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와 O는 막역한 사이였다. 둘은 고등학교 시절 선후배로 만나 허물없이 지냈다. 어느 정도 허물이 없었냐면 K는 O가 만난 남자들의 성적 취향뿐만이 아니라 그들의 신체적 특징까지 모두 알고 있을 정도였다. O가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K가 비록 자신의 연애적 기행(奇行)에 욕지기를 날릴지언정 그 일을 빌미로 도덕성을 흠 잡거나 오랜 시간의 우정을 내치지 않는다는 것에 있었다.
O는 남자와 이별하거나 분란이 생길 때면 K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내연애를 지속하던 유부남의 아내가 울면서 전화할 땐 그 통화내용을 녹음해 K에게 들려주기도 했다. O가 그럴 때면 K는 O가 정신병자라고, 이렇게 미성숙한 인간이 자기 친구인 게 창피하다고 욕을 했다. O는 K가 그렇게 말하면 어쩐지 자신의 죄를 용서받는 기분이 들었다. 조작하고 은폐하고 우아한 척 가장하면서 뒤에서 몰래 죄짓는 사람들보다는 자신이 그래도 인간적이지 않냐고. 하지만 O는 술을 마시거나 새로운 남자를 만날 땐 K를 부르지 않았다. O가 보기에 K는 넓은 마음을 가졌지만 같이 어울려 다니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사람이었다.
“나 결혼해.”
K가 O의 회사 앞으로 찾아와 청첩장을 내밀었다. K는 식사라도 같이 하자고 했지만 O는 그날 저녁 데이트 약속이 있어 커피 한 잔을 하고 헤어졌다. K의 결혼식에 꼭 참석하겠다고 말하고 헤어졌지만 막상 결혼식 날 O는 K의 결혼식에 가지 않았다. 전날 이별과 재회를 반복하던 유부남 상사와 찐한 밀월여행을 다녀온 탓이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K의 결혼식에 가기 위해 준비하려던 때 상사가 다시 지퍼를 내렸고 둘은 그렇게 쨍한 아침에 다시금 서로의 민낯을 확인했다. 금기된 정절이 가신 뒤에 시계를 보았을 땐 이미 결혼식이 끝날 무렵이었다. O가 전화를 걸었을 때 K는 공항이었다. 브라질로 신혼여행을 떠난다고 했다. O는 거짓 하나 없이 자신의 불참 이유를 말했고 K는 악감정 하나 없는 목소리로 그럴 줄 알았다고 말했다. K의 의연한 태도에 O는 이런 친구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고, 아내의 전화를 받고 도망치듯 자신의 품을 빠져나간 상사의 흔적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우리 결혼하자.”
O가 P에게서 프러포즈를 받았을 때 O는 제일 먼저 K에게 전화했다.
“이 남자랑 결혼해도 되겠지?”
“네 마음대로 해. 어차피 이제까지 네 맘대로 살아왔잖아. 여기 다 묻었네. 엄마 전화받잖아. 잠깐만.”
K는 아이의 밥을 먹이며 O와 통화했다. O는 어쩐지 빈정이 상했다. 모처럼만의 소식. 그것도 자신이 누군가의 가정을 깨뜨렸다는 게 아니라 누군가와 가정을 이루겠다는 낭보였음에도 K는 심드렁했다. O는 누구보다 K에게 축하받고 싶었다. 누구보다 자신을 잘 알고 있는 K였으니까.
“여기 청첩장.”
K의 집 앞에서 만났다. K는 이제 막 잠자리에서 일어난 사람처럼 대충 묶은 머리와 차림새로 O를 맞이했다.
“언니 올 거지?”
청첩장에 찍힌 날짜를 보던 K가 입술을 오므렸다.
“나 이 날 시댁 모임 있는데.”
“시댁 모임은 언제고 갈 수 있잖아.”
“그건 그런데 남편 큰집 일이라.”
“참나, 평소에는 시댁 일에 관심도 없으면서. 너무하네. 남편한테 잘 말해봐. 내 결혼은 이 날 한 번 뿐이잖아.”
“모르지.”
“무슨 뜻이야?”
K는 무표정하게 O를 보며 말했다.
“너 이 결혼 생활 유지할 수 있겠어?”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아니, 그렇잖아. 이제까지 네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내가 다 아는데.”
“이번에는 달라. 나도 정신 차렸어.”
“그래.”
