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에겐 이상한 습관 하나가 있었다.
틈, 남편은 틈을 좋아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랬다. 유아기적 버릇처럼 남편은 틈이 보이면 으레 눈을 갖다 대고 틈 안을 살피거나 아니면 틈의 까칠한 면에 검지를 대고 한참을 있었다. 그럴 때면 바보같이 입을 반쯤 벌리고 넋 나간 사람의 얼굴이 되곤 했다.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누구나 무의식 중에 나타나는 버릇들이 한두 가지는 있으니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남편을 이해하려 한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그런 행동을 하는 남편이 몸서리 쳐지게 싫었던 적도 없다. 바람 좀 피우라고 비상금 모른 척해줬어, 친정 엄마와 농담할 만큼 퇴근 시간이면 항상 매번 정각에 집으로 돌아왔고 동료들과 술을 먹고 주정을 부린 적도 없었다. 심지어 야근을 할 때면 2시간에 한 번 꼴로 집 상황을 체크했다. 주위 친구들도 남편 이야기를 올릴 때면 언제나 자신들의 남편 흉으로 시작해 내 남편의 칭찬으로 마무리했다. 화려한 싱글을 즐기고 있는 오랜 친구 진희는 물론 예외였다.
남편의 월급은 고만고만했다. 하지만 나도 손이 큰 편이 아니고 남편도 딴 데 돈 쓰는 타입이 아니라 우리는 남들 모으는 만큼은 모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시댁에서 물려준 분당의 아파트는 대출조차 껴있지 않아 큰돈 드는 곳이 딱히 없었다. 지하철이 새로 생기며 집값도 올라 공짜로 경사를 얻은 셈이었다. 난임 진단에도 불구하고 억척스럽게 아이를 요구하지 않는 남편의 태도 또한 고마울 뿐이었다. 이렇다 보니 남편이 그깟 틈을 들여다본다고 해서 나무라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다소 기이한 버릇이긴 했지만.
남편을 출근시키고 늦은 아침을 먹고 청소기와 세탁기를 돌리고 설거지를 하고 나면 으레 핸드폰이 울렸다. 커피 한 잔을 준비해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전화를 받으며 게으른 정오가 시작되었다. 이직에 성공한 진희에겐 두 달이라는 황금 같은 휴가가 주어졌다. 인수인계도 잘 마무리되었고 연봉도 1.5배 더 올랐다고 한다. 결혼 대신 일을 선택했노라고 공공연히 선포하고 다니던 진희에게는 당연한 결과일지도 몰랐다. 매진할 가정이나 신경 쓸 시댁도 없었고, 무엇보다 대학 3학년에 부모님마저 돌아가셨기에 그녀는 진정한 자유인이었다. 다행히 진희 아버지는 재력가였다. 덕분에 진희는 매사 도전 정신이 투철했다. 남들에겐 전부일지 모르는 것들이 그녀에게는 일종의 취미였던 셈이니 잃어도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 무모한 자신감은 진희를 더 높은 곳으로 이끌고 있었다. 예쁘장한 외모에 인기도 많았다. 여자애들은 특히 그녀를 싫어했다. 그렇다 보니 주위에 말 털어놓을 상대가 나뿐인지라 진희는 부쩍 자주 전화를 걸었다.
