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치버의 <돼지가 우물에 빠졌던 날>
존 치버를 알게 된 것은 제목이 마음에 들어 구입한 ‘사랑의 기하학’ 때문이었다. 나는 단숨에 그 책을 읽고 그에게 반했다. 다음 날 바로 단편집 3권과 장편인 팔코너를 구입했다. 그리고 그는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레이 브래드버리와 함께 '읽는 순간 울게 만드는' (나만의) 3대 작가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는 딱히 감동이나 슬픔을 주려 애쓰는 작가는 아니다. 일어난 일에 대해 말하고 그 일이 만들어낸 삶의 균열에 대해 이야기한다. 건조하고 적확한 단어의 쓰임이 심금을 울리는 것은 그 특유의 '평범성' 때문일 것이다. 소설 속 일들은 언젠가 우리에게 일어났거나 일어나고 있으며 일어날만한 일들이다.
존 치버의 작품들은 보통 평온한 일상을 아주, 조금씩, 천천히 파괴하는 틈과 균열에 집중한다. 그의 소설 속 인물들은 미국 교외의 중산층이 다수다. <돼지가 우물에 빠졌던 날>은 그의 단편집 중 하나고 이 책의 표제작인 동명의 소설은 그의 단편소설 중 대표작이라 할만하다. 여기에 수록된 작품들도 거의 ‘셰이디 힐’이란-실존할 것만 같은 가상의 공간-교외 지역이 배경이다. 시간적으로는 미국의 대공황 전후이다. 소설 속 인물들은 대부분이 남의 눈을 상당히 의식하고 산다. 물질적으로 매우 풍요로웠던 시기, 미국의 백인 중산층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그들은 대단한 자부심을 느낀다. 부모들은 매일 사교 모임에 참석해 교류하고(진의 슬픔), 파산하고도 이전 생활과 같은 씀씀이를 유지하기 위해 범죄도 서슴지 않는다(셰이디 힐의 절도범). 그들에겐 자기들이 가진 것이 곧 자기의 정체성이자 힘이다. 자기의 내면을 가득 채운 공허에 대해 신경 쓰진 않는다. 그들의 삶에는 언제나 외형은 놔둔 채 본질의 살을 파먹는 벌레가 존재하지만 그들은 결코 벌레를 직시하지 않는다(사과 속의 벌레).
표제작인 '돼지가 우물에 빠졌던 날'은 말 그대로 돼지가 우물에 빠졌던 날에 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 가족(너드家)의 흥망성쇠를 보여준다. 그들은 '그 일'이 있었던 날 자신들에게 벌어졌던 또 다른 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누며 한가로운 휴가를 즐긴다. 왜 하필 돼지가 우물에 빠졌던 날에 대해 이야기하느냐면, 그 일이 아마도 그곳에 모인 사람들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사건’이라는 점이 제일 우선적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평범함 속에 특별한 이야기를 긷어 올리는 우리의 존 치버답게 깊숙이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다른 이유들이 존재한다.
앞서 말했듯 돼지가 우물에 빠졌던 날, 저 가족들에게는 각자만의 각기 다른 사연이 존재했다. 경품으로 돼지를 타 온 랜디는 우리를 만들어주겠다고 설레발을 치다 돼지를 우물에 빠뜨린다. 집안의 가장인 너드와 마사 이모는 배가 고장 나는 바람에 구명조끼에 의지해 허우적 대며 바다를 빠져나왔다. 랜디의 동생 하틀리는 월척을 낚았지만 하녀의 실수로 물고기가 든 양동이가 엎어지고 만다. 너드의 가족들은 이 날을 이야기하며 향수에 젖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며 이 날은 이모저모에서 엉망진창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어쨌든 돼지는 구해진다. 돼지를 구한 사람은 러셀 영이다. 그는 너드 집안의 일원이 아니다. 뉴욕에 사는 너드 씨네 가족이 여름이면 머무는 여름 별장이 있는 애디론댁스 지역의 토박이다. 러셀은 너드 가족이 따라하기 어려운 북부 토박이 말투를 쓰며 어떤 면에서 그들보다 훨씬 우월해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러셀을 자기의 아랫 사람 정도로만 생각한다. 일한 만큼 대가를 지불하는 갑을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한다. 그리고 이러한 갑을관계는 너드 가족과 러셀의 사이의 어떤 감정적 사건으로 종결된다.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너드 가족의 민낯을 확인하는 것도 이 소설을 읽는 재미다.
너드 가족은 여전히 돼지가 우물에 빠졌던 날을 떠올린다. 그들이 여름 별장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지금, 사실 그들의 사정은 모든 것이 꼬여버린 과거의 여름날보다 더 엉망진창이다. 그들은 전쟁을 겪으며 하틀리를 잃었다. 너드 씨도 예전의 그 양모 회사를 운영하던 사장님이 아니다. 랜디는 실직을 반복했고 그의 며느리는 잔뜩 날이 선 채로 가족들을 대한다. 조앤은 이혼을 했고 얇은 벽으로 기온을 지탱하는, 이 낡은 여름 별장을 떠나지 않겠다고 너드 씨에게 떼를 쓴다. 그녀의 나이는 마흔이다. 그들은 어김없이 돼지가 우물에 빠졌던 날을 떠올리지만 그들은 더 이상 그때의 모습을 유지할 수 없다. 그렇기에 그 날은 그들의 인생을 통틀어 최고의 시절이라 할 수 있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것이 어떤 큰 사건이 될 만큼 인생은 평탄했고 그런 날들이 이어질 거라 믿었다. 돼지는 구원받았고 그들의 삶도 몇 해 더 윤택하게 이어졌다. 하지만 모든 것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지만 실수와 실패가 반복되며 너드 가족의 삶 위로 단단히 똬리를 튼 것이다. 그들은 능숙한 솜씨로 풀매듭을 만들어 돼지를 건져 올린 러셀을 다시 그들의 별장에 초대한다. 그들도 돼지처럼 건져 올려지고 싶은 것이 아닐까.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사실은 그들도 어떤 구원을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들이 힘이 들 때마다 그 날을 떠올린 것은 결국 돼지처럼, 자신들의 삶에도 그러한 풀매듭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돼지는....... 하하하.
결코 쉬운 소설은 아니다. 들뜬 기분으로 휴양지의 햇살 아래가 아닌 잠이 오지 않는 밤 스탠드 아래서 읽는 것을 추천한다. 이 소설을 읽고 유쾌한 기분이 든다면 그것은 소설 자체가 지닌 재미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 재미를 느낀 다음에 우리는 부끄러움이나 슬픔, 상처 같은 것을 떠올리게 될지 모른다. 완독 했을 때 마음이 무너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왜냐면 그것이 인생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가 느끼는 찜찜한 기분에 너무 속상해하지 말자. 책 속 인물들에서 자신의 치부를 확인하는 것도 능력일지 모른다. 인간다움을 상실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될지 모르니. 부디, 사는 동안 한 번은 존 치버를 읽자. 존 치버의 셰이디 힐을 둘러보고 나면 우리는 반드시 무언가 변해있을 것이다.
나의 브런치 작가 명인 존 치즈버거는 존X 치즈버거를 좋아하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이 위대하고 걸출한 작가인 존 치버에서 따온 것이다. 물론 치즈버거가 존X 맛있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