K는 여전히 무덤덤하게 말했다. 호들갑 떨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던 K의 그 무심한 태도가 이제껏 편하다고만 생각했는데, O는 지금 한결같은 그 태도가 어쩐지 자신을 기만하는 것처럼 느껴져 울컥 화가 났다.
“너무한 거 아니야? 내가 좋은 소식 전하려고 여기까지 왔는데. 올 거야, 말 거야?”
“……. 근데 너 내 결혼식에도 안 왔잖아.”
“그때 일 있었잖아. 이미 다 설명했고. 그리고 나중에 내가 축의금 따로 챙겨줬잖아.”
“그럼 나도 안 가고 축의금만 줘도 되겠네.”
“그거랑은 다르지.”
“뭐가 다른데?”
“언니 왜 그래?”
“내가 뭘?”
“내가 결혼하는 게 그렇게 기분 나쁠 일이야?”
“나 그런 말 한 적 없는데?”
O는 어쩐지 자신을 바라보는 K의 눈길이 고깝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언니 나 질투해?”
“뭘?”
“놀 거 다 놀고 괜찮은 남자 만나서 결혼까지 한다니까 괜히 억울하고 이런 마음 든 거 아니냐고.”
O와 K는 길가에 서서 몇 분 실랑이를 했다. 차를 몰고 씩씩대던 O는 어쩐지 자신이 창피하게 느껴졌다. 자신이야말로 K에게 자격지심을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손가락질받기에 딱 좋은 삶을 살았다는 걸 자신도 모르지 않았다. K가 자신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었던 것은 어쩌면 안정적인 삶에서 나오는 정신적 여유가 아니었을까. O는 갓길에 잠시 차를 세우고 고개를 푹 숙였다.
집으로 돌아온 K는 그제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O는 너무도 정확히 K의 약점을 파고들었다. K는 O만큼은 아니어도 그간 중소기업에 다니는 남편에 대한 푸념이나 아이를 낳고나서부터 빠듯해진 자신의 생활을 간간히 O에게 털어놓은 터였다. 아등바등 살아도 딱히 방도가 없어 보이는 불투명한 미래 같은 것들. 남들에게는 하지 못할 자신의 비루함 같은 것들을 K는 O에게 몇 번 말한 적이 있었다.
“재수 없어.”
K가 O에게 무어라 말해도 O가 K에게 함부로 지껄일 수는 없다고 K는 생각했다. 자신보다 키가 훨씬 큰 탓인지 몰라도 자꾸만 자신을 내리 깔아보던 O의 눈길이 생각났다. K는 그간 O가 자신에게 보낸 수많은 죄의 흔적이 담긴 갤러리를 들여다보았다. 관계를 끊자고 말하던 O에게 매달리는 유부남 상사의 문자 캡처가 있었다.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듯 O는 상사에게 진저리가 난다며 캡처를 K에게 확인시켰었다. K는 문자 위에 쓰인 번호로 청첩장 사진을 찍어 상사에게 보냈다. 그리고 그간 O가 자신에게 보낸 카톡들 중 상사의 꼭지가 돌만한 것들을 추려 같이 첨부했다. K는 어쩐지 마음 한 구석이 해소되는 기분이 들었다.
O의 결혼식 당일. K는 시댁 모임에 간 남편과 아이 덕에 평소와 달리 여유로운 아침을 맞이할 수 있었다. 정오쯤 뒤늦은 식사를 하고 커피 한 잔을 하는데 후배로부터 연락이 왔다. O의 결혼식이 쑥대밭이 되었다고. 중년 남자가 찾아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O를 찾았다는 것이다. 급히 나온 O가 중년 남자의 손을 잡고 신부 대기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고, 신랑이 들어가더니 고성이 오가고 급기야 당일 결혼식이 취소되었다고. 축의금을 낸 하객들은 배를 채우기도 전에 길게 줄 서서 축의금을 환불받았다고 한다. 살해 현장의 폴리스라인처럼 빨간 융단의 가림막이 신부대기실을 막았고 눈물범벅이 된 O와 쓰러지는 신랑 측 어머니를 본 것이 마지막이라고 했다.
