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그네의자

쉬어가자

by 존치즈버거


우리 동네에는 경치 좋은 공원이 하나 있다. 이국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해수풀장 때문이다. 유명 걸그룹도 이곳에서 뮤직비디오를 찍었다고 한다. 집에서 5분 정도 걸으면 공원 초입이 보인다. 딸과 나는 주말이면 늘 이 공원을 찾아 데이트를 즐긴다. 웬만해선 바깥으로 나가는 걸 싫어하는 나지만, 공원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즐겁다. 소금기 머금은 바다의 짭조름한 향기가 바람을 타고 나의 얼굴 전면을 간질이는 것도 좋고, 랜드마크인 해수풀장의 정경을 바라보며 한가로움을 즐기는 것도 좋고,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 나들이 나와 풍광을 즐기는 사람들의 밝은 표정을 바라보는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 좋은 것은 이 공원에 있는 그네 의자다.


놀이터라면 사족을 못 쓰는 딸도 공원 한 편의 커다란 놀이터를 마다하고 그네 의자에 사람이 있나 없나부터 확인한다. 바다를 안고 가로로 길게 뻗은 공원에는 여러 개의 그네 의자가 있다. 딸이 제일 선호하는 그네 의자는 공원 초입 주차장 부근에 위치한 통나무 그네 의자다. 공원으로 가는 동안 내리쬐는 태양 따윈 상관없이, 길가의 벌레와 꽃들을 관찰하느라 이미 반쯤 익어버린 딸아이는 그네 의자에 앉을 때쯤이면 이미 등이 축축하게 젖어 있다. “아이고, 힘들다.” 등을 기대고 앉아 나이보다 성숙하게 육체피로를 한탄하는 딸아이를 보면 어쩔 수 없이 웃음이 터진다.


딸은 아직 바닥에 닿지 못하는 자신의 다리를 한탄하며 나를 재촉한다. 내가 바닥에 발을 힘껏 구르면 그네 의자의 둔중한 몸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네와 나무 지지대를 연결한 이음새에서 삐그덕 대는 소리가 한동안 이어진다. 이것보다 더 스릴 넘치는 놀이기구들도 거뜬히 타는 녀석이면서 그네가 움직이면 하늘이라도 날아오르듯 까무러치게 소리를 질러댄다.


“행복해. 기분이 정말 좋아. 엄마랑 이렇게 공원에 나와서 그네를 타서 좋고 바다를 볼 수 있어서 좋고 갈매기도 많고 바람이 불어서 시원한 것도 좋아. 다 좋아. 우리 평생 이렇게 그네 타자.”


뭐가 그렇게 재미있냐는 나의 질문에 아이는 여전히 흥분한 채로 대답한다. 구슬 포대가 쏟아지듯 한순간에 우수수 쏟아지는 아이의 웃음을 주섬주섬 담아 마음속 주머니에 담는 일이 즐겁다. 작은 것에도 커다란 미소를 건네는 마음이 넉넉한 아이. 나도 덩달아 기쁨의 크기를 가늠하는 일을 멈추고 무작정 행복에 취할 수 있다. 어쩌면 이토록 무해한 부산을 떨어대는지 아이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흥미로운 관찰 거리다.


어떤 날은 물이 빠져 갯벌이 드러나 있고 어떤 날은 온통 바다다. 해가 많은 날에 밀물이 들면 물결이 일렁이면 빛의 파편을 만든다. 어느 날 딸이 내게 제일 좋아하는 보석이 뭐냐고 물었다. 나는 루비라고 말했다. 그날부터 딸은 자신이 어른이 되어 돈을 많이 벌게 되면 꼭 루비를 사주겠다고 하루에도 몇 번이나 말한다. 그런 거 안 사줘도 괜찮다고 말하면 고마워하기는커녕 성을 낸다. 자신의 사랑이 무시당하는 기분이 드나 보다. 누굴 닮아 이토록 사랑이 많은지 틈만 나면 나를 칭송하고 틈만 나면 나에게 자신이 제일 아끼는 것을 선물하는 딸은, 바다 위를 제 멋대로 구르는 빛의 알알마저 나에게 주고 싶어 한다. 심지어 내가 저걸 손에 떠오겠다며 펜스를 넘는 시늉까지 한다. 못 말리는 녀석, 나는 정말로 성큼 걸어가는 딸을 뒤에서 안아 들어 올린다. 옆구리를 살짝 간질이면 금세 몸을 뒤로 젖히고 또 한 번 웃음을 쏟아낸다. 그 흥분에 취하다 보면 앞뒤로만 가는 의자가 어디론가 날아가는 기분마저 든다. 뜨거운 기온 탓에 머리는 어질어질. 날씨는 사람의 기분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가. 불현듯 아이의 해사한 얼굴이 프레임 단위로 내 머릿속에 박힌다. 보석이 주렁주렁 달린 목걸이를 걸지 않아도 상관없다. 소중한 지금을 한 조각 한 조각을 꿰어 내 마음 안에 걸었으니.


