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에 이르는 방식

by 존치즈버거

얼마 전 오래 알고 지낸 동생이 집으로 놀러 왔다. 서로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개버릇 남 못 준다고 또 둘이 서로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사건 같은 게 아니라 삶의 형식이나 감정들에 대해. 이때는 좀 덜 하나마나한 이야기가 된다. 나는 행복은 자극이다, 행복은 개소리야, 중요한 건 권태를 다루는 방식이라고 말했고 동생도 일견 동의한 듯 보였다. 우리 대화는 늘 그런 식이었다. 던지듯이 툭툭. 예전에는 아니라고 토를 달고 그랬는데 이제는 둘 다 늙어서 서로의 의견에 고개만 끄덕인다. 그래, 너한테는 네 삶이 맞고 나한테는 내 삶이 맞고. 그런데 뒤돌아 보면 둘 다 틀리게 살아온 걸 수도 있고. 나중에 다시 만나면 그 틀린 지점에 대해 오류를 바로잡겠지. 서로 무언가를 승인할 사이는 아닌데 그냥 그렇게.


동생이 가고 나서도 나는 내가 했던 말들을 곱씹었다. 그래, 역시 행복은 개소리지, 하다가 그 주와 그다음 주 주말에 딸을 보면서 내가 뭔가 잘못 말한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행복해하는 사람이 바로 옆에 있는데 어떻게 행복이 개소리가 될 수 있을까. 정말 아무도 행복하지 않아서 여기 고개 돌리면 우거지 죽상 저기 고개 돌리면 우거지 죽상, 온통 우거지 죽상도 아니고 내가 낳은 내 새끼가 이렇게 행복하다는데. 놀이터에 가서 친구들이랑 한바탕 논다는 게, 놀고 왔다는 게, 또 놀 거라는 게, 놀아도 된다고 허락해주는 부모가 있다는 게, 자기가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다는 모든 사실이 자길 행복하게 말한다는데 나는 어쩌자고 행복이 개소리라고 하는 걸까. 아이가 자기 입으로 내가 자기 행복의 토양을 만들고 있다는 게 너무 이상해서 내가 지금 현실을 살고 있나 하는 착각마저 들었다. 어쩌자고 그런 소리를 하고 있을까. 어쩌면 행복을 개소리로 만드는 건 그 개소리 자체가 아닐까. 행복할 수 있는 주체로서의 실패를 마치 무슨 대단한 선언이라도 된다는 듯 나는 떠들고 있을까. 내가 왜 행복할 자격이 없어? 내가 왜 행복을 몰라? 여기 바로 옆에 행복이 있는데.


그 생각을 며칠 계속 곱씹다가 방금 전에 그냥 문득, 아, 나는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구나. 맨날 사람들은 '직면'하지 못한다고 성토하는데 사실상 나 자신이 '직면'을 좀 해야 하는 거구나 싶었다. 그러니까 슬픔을. 슬픔을 안다고 말만 하지, 결국 그것도 그냥 슬프다는 감정 덩어리만 굴리는 일, 그냥 입에 맴도는 단어 자체지. 정말 뭐가 슬픈지까지는 들어가지를 못 하니까. 슬픈 걸 배제한대도 행복이 도사리고 있을 리는 없지만 그래도 나의 행복을 개소리로 만드는 슬픔과 불안에 대해서는 품을 들여서라도 좀 깊게 들여다보고 만져보고 씹어보고 느껴야 하지 않을까. 그것들을 다 알고 다 끌어안고 나면 적어도 후련하지는 않을까. 가로막힌 장벽 뒤에 행복은 없을지 몰라도 적어도 돌덩이 하나를 치웠으니 전보다 가뿐해지지 않을까. 가뿐한 마음 안은 사람이 설마 행복은 개소리니 이런 이야기 하고 있을까. 행복이 자극이란 생각은 변함없는데 그렇다고 마치 그런 게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굴면 우리 아이가 너무 큰 착각에 빠진 거니까. 부모로서 해줄 건 없고 행복하다 말할 수 있을 때 마냥 행복한 사람 만들어 주기, 뭐 이런 마음으로. 하고 싶은 걸 하려면 하기 싫은 것도 잘해야 하니까. 힘들다고 외면하지 말고 내 힘으로 돌덩이 다 옮기면서 삶의 절정으로 나아가 보기. 정상에 아무것도 없음 어때 뭐, 근력은 좋아질 텐데. 이런 생각하는 2022년 봄. 할 게 많다. 어서 걷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