남편에게 허락받고 같이 제주도에 놀러 가자고 했다. 허락은 무슨, 통쾌하게 받아쳤지만 그리 쉽게 집을 떠날 수가 없었다. 나는 요즘 만나는 그 남자랑 같이 가는 것이 어떠냐고 했다. 진희는 그 남자도 당연히 같이 가는 거라고 했다. 아무리 결혼한 여자라도 커플 사이에 껴서 가는 것은 무리라고 되받아치자, 진희가 뜬금없이 고백을 했다. 그 남자가 부인 몰래 제주도에 체인점 카페를 하는데(물론 동업자는 있고), 아무튼 한 달에 한 번씩 가게 돌아가는 상황을 보려 제주도로 내려간다는 것이었다. 진희의 연애사를 익히 알고 있었지만 유부남과의 만남에 이토록 당당한 적은 처음이라 살짝 당황한 목소리로, 거기에 내가 왜 끼냐고 물었다. 그러자 부인이 보통 여자가 아닌데 혹여나 걸리면 비즈니스 미팅이라고 뻥을 치겠다는 것이었다. 뒤통수가 얼얼한 느낌이었다. 감히 베스트 프렌드를 자기들 불륜에 끌어들이려 하다니. 토라진 말투로 뭐 그런 게 다 있냐고 했다. 그 부인이 정말 보통이 아닐까? 보통 아닌 여자가 왜 남편이 몰래 사업하는 걸 모를까. 시답잖은 삼류 드라마 같았다. 유부녀의 한 명으로서 순간 역정이 솟았다. 말해서 뭐할까 싶어 이 또한 진희의 먼지 같은 연애사 중 하나일 것이라 치부하며 그저 말을 듣고 응응, 하고 대답만 했다.
“자기야, 자기도 그런 거 있어?”
“그런 게 뭔데?”
“나한테 숨기고 있거나 아니면 뭐 내가 몰랐던 특이한 점이나 아무튼 막 그런 것들 말이야. 혹시 나중에 충격받게 될지 모르는 그런 이상한 거 있어?”
남편이 밥을 밀어 넣은 통통한 볼을 씰룩 거리며 한참을 웃어댔다.
“내가 놀아봤자 니 손바닥 위라매. 이 사람아 나는 보이는 게 전부입니다. 비밀 좀 가지게 휴가라도 주면 몰라도…….”
남편의 다정한 말투와 함께 수저로 내 머리를 살짝 쳤다. 무안함에 머리를 감싸고 오히려 눈을 흘겼다. 맞다, 남편은 취미란에 무얼 적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 보통의 남자였다. 보통이라는 말은 안정감을 주고 그 안정감은 평범한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만드는 유능한 장치였다. 남편의 매력은 잘 포장된 시멘트 도로처럼 수월하게 흐르는 삶에 있었지만 사실 평범함의 기준이란 너무나 애매모호했다. 가끔 남편은 평범함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바로 그게 문제였다. 그리고 ‘그게 문제’라고 밖에 말할 수 없을 만큼 우리 생활은 평탄했다.
“비가 샜나 봐.”
예상치 못한 폭우에 전국에선 사고 소식이 잇달았다. 지은 지 얼마 안 된 아파트였지만 폭우를 이기지 못하고 서재의 책장 쪽 모서리 부분이 시커멓게 젖어 있다. 나는 마른걸레를 들고 남편에게로 갔다. 남편은 마른걸레를 이어받아 벽을 닦고 급한 대로 선풍기를 틀어 벽을 말리고 있었다.
“이거 뭐야. 부실공사 아니야?”
살짝 벗겨진 벽지 사이로 금이 간 것이 보인다며 소리를 쳤다. 남편은 책장 사이로 몸을 구겨 넣었다.
“틈이네.”
순간 하강하는 롤러코스터에 몸을 실은 사람처럼 다리에 힘이 풀리고 심장이 풀썩거렸다. 좁은 공간에 기어이 들어간 남편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다만 남편의 눈은 조심스레 틈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내 시선을 피해 다른 여자의 다리를 훔쳐보듯이. 그가 홀로 있는 서재에 흐르는 야릇한 기운에 갑자기 구역질이 밀려왔다. 점점 기어들어가는 그의 뒤통수에 마른걸레를 던지고 싶었다.
“자기, 빗물 고이면 곰팡이 슬어.”
