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아무도 찍지 않은 낙인을 스스로 찍었다.
전남편과 이혼한 이후 한동안 포근하고 따뜻한 드라마만 챙겨봤었다. 악역이 나오지 않는 잔잔하게 흘러가는 드라마. 내 인생이 이미 드라마 같았기에, TV를 보면서까지 스트레스를 받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드라마를 선별하던 중 <봄밤>이라는 드라마가 추천에 뜨길래 보게 되었다. 미혼부 정해인과 이미 남자친구가 있는 한지민. 1화부터 이미 내가 좋아하지 않을 바람피우는 스토리가 될 것 같아서 볼까 말까 고민했었는데, 드라마의 음악과 분위기, 그리고 정해인의 얼굴이 좋았다. (이게 결정적이었다)
그렇게 보게 된 드라마는 예상대로 잔잔하게 흘러갔는데, 극 중 미혼부인 정해인의 부모님이 아들에게 하는 대사가 내 가슴에 쿡 박혔다.
결혼 안 한 처자라고? 안돼.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누구 인생을 망치려고?
해 본 사람과 안 해 본 사람은 천지차이인 거야.
아, 내가 결혼 경험이 없는 남자와 연애를 한다면 그 사람의 인생을 망치게 되는 걸까? 설령 상대방이 내 이혼 사실을 알고 있고 이해하더라도, 그러면 안 되는 걸까.
이 대사는 그 이후 오랫동안 내 가슴을 짓눌렀다.
물론 당장 만나고 싶은 사람도 없고 연애할 생각은 더더욱 없지만, 그럼에도 새로운 사람들과 친구가 되고 싶어서 다시 세상으로 나오고 있는 와중이었다. 이것도 혹시 누군가에게 민폐가 되는 행동인 걸까.
안 좋은 생각은 먹물처럼 내 가슴에 콕하고 점을 찍은 뒤 스멀스멀 번져갔다. 다른 생각으로 얼룩을 덮으려 해도, 오히려 더 안 좋은 생각, 부정적인 마음이 떠올랐다.
난 그저 결혼을 했었다. 모두의 축복 속에.
배우자가 바람을 피워서 이혼했다.
혼인내역증명서에 줄 하나가 그어져 있다.
이게 범죄자의 빨간 줄처럼 느껴질 때가 자주 있다.
사실 누구도 내게 “넌 이제 미혼인 남자를 만날 생각 하지 마.”라고 하지 않았고, “이혼녀가 감히 다시 미혼인 남자랑 평범하게 사랑하고 다시 연애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같은 돌싱끼리 만나.”라고 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난 아무도 찍지 않은 ‘이혼녀’라는 낙인을 스스로 찍고 괴로워했다.
그러다 가끔은 혼자 억울해했다. 내가 죄를 지은 게 아닌데. 난 오히려 피해자인데. 그 누구에게도 떳떳한데.
그럴 때는 이미 다 지난 일인데도 다시금 전남편이 미워졌다. 왜 그가 내게 그런 짓을 했었는지,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이제 와서 해 봤자 의미 없는 생각을 또 하게 되었다.
그 와중에 다행스러운 건, 그간 겪은 일들이 나를 조금씩 성장시켜 왔다는 것 또한 느낄 수 있다는 거였다. 내 마음의 회복탄력성은 평범한 또래보다 월등히 높을 거란 자신이 생길 정도로, 안 좋은 감정에서 최대한 빨리 빠져나오는 훈련이 되어있었다.
물론 그런 훈련을 할 필요도 없는 삶이었다면 더 좋았을 거다. 예를 들자면 악역 없는 잔잔한 드라마 속 주인공의 동네 친구 역할처럼 말이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잔잔한 드라마에서조차 주인공에겐 늘 시련이 있는 법이다. 인생에서 내가 주인공인 이상, 이런 시련도 결국 지나고 보면 해피엔딩으로 가는 과정일 뿐이리라 믿었다. 시간이 흘러 이때를 떠올려보면 분명 '그런 때도 있었지' 하며 호탕하게 웃는 날도 오지 않을까?
마음을 굳게 먹고 새 모임에 나가기로 했다. 내 또래가 모이는 여러 모임 중 3040 나이대의 사람들이 모여서 다양한 취미활동을 함께 하는 모임이 눈에 띄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신청 버튼을 눌렀다.
그곳에서 K를 처음 만났다.
*이 브런치북의 완결편이 책으로 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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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손을 꼭 잡고 이혼하는 중입니다>와 일부 이어지는 조니워커 시리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