 하였습니다. 행동으로 옮기면 감정은 주체할 수 없이 더 적극적으로 변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던 탓일까요. 핏팅룸에서 입어본 신상 옷가지처럼 부동산업자가 데려놓은 화면 속 사진상의 납작한 그림이 실체화되어 눈앞에 구체화되었을 때, 저는 그 매물의 상태 여부를 뒤로하고 그 자체로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얼른 해치워야 하는 부동산업자의 골칫덩이 매물에 저는 알 수 없는 호응을 보냈던 것이었습니다. 아마 곁에 계셨던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저는 그 좁고 낡은 셋방에서 저는 낭만의 시작을 보냈을 테지요. 


제가 만나본 네 분의 부동산 업자들은 서로 다른 성향이었습니다. 첫 번째 중개인은 작은 빨간 경차를 끌고 픽업을 하였습니다. 평일 주말 구분 없이 근무를 해야 하는 업의 특성 탓인지 그 여성은 매우 자유분방한 인상이었습니다. 딱히 브레이크를 밟는 슬리퍼를 착용한 오른발이 신경 쓰였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녀가 데려다준 원룸은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사진을 도대체 어떻게 촬영했으면 그렇게 넓고 광활하게 원룸이 보일 수 있는지 저는 그녀의 촬영실력에 오히려 관심이 더 갔습니다. 사람 한 명 누워있으면 모든 게 채워질 공간에서 저는 과연 이게 제가 가진 자산에서 해결할 수 있는 최선인지 곰곰이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물론 예산보다 적은 액수였기에 가볍게 매물을 보러 간 이유도 있었지만, 동시에 이게 현실인 것이구나 하는 깨달음도 있었습니다. 어울리지 않는 거대한 이케아 행거가 방 안에 달랑 하나 놓여있었을 뿐인데, 공간을 압도하는 구조물처럼 보인 가구로 세상 좁은 공간을 더욱 좁게 만드는 집주인의 인테리어 센스에 저는 깔끔하게 그 집을 단념하였습니다. 


두 번째로 만나본 수다스러운 청년 중개인은 사무실에 없었습니다. 약속된 시간이 잘못되었는지 연신 시계를 확인해 보았지만 틀림없는 시각에 저는 잠겨진 부동산 사무실 앞에 서 있었습니다. 새로 단장한 듯 주광색의 형광등이 새하얗게 켜진 그의 사무실의 공간은 새하얀 벽과 동시에 비이상적인 분위기를 내뿜었습니다. 그가 조금 늦은 시간에 나타나 물건을 보러 가기 전 사무실에서 차 한잔을 권했지만 저는 거절하였습니다. 새하얀 공간에서 마시는 차 한잔에 저는 이상하게도 거리낌이 느껴졌습니다. 그의 사무실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공실의 전셋집은 걸어서도 이동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건물이 언덕배기 이상한 형태로 위치하고 있어(그곳은 지하는 아니지만 사선으로 쓸려있는 언덕 탓에 건물 자체가 마치 반지하에 묻혀있는 것 같았습니다) 주변 연립주택 사이에 콕하니 박혀 있는 이물질처럼 가려져있어 눈에 띄지는 않았습니다. 온라인 매물 소개에서는 관리비도 없고 한강이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저렴하다는 이유로 모든 조건이 잘 포장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문을 열고 보여준 방 2개의 공간은 기묘했습니다. 한 달 전에 공포영화 세트장으로 적절해 보이는 음산한 기운도 그랬지만, 연식이 드러나는 콘센트, 누전차단기, 인터폰과 같은 것들이 눈에 띄게 도드라져 보였습니다. 한강이 보인다는 설명은 거짓이 아니었습니다. 역시나 다닥다닥 붙어있는 연립주택단지의 구조 탓에, 옆 집 창문이 내 집 창문처럼 여겨지는 사이좋은 공간 사이로 희미하게 그려진 물줄기가 바로 한강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마저도 골방의 창문을 열어서 겨우 보이는 이유로 거실 소파에 유유자적 석양을 즐기는 가공된 자아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미지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집이 맘에 들었습니다. 귀신 나올 것 같은 벽지나 음침한 (낮임에도 불구하고) 그늘짐이 그 당시의 저에게 도전정신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까짓 공간 상태 따위야 제 힘으로 어떻게든 해결이 가능한 여지가 저에게만은 보였습니다. 하지만 떨떠름하게 옆에 서있던 아버지는 만류의 제스처도 하지 않고 표정 자체로 어둑어둑한 거부의사를 보였습니다. 