나는 뱃심에서부터 뽑아낸 목소리로 남편을 향한 감정을 대신했다. 단순한 버릇에 불과하다. 내가 휴대전화의 터치펜으로 자꾸 머리를 긁어대는 것처럼, 아이크림을 바를 때면 절로 입이 벌어지는 것처럼, 화장실에서 볼일을 볼 때면 꼭 음악을 듣던지 책을 보던지 해야 하는 것처럼. 굳이 신경 써도 되지 않을 버릇은 누구나 있다. 나처럼 남편 또한 마찬가지다. 그러나 틈이 주는 그 불쾌함은 가시지가 않았다. 왜 하필 틈인지 혹시 그가 어릴 적 틈과 관련된 트라우마라도 있어 틈에 그렇게 집착하는지. 그렇다면 그 사연은 무엇이고 혹여 내가 놀랄 수 있는 거리의 것인지. 나는 한동안 쉬지 않고 남편과 틈을 끈끈하게 연결시키고 있었다. 아니면 내가 인식하고 있는 틈이라는 것이 불손하기 때문에 민감한 것인가, 의문을 의뭉스럽게 감추고 서재에서 나왔다.
“나 지금 어딘 줄 알아?”
앙칼진 목소리로 진희가 대뜸 물었다. 틈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 있어 그런지 불쑥 찾아든 진희가 반갑지만은 않았다.
“뭐야, 연락도 없이 웬일이야?”
“그이가 이 동네 일 있다 그래서. 점심에 시간 된다고 같이 밥 먹자 그러기에 여기서 좀 비비다 가려고. 어차피 너 매일 집에 있으니까.”
“내가 뭐 집에만 있냐? 사실 오늘 남편이랑 같이 푸켓 가는 날이야.”
“어머, 진짜? 내가 날을 잘못 골랐나? 몇 시 비행기인데?”
취소됐다는 말이 차마 안 떨어졌다. 몸이 안 좋다고 하자 남편이 너무 걱정하기에 날짜만 미룬 것이라고 변명했다. 진희는 다 안다는 듯이 눈을 흘겼다. 어차피 그럼 무효네, 집에 있는 거 맞네. 가뜩이나 신경이 곤두서 있는 나를 앞에 두고 약을 올리는 진희가 얄미워서 뭐 마실래,라고 묻지도 않았다. 하지만 진희는 벌떡 일어나 주방으로 가서는 커피 머신을 작동시켜 에스프레소 두 잔을 내어왔다.
“네가 주인 같다야.”
“이런 집은 빤하지 뭐.”
빤하다는 말이 이상하게 기가 막혔다. 살림하는 여자의 집이 빤하다는 것인지, 신도시 아파트 입주자들의 생활 구조가 빤하다는 것인지.
“우리 그이 사는 집도 이래.”
“그 사람 집도 갔었어?”
“응, 그 집 아들이 미국에 있거든. 부인이 가끔씩 가서 봐주고 그러나 봐.”
“그럼 부인 미국 갔을 때 몰래 간 거야?”
“몰래가 뭐야, 그이 초대받고 갔지. 그런데 웃긴 게 뭔 줄 알아? 여자들 생긴 건 다 다른데 왜 취향은 다 똑같지? 그이 집 인테리어도 그 여자가 했다는데 너네 집이랑 엄청 비슷하다. 집 구조도 똑같고. 하긴 파는 물건이 다 거기서 거기니까 그렇기도 하겠다.”
“너 거기서 잠도 잤어?”
진희가 허리를 젖혀 웃었다. 진희 특유의 웃음소리가 거실을 한가득 메웠다. 의식하지 않아도 유연하게 구부러지는 허리에는 군살 하나 잡히지 않았다. 뭐가 좋아 죽겠는지 진희는 한참을 웃더니 말했다.
“야, 어쩜 결혼한 여자들 다 똑같니. 우리 그이 와이프도 이상한 낌새 눈치채고는 대번에 그렇게 물었다더라. 거기서 잤냐고. 안방에서 했냐고.”
“부인도 알았는데 어쩔 거야? 그만 둘 거야?”
