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편지

사각사각 소곤소곤

by 존치즈버거

10시간이 훌쩍 넘는 비행시간을 견뎌야만 도착할 수 있는 유럽의 작은 나라. 그곳에 나의 오랜 친구가 살고 있다. 그녀의 목소리와 똑 닮은 경쾌한 알림음과 함께 도착하는 노오란 말 꾸러미. 우리는 탁구 시합을 하듯 빠른 속도로 단편적인 소식을 주고받는다. 휴대폰의 1이 사라지는 순간 무료함도 사라진다. 그녀와 나는 종종, 아주 오래 인생을 산 사람들처럼 작금의 기술력에 탄복한다. 격세지감을 말하기엔 너무 젊은 나이면서, 디지털이 좁힌 물리적 거리를 실감할 때면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말하고 마는 것이다. “세상에, 우리가 지금 무슨 세상에 살고 있는 거지?” 전해질 수 없는 서로의 웃음소리는 유쾌한 이모티콘이 되어 왕래한다.


이토록 편리한 세상에 살면서도 우리는 구태여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 서로에게 편지를 보내고야 만다. 누군가를 이를 가리켜 질긴 우정이라고 했다. 3주가 훌쩍 넘는 대장정을 거쳐 도착한 편지. 우편함 속에 단정히 몸을 뉘이고서는 기다리던 계절처럼 향기를 담아 내 품에 와락 달려든다. 고된 여정 탓에 모서리가 접혔지만 무엇보다 또박또박 써진 주소를 보노라면, 목적지를 향해 묵묵히 달려왔을 그간의 수고에 마음이 벅차다. 그 정성에 발맞추기 위해 나는 부러 나의 기다림을 숙성한다. 온전히 친구가 보낸 문장을 소화하기 위해 가족들이 잠든 밤까지 기다린다. 비로소 편지봉투를 뜯는 시간, 나는 누구의 무엇도 아닌 완전한 내가 된다. 나의 허락 없이 타인은 침범할 수 없다. 오로지 나를 향해 수신된 소식을 눈을 밟듯 시선으로 꾹꾹 누른다.


한낱 편지에 이 무슨 거창한 태도냐고 할 수 있겠다. 그녀와 내가 가진 우정이 만들어낸 이상으로 편지에는 특별한 것이 있기 때문이라는 말을 하고 싶다. 편지 가장 처음에 우리는 받는 이의 이름을 쓴다. 사람에 따라 ‘To’나 ‘Dear’ 같은 영단어를 쓰기도 하고 ‘-에게’와 ‘-께’ 같은 조사를 이용하기도 한다. 형식이야 어떻든 내 이름을 불러주고 다정히 인사를 건네어 준다. 반가운 사람의 얼굴을 멀리서 보고 괜히 눈을 깔아 주저하는 발걸음처럼 편지의 인사는 언제나 수줍고 순진하다. 나는 그것이 좋다. 내가 부를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그것을 받아 들고 좋든 싫든 나의 심정을 읽어 줄 단 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 물론 답장이 매번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겐 생활이 있으니까. 그러나 변명이 무엇이라 해도 나의 마음과 시간이 누군가에게 가닿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외로운 공간이 조금은 채워지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일까? 편지에는 입으로 소리 내어 말하거나 단문으로 빠른 시간 안에 담아 보낼 수 있는 이상의 것이 담긴다. ‘차마’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여전히’와 같이 힘겹게 삶을 지탱하는 말줄임표 같은 언어들.