세 번째로 만나본 중개인은 두 번째 청년 중개인의 사무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습니다. 어쩌고 보면 경쟁업체이기도 했습니다. 음침한 기운에서 나온 두 번째 중개인의 사무실을 뒤로하고 그 근방에서 저는 눈에 보이는 부동산에 거침없이 들어가는 당돌한 행동을 했습니다. 지역은 이제 정해졌다. 나는 이곳에 살아야 할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던 이유였을까요. 어플을 이용하지도 않고 갑자기 매물을 요청하는 저의 인사에 중년의 중개인은 허허 웃으며 근방에서 지나칠 아저씨 웃음으로 화답을 하였습니다. 자신이 잘 아는 분이 있다며 시간이 된다면 바로 보러 가자고 손을 이끈 것에서도 중년이 가진 여유에서 묻어나는 기세처럼 보였습니다. 세 번째 중개인이 소개한 집은 단독주택이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주인은 1층에 살고 있고 전세는 2층에 두었습니다. 어릴 때 보던 '한 지붕 세 가족'이라는 드라마가 떠올랐습니다. 그게 언제 방영된 프로그램인지는 몰라도 옛날 느낌은 분명했습니다. 2층 셋집은 기대만큼이나 역시나였습니다. 노란 장판이 도드라진 공간에 방이 세 개. 신발을 신고 들어가도 어색하지 않을 화장실과, 쥐가 갑자기 나와도 놀라지 않을 부엌공간이 오히려 드라마 세트장( 이 동네는 세트장이 많군요..)처럼 보였습니다. 공간이 말도 안 되게 너무 넓어서 제가 지금까지 살펴보던 매물과의 가격은 무슨 기준인지 오히려 의문이 들 정도였습니다. 아연해서 할 말을 잃은 제 옆에 아버지는 매우 흡족하게 마음으로 싫은 내색 없이 만족의 감탄사를 내보였습니다. 공간이야 집주인이 벽지며 바닥을 새로 해줄 수 있다 했습니다. (그 집주인 할머니는 1층에 살고 있었기에 바로 호출이 가능했습니다; 전셋집을 구경하는 그 사이 어느새 옆에 계셨습니다) 아버지가 매우 마음에 들어 한 부분은 자신의 오래전 기억 속에서 담아둔 흐릿한 감각 때문인 건지, 중년들만 느낄 수 있는 익숙한 공간의 구수한 안정감 탓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주인집이 바로 아래에 있어 언제 어디서든 감시와 보살핌을 가장한 참견이 가능하다는 점이 매력이었던 것이었을까요. 하지만 저는 그의 의견과 완전 정반대로 그런 부분이 매우 큰 단점으로 다가왔습니다. 마당 입구의 철문을 집주인과 공유해서 사용해야 하다니! 제 앞으로의 행동가지가 집주인의 영역권 아래서 사사건건 관찰될 미래가 보이며 그것은 결코 나의 모습으로 그려지지 않았습니다. 

여러 번의 중개인을 만나고 새로운 공간을 탐험하는 일은 꽤나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는 일이었습니다. 때로는 재밌는 경험이기도 하였지만 막상 살아야 한다는 생활공간의 목적이 분명한 의지가 있던 탓에 그것도 머지않아 업무의 일종처럼 여겨졌습니다. 주말에 몰아서 매물을 보러 다녀야 한다는 불편함도 있었습니다. 꽤나 집에서 뒹굴거리며 주말을 소비하는 것을 낙으로 삼는 저인데, 매주 시간을 잡고 정해진 시간에 돌아다녀야 한다는 점이 과도한 불편함이 되었습니다. 


네 번째 중개인이 소개한 파란 문의 문짝이 올려진 매물은 깨끗해 보였습니다. 온라인상 어떤 사진은 실제 사람이 살고 있어 옷이며, 그릇이며 냉장고 같은 가전이 함께 보여 그들의 생활감이 물씬 느껴졌습니다. 그런 매물은 기존 세입자가 살고 있는 현장을 그대로 담고 있어 그곳에 살고 있던 누군가를 연상시키기도 했지만, 그곳에 들어가게 될 내 모습을 비춰보는 거울이 되기도 합니다. 아마 이런 냉장고 앞에 서있는 나를 상상이나 해볼까. 그것을 때로 실망감을 기대감을 반추하면서도 낙담으로 이어지는 패턴을 유지했습니다. 때문에 아무런 가구도, 사람의 흔적도 없는 파란 문의 매물은 저에게 꽤 인상적이었습니다. (실제 완공을 앞둔 공사현장의 매물이기에 가능했던 거죠) 눈치가 늦으면 사라진다는 신규 물건이라는 특성 탓에 재빠르게 연락을 하고 약속을 잡았습니다. 중개인은 멋들어진 외제차를 타고 왔습니다. 모르는 사람의 차에 타려니 민망함을 넘어 어색함이 등줄기를 서늘하게 했습니다. 적절하게 수다스러운 네 번째 중개인은 상품을 판매하고야 말겠다는 의지와 남자가 지닌 약간의 허세가 섞인 말투로 매물을 홍보했습니다. 지금 아니면 사라질 거라는 뻔한 말을 주절 거렸지만, 현관문을 열고 확인한 집의 상태만으로도 어떠한 말이 필요 없었습니다. 33.05제곱미터의 전용공간임에도 불구하고 53제곱미터에 포함된 공용면적 상의 개인 발코니가 눈에 띄었습니다. 양쪽 창으로 개방감이 있는 공간 구성 탓에 채광은 물론이거니와, 제가 지금까지 바라만 보았던 그 어떤 전셋집과의 격을 달리하는 당당한 새침함에 저는 매료되었습니다. 발코니가 모든 것을 다했습니다. 부엌과 거실공간을 구분하는 덧문을 아직 못 달아서 마감시공기간이 딜레이 되고 있다는 중개인의 주절거림이 전혀 신경 쓰이지 않을 정도로 모든 것이 완벽해 보였습니다. (결국에 시공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신나서 문도 열어보고 새집에서 꼭 확인한다는 수도 상태나 변기 물 내림을 시연해 보았습니다. 창문도 열어젖혀보며 옆집에는 누가 살고 있을지 이웃을 미리 확인해 보기도 했습니다. 결과는 어떠했냐고요? 매물을 보고 역까지 마중을 해준 중개인과 바로 그 자리에서 가계약을 하였습니다. 12월 말에 물건을 확인한 상태였고 다세대주택 완공이 2월 말이었기에 아직까지 시간이 남은 상태였지만 이보다 더 적절한 집은 없을 것 같았습니다. 제 예산을 초과해 버린 탓에 돈을 빌려야 했지만 그것은 크게 문제 되지 않아 보였습니다. 그렇게 당신이 살게 될 파란 문의 집에서 저는 자취를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발렌타인데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