지금보다 어릴 때, 그러니까 아이를 낳기도 훨씬 전이자 남편이 아직 나의 서먹한 친구로 있었을 20대 초반. 나는 배가 찢어지게 웃다가 자주 울었다. 당시 ‘웃찾사’가 전성기를 맞고 있었는데 거기에 등장하는 “호이짜 호이짜”하고 외치는 개그팀의 공연은 늘 평타 이상이었다. 어느 날 그들의 포복절도할만한 개그 공연을 보다가 뒤로 웃으며 나동그라졌다. 나의 웃음소리는 허공으로 산산이 흩어지고 여전히 멈출 수 없는 감흥에 배를 잡고 한참으로 깔깔거렸다. 너무 웃다 보니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눈물은 단순히 근육의 경련으로 인해 찔끔 새어 나오는 인체의 유기체적 반응이 아닌 그야말로 폭포수 같은 눈물이었다. 나는 그날 ‘목 놓아 우는 것’이 어떤 방식으로 이뤄지는지를 나의 행위를 통해 배울 수 있었다. 웃음과 눈물은 맞닿아 있는 걸까. 서로가 서로의 등을 맞대고? 그렇다면 최전선의 기쁨에는 결국 최전선의 슬픔이 있는 걸까. 그 후로도 종종 절제되지 않은 웃음 앞에 눈물을 쏟았다. 나를 회상하면 한 마리의 작은 짐승 같다. 불 꺼진 방 안에서 혼자 웅크리고 앉아 엉엉 울던 아이. 미친 사람처럼 웃다가 세상이 끝날 것처럼 울었다. 나만의 의식을 수행하듯, 인이 박힌 클리셰처럼. 나의 웃음은 눈물과 맞닿아 있었다. 아쉽게도 눈물이 먼저 시작되면 웃음은 좀처럼 오지 않았지만. 그때의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딸과 그네의자를 탈 때면 나도 딸만큼이나 탄성을 지른다. 작은 가방 하나 메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공원에 가지만 돌아올 때면 양 손이 무겁다. 그날의 냄새와 온도, 분위기, 촉감 등을 하나도 빠짐없이 챙겨 오기 때문에. 물론 그것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실체도 없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수식어로 내 안에 자리한다. 딸이 웃을 때 나도 웃는다. 그리고 우리는 하잘 것 없는 이유들로 서로를 바라보며 미치도록 웃는다. 웃다 보면 웃음이 늘어난다. 딸아이를 낳고 제법 삶의 균형이 잡혔다. 뒤죽박죽 흩트려져 있던 나의 감정도 제 자리를 찾은 것 같다. 예전처럼 웃어도 나는 더 이상 눈물을 펑펑 쏟지 않는다. 웃음의 최전선에는 기쁨과 추억만 있을 뿐이다.


딸의 인생에도 실수와 실패가 반복될 것이다. 상처를 받을 것이고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랑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비난을 받게 될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운이 아주 좋아 자신이 원하는 일을 쉽게 성취하는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 누구보다 지름길을 알려 주고 싶지만, 딸은 내가 걸어온 길을 고스란히 밟을지도 모른다. 모든 것은 그 아이의 선택에 달렸다. 그리고 혼자 울던 나의 20대처럼, 딸도 혼자 울며 이겨내야 하는 시간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삶이 지치는 순간에 나는 딸이 지금을 기억해주었으면 좋겠다. 자신이 어느 한 사람의 인생에 얼마나 값진 추억을 만들어주었는지 아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나는 자주 아이를 품 안에 안고 그네 의자에 대해 말할 것이다. 앞과 뒤를 반복하며 매번 그 자리에 머물지만, 나는 너와 함께 그네 의자에 앉아 어디로든 갈 수 있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