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에게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우리는 아직 ‘국민학교’에 다니고 있었지. 솜털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호기심과 흥미에 가득 찬 눈길로 재잘재잘 떠드는 아이들과 달리 나이답지 않게 과묵했어. 너는 커다란 눈망울만큼이나 커다란 침묵을 가진 아이였어. 어른들이 몇 번이나 다그쳐야 겨우 고갯짓으로 네, 아니오를 표현하던 아이.
처음에 아이들은 네가 말을 하지 못한다고 생각했어. 그러니까 장애가 있다고 생각한 거지. 도통 입을 여는 적이 없었으니까. 나 또한 네가 그런 아이라고 생각했지만 선생님께서 우리에게 아무런 언질도 주시지 않았기에 너의 침묵에 대한 의문은 커져만 갔어.
우리 엄마가 들었다고 했어. 네가 말하는 걸. 우리 가게로 동생의 손을 잡고 온 너는 작은 목소리로 가격을 물었다고 했어. 그때부터 나는 너에게 관심이 생겼지. 물론 너의 목소리를 들은 건 우리 엄마지만 아무튼 나의 가장 가까운 사람이 너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사실이 나를 자극시켰어. 아무도 모르는 비밀을 나만 알고 있는 것 같았어.
그다음 날부터 나는 번잡한 아이들 사이를 헤치고 너의 자리로 가서 말도 걸고 설령 네가 아무런 반응이 없어도 계속해서 주절거렸지. 너의 목소리를 들으려는 짓궂은 아이들에게서 너를 지켜주면서. 어느 날 너의 할머니가 우리 가게로 왔고 고맙다고 말씀하셨어. 다음 날 나는 선생님께 칭찬을 받았지. 반 아이들 앞에서. “네가 ㅇㅇ이에게 아주 잘 대해줬다고 하더구나. 네가 괜찮다면 같이 짝을 할래?” 나는 우쭐해졌어.
도자기 마냥 새하얗고 흠집 없는 피부에 커다란 눈망울을 가지고 구불구불한 곱슬머리를 가졌었지. 손목에는 작게 꿰맨 자국이 있었는데 너의 하얀 피부와 대비되어 유독 도드라져 보였어. 이국에서 볼 수 있는 생선 뼛조각 공예처럼 그것마저 신비롭게 보였어. 내가 제일 아끼는 마론 인형처럼 어여쁜 모습에 나는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지 몰라.
아침에 등교하면 아이들은 꼭 우리 자리를 한 번씩 쳐다봤어. 유독 예쁜 너의 침묵은 함부로 닿을 수 없는 영역이었고 그 옆을 나만이 지켰으니까. 그때만 해도 우리는 어렸고 제멋대로 말을 내뱉으면서도 상대의 울먹이는 표정 앞에서는 덩달아 상처 받던 맑은 마음이 있었으니까. 무리에 섞이지 못하는 너와 함께 하며 나 또한 무리에서 이탈할까 걱정하기보다는, 그저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이 나를 고무시켰어. 나는 쉴 새 없이 재잘거렸지. 너는 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내게 미소를 지어주었어. 그 시간은 얼마 가지 않았지.
“너 쟤 말하는 거 들어봤어?” 아이들이 물었어. 매일매일. 나는 그럴 때마다 내가 누리는 ‘친절한 아이’라는 특권의 힘이 약해지는 것을 느꼈어. 왜 그랬을까? 나는 본래 간악한 마음을 지닌 아이였을까? 단지 아이라는 이유로 그 모든 것에서 보호받았기 때문일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때만 해도 야만의 시대였지. 겨우 10살밖에 되지 않는 아이들이 영하와 영상을 구분하지 못한 다는 이유로 뺨을 올려붙이고, 한 명의 말썽 - 이라 불리는 그 나이 때의 작은 실수 - 으로 전체가 투박한 나무의자를 번쩍 올리고 한 교시가 끝나도록 기합을 받아야 했으니까. 너의 침묵은 그저 유별난 고집으로만 치부되었고 그 이유와 그것이 촉발한 너의 상처 같은 것은 아무도 개의치 않았으니까. 너를 돌봐주던 할머니도 네가 누나라는 이유로 덩달아 관심을 받던 너의 동생도 아마 많이 힘들었을 거야. 네가 종이 울리기 전 가까스로 학교에 도착하는 그 마음을 이제는 알 수 있을 것 같아. 하루하루가 고역이었겠지.
불편한 학교 생활에서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친구 하나를 바랐던 너였을텐데. 나는 주변의 기대와 잔혹한 호기심 때문에 너를 조금씩 괴롭히기 시작했어. 연필이나 자를 들고서는 “줘.”라고 말하지 않으면 절대 돌려주지 않겠다고 윽박을 질렀으니 말이야. 일부러 퉁명스럽게 대하면 혹여 네가 발끈해 무슨 말이라도 하지 않을까 싶어 나는 너를 놀리기도 했지. 어리기에 어리석었던 건지 원래부터가 교묘하게 자기 안의 비열함을 숨기던 아이였는지 나는 아무튼 나를 믿었던 너에게, 너를 무시하는 아이들보다도 나쁜 짓을 저질렀지. 내가 베푼 친절만큼이나 네가 유일하게 목소리를 베푸는 상대가 나이기를 바랐던 것 같아. 얼마나 바보 같은 욕심인지. 그렇게 달이 바뀌고 너와 나의 자리도 멀어졌지.
학년이 올라가며 우리는 다른 반이 되었어. 나는 너에 대한 관심이 시들해졌고 곧 다른 친구들과 무리를 이루었지. 전학 가기 얼마 전에 나는 널 복도에서 마주쳤어. 여전히 말을 하지 않았지만 넌 아주 밝은 얼굴로 친구들과 술래잡기를 하고 있었어. 구불구불한 곱슬머리를 휘날리며. 너는 나를 모른 체 했고 나 또한 심드렁한 얼굴로 너를 지나쳐 갔어.
유독 네 생각이 나. 내 아이가 이제 막 학교에 입학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제야 나의 과오를 솔직히 바라볼 수 있는 나이가 되어서인지는 알 수 없어. 하지만 조금의 실수에도 겁을 집어 먹고 학교로 향하는 내 아이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면 나는 네가 떠올라. 그때 너를 바라보던 네 주위 어른들의 타들어가던 마음 같은 게 필요 이상으로 내 마음에 차올라.
나는 비록 너에게 내내 좋은 친구가 되어주지 못했지만, 지금 어른이 된 너는 어딘가에서 내가 듣지 못했던 목소리로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주고받길 바라. 너의 목소리를 막았던 마음의 응어리도 이제는 아무것도 아닌 과거가 되길. 이런 말을 한다고 어린 나의 이기심이 용서되진 않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