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밤의 재즈

짱구야, 재즈 좀 틀어줘.

by 존치즈버거


모두가 잠든 밤, 나는 도둑고양이처럼 깨금발로 조심조심 거실로 나온다. 그리고 최대한 조용한 움직임으로 가죽 소파에 몸을 묻고, 쳇 베이커의 낮고 따스한 목소리가 담긴 노래를 듣는다. 선곡의 제일 처음은 그의 가장 유명한 곡이라 할 수 있는 ‘My funny valentine’이다. 노란 조명 아래, 냉장고 안에 차갑게 식힌 탄산수를 꺼내 한 모금 입에 물고 음악을 듣고 있으면 마음속 무거운 덩어리가 시원하게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 든다. 가슴을 흥분시키는 비트나 음악이 끝나도 귓가를 맴도는 중독적인 훅은 없지만 재즈를 듣고 있으면 이상하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나만의 비애를 위로받는 기분이 든다.


어릴 때부터 음악을 좋아했다. 신나는 댄스곡부터 한국 특유의 정서가 녹아있는 발라드, 고막부터 내장까지 몽땅 힐링시켜주는 첼로 연주, 따스한 기타 선율이 반짝이는 포크음악, 생경한 언어가 신비로움을 더해주는 제3세계 음악까지. 편식 없이 영양분을 꼭 꼭 씹어 흡수하는 아이처럼, 음악에서만큼은 편견 없이 모든 장르를 내 안으로 삼키기 위해 장르에 선호를 두지 않으려 노력했다. 아쉽게도, 재즈는 내가 제일 받아들이기 힘든 음악이었다.


부드러운 멜로디가 흐르는 라운지 재즈나 크리스마스의 분위기가 한껏 묻어나는 재즈 캐럴송은 듣기에 편안했지만, 잼(Jam)이나 스캣(Scat)이 있는 경우는 음악이 아닌 소음이나 동물소리 같기도 했고 멜로디 자체도 다음 장을 예측할 수 없는 복잡한 추리 소설 같아 도무지 쉬이 흥얼거릴 수 없었다. 권위 있는 평론가들이 명반이라 하니 들어놓으면 해는 되지 않겠다는 요량으로 인내심을 가질 뿐이었지, 사실상 재즈는 미뤄놓은 숙제처럼 꾸역꾸역 해치우 듯 감상하기 바빴다.


그러던 내가 재즈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빌 에반스의 평전 때문이었다. 기억나지 않는 어느 주말, 나는 도무지 나아지지 않는 내 결과물에 대한 우울을 달래기 위해, 좋아하는 예술가들의 고뇌를 찾아 도서관으로 갔다. 고약한 성미를 가진 나는 슬픔을 달래기 위해 타인의 슬픔에 기대는 편이다. 헤밍웨이의 빙산 이론과 퇴고의 괴로움, 실비아 플라스의 불안한 생애와 신경증이 동반된 아름다운 시의 향연을 지나 이런저런 작가들의 곤란들을 마주한 뒤 우연히 집어 든 책은 빌 에반스의 평전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빌 에반스가 흑인 뮤지션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검은 뿔테에 깔끔한 슈트를 입고 개화기 지식인을 연상시키는 분위기를 가진 재즈 연주자. 자유분방하고 약간은 퇴폐적이라 재즈 연주가들을 여기던 나의 편견은 그 책을 후루룩 넘기는 와중에 사라졌다. 물론 그의 생애에도 많은 부침이 있었지만, 연습에서만큼은 게으름이 없었다.


재즈는 무엇보다 음악적 기본기가 중요했다. 글을 쓰는 작가가 새로운 문체나 형식을 만들기 위해 그 먼 옛날 원고지 쓰는 법과 적확한 문장 부호의 사용을 배웠듯이 재즈도 기본을 깨우치고 원칙을 준수하면서도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는 것은 매우 긴 여정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책을 통해 알았다. 감각적이고 어쩔 때는 다소 거만해 보이기도 한 재즈. 때로는 청자를 희롱할 정도로 완전히 새로운 편곡을 그 자리에서 뚝딱 해버리는 그 감각은 충실한 수련의 과정을 반복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단순히 기교와 필(feel)에 기대기에는 재즈는 듣는 사람도 하는 사람도 녹록지 않은 장르였다. 모든 일이 그렇듯 쉽게 얻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집으로 돌아가 빌 에반스의 연주를 들었다. 그가 포마드로 깔끔하게 넘긴 자신의 헤어스타일만큼이나 군더더기 없는 연주를 하기 위해 노력했을 시간들을 떠올렸다. 늘어지던 자세를 바르게 고쳐 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날을 계기로 재즈를 조금씩 들었다. 폭식하지 않고 꾸준히 조금씩. 일단 그 장르가 친숙해지자 재즈라은 장르가 더 이상 어렵게만 느껴지지 않았다. 어색하던 친구와 알 수 없는 계기로 절친이 되듯 나도 모르게 재즈라는 장르를 내 ‘최애’ 장르에 올리게 되었다. 여전히 재즈에는 무지한 사람이지만 적어도 재즈에 내 몸을 맡기는 일이 더 이상 어색하지 않다.