“심증이지 뭐. 무슨 증거라도 있어? 내가 좀 치밀해? 우리 그이는 더 해.”
“그럼 계속 만나는 거야? 결혼은?”
“아서라, 결혼은 무슨. 이혼 이야기 나오면 내가 노 쌩큐야. 이대로가 좋아.”
나는 할 말이 없어 찻잔만 쳐다보았다. 속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때 내가 소개팅 나갈 거 그랬어. 너희 남편 원래 내 거잖아.”
그랬다. 회사를 막 입사한 후 진희는 내게 소개팅 하나를 주선했다. 회사의 존경하는 상사가 마련한 자리인데 자신은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 또한 남이 버린 자리에 나가기 싫었지만 진희의 입장이 곤란해질 것을 우려해 억지 춘향으로 소개팅에 나갔다. 그리고 남편을 만났다. 알고 보니 그날 진희는 그 존경하는 상사와 가까운 사이로 발전했다고 한다. 우스갯소리로 진희는 내 남편을 ‘내 거’라고 불렀다. 번번이 들어온 말인데도 오늘따라 가시 돋치게 느껴졌다.
“나도 결혼 생각 안 해본 건 아닌데. 그거 나랑 안 맞아.”
“그렇다고 평생 이렇게 살 수는 없잖아.”
“이게 뭐 어떤데? 솔직히 너 가끔 나 부럽지 않아?”
반사적으로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자 진희가 다시 말을 이었다.
“하긴 너는 결혼해서 팔자 폈지. 너희 남편 정도면 또 모르지. 아무리 생각해도 너 결혼 참 잘한 것 같아. 네 남자 진짜 괜찮은 거 같아. 아깝다, 정말.”
진희의 ‘그이’는 생각보다 평범했다. 아파트 입구에 차를 세우고 기다리고 있다며 진희가 굳이 나를 끌고 가 그에게 소개했다. 죄책감도 아니고 그렇다고 멸시도 아닌 감정이 뒤섞여 눈을 마주치는 것이 어색했다. 생각보다 그는 인상이 좋았다. 말주변이 없어 여자분한테 뭐라고 자신을 소개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머리를 긁적이는 모습이 순박해 보이기까지 했다. 진희는 발랄한 몸짓으로 차에 올라탔다.
담담하게 넘어가도 될 일인데 자꾸 예민한 바늘 끝으로 누군가 나를 찔러대는 것 같았다. 의식하지 않으면 자꾸 이마에 잔뜩 힘이 들어가 미간이 금세 쭈글쭈글 해졌다. 아파트 입구에서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천천히 계단으로 올라갔다. 현관의 문고리를 잡고 나는 조그마한 소리로 욕을 했다.
틈이 더 벌어져 있었다. 엉성하긴 해도 대충 풀질을 해 틈을 가려 놓았건만 이상하게 틈이 전보다 더 벌어져 있었다. 나는 남편을 힐끔 쳐다보았다. 주방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내 시선이 느껴졌는지 남편이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본다. 나는 틈이 더 벌어졌다고 말하고 이내 후회한다. 남편이 빠른 걸음으로 서재에 다가온다. 쿵쾅쿵쾅, 남편이 신나듯 굴리는 발소리가 거슬린다. 나를 지나쳐 곧장 틈으로 다가간다. 틈을 유심히 보던 남편이 고개를 돌린다.
“일단 그냥 놔둬야겠다. 나중에 내가 알아서 할게.”
“어떻게 알아서 한다는 거야?”
남편이 크게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쇠기 어린 목소리로 남편에게 대꾸하고 말았다. 충동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 속, 계속해서 틈을 들여다보는 남편의 뒷모습이 나를 예민하게 만들었다. 남편은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주방으로 돌아갔다. ‘물어볼까? 왜 틈을 들여다보는지 물어볼까?’ 나는 몇 번을 서성이며 고민했다. 어느새 멍한 발걸음이 주방에 다다랐고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남편이 올려다보았다.
