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밖으로 나서는 계절, 여름
인터넷에는 웬만해선 밖으로 돌아다니지 않는 사람이 친구와 약속이 깨졌을 때 얼마나 행복을 느끼는가에 대해 농담하는 짧은 만화가 있다. 남들에게는 유머라지만 내게는 현실이다. 꼭 지켜야만 하는 약속이 없으면 거의 나가질 않고, 소파와 한 몸이 되는 것을 숙명처럼 여기는 나를 제 발로 나가게끔 등 떠미는 계절이 있으니, 바로 여름이다.
지루하고 평범한 생활의 무탈함을 감사하는 나이가 왔음에도, 어쩐지 일탈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 때쯤이면 여름이 온다. 당도한 여름은 과즙이 철철 흐르는 수박과 함께 애정해 마지않는 휴가를 선물하니 이보다 행복한 계절이 또 있을까 싶다. 물론 겨울에도 휴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애석하게도 겨울은 ‘연말’이라는 시간의 꼬리표를 대동한다. 제 자리를 돌아보고 온전하게 머무르며 1년이라는 내 생애의 한 조각을 반추하게 만드는 계절. 반추와 반성은 더 나은 미래를 계획하게 만든다. 겨울이 다가 올 시간을 준비하는 계절이라면, 여름은 ‘지금’에 푹 젖는 계절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디론가 훌쩍 떠나야 한다면 그것은 여름이다.
머뭇거림 하나 없이 제 밝음을 드러낸 햇살 아래 실컷 달궈진 바다, 출렁이는 파도가 만들어내는 빛의 물결은 글리터가 쏟아진 듯 제 멋대로 눈부시다. 약속이라도 한 듯 거리를 향해 쏟아진 사람들, 관광객이라는 카테고리 안에 묶여 동지가 된다. 맞닿는 살과 살에도 표정이 밝다. ‘여름 한정 액티비티’는 제철 과일만큼이나 제 값을 한다. 정신없이 즐기다 보면 시간이 쏜살같이 흐른다. 이마에 소금기를 머금은 땀방울이 맺힌다. 강아지처럼 좌우로 흔들어 털어낸다. 놀이에 잊고 있던 허기가 신호를 보내고, 어슬렁 주변을 걷다 보면 뜨거운 기온 따위 아랑곳없이 불판에 달궈진 노상의 간식들이 배고픔을 반긴다. 아이들의 손에 들린 색색깔의 솜사탕. 어차피 습한 날의 연속이라 달큼한 끈적임 정도는 가뿐히 받아들인다. 나도 아이 시절로 돌아간 듯 솜사탕 하나를 주문한다. 내 손을 맞잡은 딸아이가 연신 폴짝폴짝 발을 구르면 내 몸도 같이 흔들린다. 발에 걸쳐진 슬리퍼의 방정맞은 굽소리가 타악기라도 된 듯 거기에 리듬 맞춰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무르익은 밤, 취기 없이도 감상에 젖은 우리들은 타인에게 조금 더 관대해진다.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인사하는 것이 가능하다. 내 마음을 덥히는 여름의 풍경이다. 옷장 안 보라색 배낭이 깊은 잠에서 깨면 바로 이 풍경의 시간이 당도했다는 신호다.
얇아진 옷차림만큼이나 짐 가방도 단출하게 챙길 수 있다는 점이 또 여름을 사랑하게 만든다. 티셔츠와 반바지 몇 장이면 몇 밤은 거뜬하다. 백팩 하나 메고 밖을 나서면 어깨에 걸쳐진 가벼운 무게 때문인지, 현실에서 진 짐들도 대수롭지 않게 느껴진다. “나 잠시 나갔다 올게.” 평소 같으면 전전긍긍 끌어안고 있었을 고민들에게 쿨하게 작별 인사 건네는 것이 가능하다. 실내를 벗어나자마자 훅 끼치는 더위는 불쾌함 보다 반가움을 준다. 마치 나를 뜨겁게 끌어안는 오랜 친구의 품처럼. 현실을 벗어나도 아이의 칭얼거림과 골목을 헤매는 고단한 걸음은 여전하지만, 어쩐지 여름의 한 복판에서는 그것들 모두 추억의 자양분이다. 행복한 결말을 위해서는 고비도 필요한 법. 어쩌면 여름은 남은 시간을 지탱하게 만들 다양한 추억들의 가공 현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불볕더위는 청춘을 닮아, 땀 흘리는 만큼 생생한 삶의 감각을 전달한다. 그런 의미에서 여름은 젊음을 향한 되감기의 시간이라 부르고 싶다. 매년 한 계절은 ‘젊음’을 소환할 수 있으니 비싼 타임머신 따위가 무슨 소용일까?
여름 동안 바삐 만든 추억으로 시린 체온을 덥힐 한해의 옷을 지어 입는 나는, 그만큼이나 이 계절에 얽힌 추억도 많다. 어른들의 허락을 받지 않고 간 첫 여행, 이제 막 면허를 딴 친구가 자신의 엄마 차에 나를 실어 장장 9시간에 걸쳐 부산으로 갔던 날, 부른 배를 아랑곳없이 전지훈련 온 선수처럼 남편에게 수영을 배웠던 하와이의 7박 8일도, 잘못 들어선 길에서 생생한 초록의 경관을 보며 감탄했던 부여 여행도 모두 여름이 준 선물이다. 송골송골 맺히는 땀방울 하나하나가 추억이 영글어지는 모습 같아 나는 쉬이 이마를 훔치지 않는다. 흠뻑 젖고 나서야 개운하게 닦아낸다. 그러면 이번 여름도 잘 보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뽀송한 몸을 말리다 밤송이처럼 까맣게 익은 딸아이를 보며 우리는 서로를 껴안는다. 여름의 끝자락을 보내는 우리만의 의식이다.
거의 2년의 시간이다. 계절을 잃었다. 그 계절에는 여름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다. 창밖으로 텅 빈 거리를 바라보며 다가올 여름을 꿈꿨다. 이제는 만날 수 있을까 생각했던 여름이 다시 멀어진다. 에어컨 바람 아래 여름이 왔는지 모르고 시간이 흐르는 동안, 누군가는 땀 마를 날 없는 전쟁을 펼쳤다. 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게 일상을 잠식한 이 재난을 굳건히 견디기로 한다. 다시 만나는 여름 앞에서는 땀방울보다 눈물이 먼저 내 몸을 타고 흐를 것 같다. 아무리 뜨거운 날이라 해도 나는 누구보다 와락 여름을 껴안을 것이다. 모두가 공평하게 여름을 느끼는 시간이 다시 돌아오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