재즈는 연주 자체가 목적이 되는 음악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청자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매끈하게 정제된 결과물을 들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지금’이 이라는 시간성이 중요한 것. 이것은 연극과도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내가 듣는 것은 이미 연주가 끝난 후의 레코딩이지만, 그 안에서 일어나는 연주자들 간의 호흡, 그러니까 일명 ‘케미스트리’는 여전히 생생하게 느껴진다. 재즈의 시초가 노동요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납득이 간다. 상호 협조와 신뢰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내가 재즈를 들으면 위로받는 기분이 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힘든 노동을 달래기 위해 인간이 고안한 생활밀착형 예술. 재즈는 그 시작만큼이나 여전히 변방을 떠도는 음악이기도 하다. 재즈가 주류로 나선 적이 있던가? 주류가 재즈를 ‘취해야만’ 재즈는 중심 무대로 들어온다. 재즈는 여전히 어딘가를 서성이는 느낌이다. 그렇다고 재즈가 그 사실을 슬퍼하는가? 그것도 아닌 것 같다. 나는 재즈의 이런 마이너 한 스타일이 마음에 든다. 나 또한 살아있는 동안 계속 서성이는 사람이었으니까. 나 또한 무럭무럭 성장하여 나의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들에게 최고의 장르이고 싶다.


대부분의 날 인생은 재즈다. 즉흥적인 변주 속에서 최적의 조율을 위해 때로는 타협하기도 하고 때로는 도발적으로 공격한다.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지만 탄생과 죽음이라는 마치 도에서 시작해 결국은 도에서 끝나는 음조처럼 숙명적 카테고리 안에서 움직인다. 전혀 다른 악기를 가졌지만 서로 같은 끝을 향해 달려간다. 타고난 재능과 숙련된 기교 안에 무엇보다 드러나는 것은 연주자의 개성이다. 재즈처럼 살고 싶다. 때로는 살랑살랑 리듬에 맞춰 가벼운 발걸음으로 상대에게 장난을 치고 때로는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열정적으로 토론하고. 조화롭게 상대의 호흡을 받쳐주고 기세 좋게 상대의 리듬을 나의 전부로 만들어 버리는. 재즈를 느끼는 묘미만큼이나 재즈에 대한 상식이 많았으면 좋겠지만 아직까지는 초보 수준이다. 하지만 무궁무진한 재즈의 세계를 탐험할 시간은 많다. 인생은 쉽게 끝나지 않으니. 여전히 변방을 누비는 재즈이지만 한 번 빠지면 달아날 수 없을 만큼 유혹적인 이 음악처럼 나도 아직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타인의 마음을 사로잡는 글을 쓰고 싶다. 감흥에 취해 어깨를 흔들다가도 번쩍 정신이 들게 만드는 음악.


밤의 재즈. 알다시피 밤은 사람을 감상에 젖게 만들지 않는가. 마른 피부에 수분 크림을 바르듯 밤에 재즈를 들으면 현실의 고민들 앞에 파삭하게 마른 심장이 축축하게 젖는 기분이 든다. 꿀에 저민 과일청을 심장 가득 부어내리는 마음으로. 홀로, 라는 공간 설정도 상당히 중요하다. 이건 내면의 스트립쇼와 같다. 하루 동안 걸치고 있던 사회적 역할이라는 이름의 옷을 홀랑 벗어던지고 최대한 편한 차림으로 소파에 너부러져 나만이 아는 나의 수치와 모멸을 재즈에 묻어버리는 시간. 하루 중 유일하게 상처를 상처라고 온전히 고백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조명 아래 드러난 나의 몸은 생채기로 가득하지만, 귓가를 때리는 서라운드 사운드가 심장의 피를 돌게 할 터이니 딱지 아래 새살도 빨리 돋아날 수 있다.


생각해보면, 오늘을 살아내게 하는 힘은 별다르지 않다. 인생은 대부분 물 흐르듯 간다. 다만 그 리듬은 내가 정한다. 지금 나를 생동케 하는 리듬은 재즈의 변칙 코드 아래 움직이지만 마흔이 된 어느 날 나는 보사노바 혹은 전통 국악 그도 아니면 하드코어 테크노일지도 모른다. 다만 지금은 재즈다. 그런 의미로 오늘도 남편과 아이가 일찍 잤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