“나 하루 종일 청주 갔다가 천안 갔다가 구미까지 찍고 왔어. 오늘 진짜 피곤해서 그래. 틈 좀 있다고 아파트 무너져? 이거 휴일에 당장 고칠게.”
“그럼 뭐가 좋다고 틈에다가 눈알 빠지게 고개 들이미는데.”
“지금 너 화내? 그리고 너 얼마 전부터 왜 그렇게 틈에 집착하는지 모르겠어. 방금도 네가 말해서 보고 온 거고 내가 고치겠다고 말했잖아.”
“그렇지만 꼭 날 이상한 사람처럼 취급하니깐.”
남편이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너는 말이야, 상황을 왜곡하는 버릇이 있어. 전부터 느낀 건데 가끔 보면 너 좀 음흉해.”
“뭐라고?”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씩씩 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남편은 화가 풀리면 나오라고 말했다. 곧 서재의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서재의 문을 열자 틈 속의 틈을 찾아 구석에서 부자연스러운 몸으로 구겨져 있는 남편이 눈에 들어왔다.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정말이지 결정적인 한 장면이었다.
“내가 어째서 상황을 왜곡한다는 거야. 그리고 어디가 음흉하다는 거야?”
쩌렁쩌렁 울리는 나의 목소리가 서재 안을 가득 메웠다.
“지금 구석에 쳐 박혀 있는 당신이 난 더 음흉해 보이거든. 거기서 대체 무얼 엿보고 있는 거냐고 그 틈에 뭐 보물이라도 있어?”
남편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고개를 모로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소리야? 난 지금 틈을 메우려 하고 있잖아. 대체 아까부터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아침 일찍 바쁘게 출근하는 남편의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자는 척을 하며 몸을 이리저리 뒤척여 남편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남편은 나를 한 번 바라보더니 곧장 출근했다. 도무지 사과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고 분위기가 어색해서 어찌할 수가 없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기분이 풀릴 때까지 사과를 했을 남편이지만 오늘은 상황이 달랐다. 나는 이불 안에서 더운 숨을 계속 내뱉으며 괜히 앓는 소리를 내었다. 오후에 진희에게 전화가 왔다. 그 남자와 이틀 뒤 제주도로 놀러 간다며 감귤 한 상자를 사 오겠다고 했다.
서재의 틈이 메워져 있었다. 완벽하진 않지만 남편은 정말 틈을 감추어 놓았던 것이다. 나는 문득 남편이 나의 의도를 눈치챘나 싶어 뜨끔했다. 이 상상의 출발선이 어딘지는 몰랐지만, 어제 틈과 함께 있던 남편의 모습이 꼭 불륜 현장을 들킨 비굴한 사내의 모습 같아서 마음이 뒤숭숭했다.
남편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서재로 들어갔다. 내 눈치를 보는 것 같았지만 말이 전혀 없는 걸로 봐서 아직 화가 풀리지 않은 것 같았다. 양치를 하는 도중 어제의 장면들이 스멀스멀 밀려왔다. 친정에 전화해서 엄마에게 하소연을 하기에도 너무나 우습고 경박한 싸움이었다. 나는 잠시 착각을 했나 싶었다. 사실 남편은 틈을 들여다보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냥 손이 절로 닿아 만지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어쩌면, 정말 내가 상황을 왜곡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논리에 맞지 않는 변명들이 싹을 틔웠고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앞뒤 상황이 어찌 되었든 그건 정말 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먼저 사과를 하기 위해 서재 문을 두드렸다.
“여보 어제 내가 미안했어.”