K는 어쩐지 O에게 너무 심한 짓을 저지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K는 엎질러진 물이라 생각하며 O와의 기억을 지웠다. 하지만 아주 가끔 야근을 하거나 아이가 말을 듣지 않거나 일이 풀리지 않을 때면 K는 O가 생각났다. 아무런 가책이나 거리낌 없이 욕지기를 날릴 수 있는 대상. 앞뒤 헤아릴 필요 없이 나오는 대로 아무렇게나 말해도 되는 사람. 1차원적 자극만을 가져 깊이가 존재하지 않는 내면. 인간으로 살면서 인간성을 상실하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O는 그게 되는 인간이었다. 그래서 가능했다. 무자비한 힐난과 거리낌 없는 단어 선택. O에게 도덕이란 없었고 그 도덕 없음이 자신에게 권한을 부여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K는 생각했다.
O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을 들으면 K는 뒷골이 당겼지만, 그만큼 O에게 뱉어 낼 수 있었다. 그간 묻어 둔 여분의 스트레스까지 모두 모아 O에게 욕지기를 부어 댈 때면 어쩐지 ‘힐링’된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감정적 쓰레기통. K에게 O는 길티 플레져였다. 주변 사람 누구에게도 O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다행히 O와 K의 생활 반경은 너무나 달랐고 같은 학교를 졸업한 동창 몇몇을 제외하고 그 관계에 교집합을 가진 사람을 만난 적이 없었다. K는 그 점이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O가 어울리는 무리들은 K의 관점에서 시대를 역행하는 아이들이었다. K는 그들이 같은 여자로서 수치스러웠다. O가 자신의 남성편력을 고백하며 마치 그것이 자신의 성적인 매력과 사람을 끌어당기는 재능인 듯 여길 때면 K도 당장 O와 인연을 끊고 싶기도 했다. K가 좋아하던 O의 모습은 이제 없었다. 하지만 K의 어마 무시한 말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그래, 나도 내가 잘못한 거 알아.”하고 말하는 O를 보고 있으면, 알면서도 끊임없이 죄를 저지르는 인간은 사실상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 요즘 왜 이렇게 예민해. 예전 같지 않아.”
K의 남편은 아이에게 소리 지르는 K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이제 막 7살이 된 아이는 자꾸만 보챘다. 퇴근이 늦어지면 끊임없이 전화했고 집에서는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꼴을 두고 보지 못했다. 엄마를 사랑하는 만큼 엄마 옆에 들러붙어 있었고 아빠가 놀아준다고 말해도 엄마를 대동해야 했다. K는 슬슬 지쳐가고 있었다. 회사에서 실수가 잦았고 스스로의 역량에 의문이 들었다. 내면의 균형이 무너지자 삶의 균형도 중심을 잃었다. 중심이 없어지자 모든 것이 아슬아슬했다. 남편과 자주 다퉜고 평소에는 하지 않는 말들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순간도 생겼다. K는 마음이 무거웠다. 어디 가서 시원하게 욕이라도 내뱉고 제 멋대로 굴고 싶은 욕구가 강렬히 일었다. K는 어렵사리 인터넷과 SNS를 뒤져 O의 흔적을 발견했다. K는 O에게 DM을 보냈다.
둘은 2년 만에 어색하게 마주 앉았다.
“언니가 안 그랬어도 어차피 오래 못 갈 결혼이었어. 그 새끼 모아 둔 돈도 생각보다 너무 없고 걔네 엄마 완전 사이코였어. 집 한 채 사준 걸로 어찌나 생색을 내는지 솔직히 결혼 준비할 때부터 아니다 싶은 생각도 있었고.”
“그래서 지금은 만나는 사람 있어?”
“그 일 있고 다시 그 남자랑 만나.”
“그 남자?”
“상사.”
상사는 여전히 그 자신의 결혼은 유지한 채 O와 만남을 이어가는 중이라고 했다. O는 요즘도 가끔 그 와이프의 전화를 받았고 간첩처럼 교묘한 작전을 짜 데이트를 했다. 상사를 메인에 둔 O의 연애는 여전히 멀티태스크였다. 왼팔로 뜨겁게 남자를 끌어안고 오른손으로 이별의 카톡을 보냈다. 만나는 동시에 이별하고 이별하는 동시에 만남이 이루어졌다. 과거와 데칼코마니 같은 O의 현재를 들으며 K는 엷게 미소 지었다. 따뜻한 차 한 잔에 두 사람의 어색함도 같이 녹아내렸다. 마치 어제 만난 사이처럼 둘은 자연스럽게 예전의 관계로 복귀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