사실 편지를 쓴다는 것은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다. 준비물도 어찌나 많은지 펜과 종이만 있으면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고요한 정적. 이것이 필수다. 편지는 휴대폰 메시지처럼 다른 일을 하는 와중에 무심히 손가락 몇 번으로 발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성 어린 마음만큼 필체도 중요하다. 내 몸을 편안히 놓일 공간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무엇보다 제일 중요한 것은 시간이다. 내가 상대에게 할 수 있는 말과 해야 할 말 그리고 하지 않아야 할 말을 안배하기 위해 우리는 고심을 한다. 고심은 사유를 동반한다. 사유란 침묵을 지키며 번민의 바다를 헤엄치는 일, 생각의 파도를 뚫고 내가 원하는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침묵만큼이나 시간을 흘려보내는 일이 중요하다. 그러니 편지를 쓴다는 것은 내 생애 어떤 시간을 뚝 떼어 상대에게 나누어 준다는 것이다. ‘할애(割愛)’라는 단어의 가장 적절한 예시가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베어낸 시간과 수고는 편지라는 이름의 물질성을 갖는다. 상대에게 편지가 도착한 모습을 상상해보자. 그의 두 손에 나의 순수한 시간이 움켜쥐어 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다만 나의 언어가 상대의 마음속에 살아나 한 인간의 생의 여정에 역사의 일부로 남는 것.


그러니 쓰는 동안은 상대방을 내내 생각할 수밖에 없다. 머릿속 환영처럼 그 사람의 얼굴이 나타났다가 이름이 들리다가 영사기를 돌리듯 천천히 투사되는 추억의 순간들이 떠오른다. 현재의 새로운 소식을 전하려 해도, 그 사람의 존재를 떠올림과 동시에 우리는 반드시 예전의 한 시점으로 돌아가게 된다. 추억이라는 이름의 기분 좋은 반추가 연속되면 마음 편히 자리에 앉아 편지를 쓸 수 있는 지금이 감사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언어와 언어를 고르고 적절한 부호를 찾고 한숨 대신 질문을 덧대고. 어느 순간 잡념은 사라지고 나는 내 안의 가장 깊은 곳을 유영하며 자유를 느낀다. 상대를 생각하며 나의 맨 얼굴을 만난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빌리지 않고 온전히 내면의 힘으로 써 내려간 편지는 스스로를 향한 진실이 되기도 한다. 편지를 쓰는 동안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우리 삶의 철학자다. 소박한 방식으로 값진 것을 얻는다.


“우리가 어떠한 고난과 좌절을 겪고 있다 해도 이렇게 굳건히 살아있어, 너에게 편지를 쓸 수 있어.” 늘 그렇듯 감사의 마음으로 덧댄 추신. 상대에게 건네는 말이자 나를 향한 다짐이 된다.


나는 살갗이 해지고 힘을 잃어 아무렇게나 아가리를 벌리는 황토색 상자를 연다. 7년간 4번의 이사를 매번 함께 견뎌 준 나의 오래 친구. 초겨울 진눈깨비 같은 먼지를 털어낸 뒤 편하게 자리를 잡는다. 복권의 공을 뽑듯 고개를 돌리고 손을 뻗어 아무렇게나 잡힌 편지 뭉치를 꺼낸다. 수업시간 선생님의 눈을 피해 쓴 옆 반 친구의 방학 동안 벌일 장난을 도모하던 사촌의 익살, 어디서든 잘 지내길 바라는 지나간 사랑의 밀어와 좌절의 눈물로 가득했지만 끝내야 이기고야 말겠다는 친구의 결심. 관계의 깊이는 암호로, 마음은 문장으로, 한숨은 줄임말로, 편지지 위를 빼곡히 채운 이야기들의 파편으로 나의 과거는 조립된다. 내가 그들에게 건넨 말들은 기억할 수 없지만, 그들이 내게 보낸 마음은 내 손 위에 증거가 되어 남았다. 다시는 볼 수 없는 사람들이 한때는 나의 삶을 살렸다는 사실을 곱씹어 본다. 오만이 물러가고 미소만이 남는다. 그들이 내게 내어 준 시간의 조각들이 거대한 조각보로 나를 덮는다. 언제나 겨울이면 편지를 모아 둔 상자를 연다. 그럴 수밖에, 이보다 따스하게 계절을 나는 법을 나는 모른다.


나는 오늘도 편지를 쓴다. 친구를 위해 미리 사둔 편지지에 서툰 솜씨로 그림도 그려 넣었다. 아마 오늘의 편지 또한 제때에 도착해 그녀의 어떤 날을 축복할 것이다. 그녀의 편지 또한 나를 향해 오고 있을 것이다. 서로가 떼어준 생의 일부 또한 동봉하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