남편은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건성으로 대답했다. 나는 평소에는 부리지도 않는 애교와 교태를 떨어가며 남편에게 용서를 구했다. 남편은 못 이기는 척하더니 이내 미소를 지으며 나를 안아 주었다. 어제의 싸움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었는지 새삼 느끼며 남편의 품에서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은은한 풀 냄새가 나는 남편의 코롱은 언제나 기분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다. 우리는 한순간에 뒤엉켜 있었다. 한참이나 전희를 나누던 중 남편이 슬금슬금 밑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결혼 전에도 몇 번 그런 경험이 있었지만 내가 썩 내켜하지 않아 서로 즐기지 않았다. 하지만 깊이 내려간 남편이 올라올 생각을 할 줄 모르는 것이었다. 나는 잠시 딴생각을 해댔다. 그러다 혹여 남편이 그곳에서 잠들었나 싶어 이불을 들춰 남편을 바라보았다. 남편의 시선은 지나치게 그윽했다.
틈, 틈, 틈.
멈칫하며 몸을 뒤로 밀다 벽에 뒤통수를 쾅하고 부딪쳤다. 더불어 내 아래에서 자기만의 유희를 즐기는 남편의 시선이 자꾸 눈에 밟혀 머리가 어질 했다. 불현듯 떠오르는 틈에 지레 겁을 먹고 남편의 머리통을 잡아끌어 올리려는 순간 남편은 장난스럽게 내 손을 뿌리치고 좀 더 가까이 얼굴을 들이미는 것이었다. 나도 모르는 괴성이 침실에 퍼지고 남편이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남편은 이내 멋쩍은 표정으로 내 옆에 누웠고 불같이 타오를 것 같은 밤은 다시 어색한 공기로 채워지게 되었다.
다음날, 퇴근한 남편 손에 무언가 가득 들려 있었다. 철물점에서 실리콘을 샀고 벽지를 제작한 곳에 부탁해 샘플과 풀을 얻어 왔단다. 알려준 대로 하면 다음번에 비가 와도 벽지가 벗겨지는 일은 없을 거라고 했다. 풀을 물에 타고 있는 동안 남편은 서재의 문을 굳게 닫아 놓고 있었다. 나는 밤늦게 들어오는 남편을 기다릴 때보다 더 조마조마한 마음이 들어 문 앞을 서성거렸다. 이미 내 안에서는 틈의 아귀가 괴물처럼 자라나서 마치 블랙홀처럼, 주위의 모든 공기를 그 틈이 빨아 당기고 있는 느낌이었다. “자기는 왜 자꾸 틈을 보는 거야?” 이 사소한 한 마디를 간직한 내 목구멍은 철옹성보다도 굳게 잠겨 뱉어내었다간 나 자신이 한없이 초라한 존재로 전락하진 않을까, 조바심 나게 만들어 댔다.
귀를 대었다. 갑자기 열린 문소리에 티 나지 않을 만큼 놀라며 뒷걸음쳤다. 그러나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 남편에게는 느린 프라임으로 보였나 보다. 경계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여간 기분 나쁜 게 아니었다. 남편은 풀을 들고 다시 서재로 들어갔다. 풀의 비릿한 향이 코끝을 스치며 가볍게 내 숨을 막았다.
“너 혹시 권태기 왔어?”
남편이 벌컥 문을 열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도 다정한 남편이 말없이 문을 열고 들어온다. 경계가 풀리지 않는 시선에서 불안의 냄새가 새어 나온다. 그러나 여전히 흠잡을 곳 없는 남편은 오늘도 선망의 대상으로 친구들의 수다에 오르내린다. 하루의 절차처럼 남편은 서재에 들어가고 어김없이 문이 닫힌다. 틈은 견고한 손길에 의해 자취를 감추었고, 빗물이 남긴 눅눅한 흔적도 함께 사라졌다. 그러나 그 뒤엔 아직도 틈이 존재하고 있음을 안다. 그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의 조용한 취미가 나를 숨 막히게 하지만 일상은 변화 없이 흘러간다. 남편이 은밀한 취미를 즐기고 있을, 그 문 뒤에 숨어 나는 오늘도 틈을 노리지만 저녁의 공기는 너무나 온순하고 부드러워 그냥 스르르 잠에 빠지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