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에 이르기 전에 나를 마주하고 자아를 찾는 길에 대하여
노년에 이른 여성의 작가가 자신을 대변하는 세대를 위하여 글을 썼다고 했다. 그녀가 남긴 이야기는 하나같이 반짝거리며 투명하게 빛나는 인생의 철학을 내뿜지만, 그것이 꼭 두드러지게 과장될 필요도 없는 일상까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하루 있는 그대로의 그 시간은 그 자체로 얼마나 소중한지 작가는 눈앞의 ‘지금’을 바라볼 것을 조언해 준다. 그러나 그런 흔해 빠진 작가들의 철학을 현재 주변 어디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세대를 나는 향유하고 있다. 심지어 물건을 판매하기 위해 판촉의 홍보를 뒤집어쓴 겉핥기식의 과장된 (지금을 강조하는) 캐치프라이즈나 브랜딩을 통해 사람들은 종종 혼동에 빠진다. 피곤한 하루를 겪어내며 노출된 타성에 젖어 작가가 말하는 지금을 순수하게 자각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지금 당신의 젊음과 품위를 유지하고 집중하라는 기업의 조장은 이 책의 작가가 현실을 마주하고 지금을 감사하라는 이야기와 다르다는 것을. 현혹된 달콤함에 빠져서 허황된 자아를 찾기를 원하는 건 누군가의 의지로 인해 그릇되게 평가 절하된 자아로만 귀결될 뿐이다. 때문에 독자는 항상 휘둘리고, 흔들리면서도 올곧게 뿌리를 내릴 자아를 찾을 필요가 있다.
그것이 말처럼 쉽게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작가가 노년에 이르러 이런 글을 작성할 수 있던 이유도 그가 겪은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 그리고 본인의 경험이 없었다면 풀어내지 못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쉽게 얻을 수 없다고 포기하기에도 너무 이르다. 내가 결정한 순간이 모여서 스스로를 만들어나가는데 어느 누가 불행과 불만으로 가득한 삶을 채워내기를 희망하겠는가. 누구의 탓도 없다. 이것은 선택과 생각은 나에게서 출발한다는 것만 기억해 보자는 사소한 시도이다.
나는 작가로 하여금 노년의 삶을 생각해 본다. 그것에 사회가 규정한 이미지로 채워나가기에는 너무 기대되고 밝은 미래가 조금이나마 비친다면, 분명 나는 옳은 선택을 향한 도약을 할 자세를 이미 갖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를 다독여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