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솔직함은 나의 힘
예술의전당 벙개 때 K와 차 안에서 나눈 대화가 그 후 계속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그는 내가 자기와 똑같은 미혼 상태에서 비혼을 결심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동질감을 느끼는 듯했다.
사실 그렇지 않은데도, 그때는 그 말을 하기 어려웠다. 물론 K는 그 대화에서 별 생각이 없었을 수도 있지만, 난 거짓말을 하게 된 셈이라 마음이 불편했다.
솔직한 성격은 내 장점이다. 나 자신에게 솔직하기 위해서 이혼을 했고, 내 마음속 목소리에 솔직하기 위해 친구를 만나러 새로운 모임에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운 좋게도 좋은 사람들을 만났다. 각각 나이도 환경도 직업도 달랐지만, 상대방을 배려하고 예의 바르며 함께 있을 때 즐거운 에너지를 주는 좋은 사람들이다. 그들과 계속 친하게 지내고 싶다. 마음을 좀 더 터놓고 진실한 관계를 만들어가고 싶다. 그러려면 나 자신을 솔직히 밝혀야 한다고 생각했다.
경험상 알고 있다. 고백은 빠를수록 좋다. 전남편의 경우를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지 않은가. 거짓말을 시작하고 몇 개월 지나면 더 이상 진실을 말할 수 없게 된다. 자기 자신조차 속이게 된다.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았다.
“날씨도 따뜻해져 가는데 퇴근하고 한강공원에서 돗자리 펴놓고 치맥 할래요?”
K 가 단톡방에 벙개 제안을 했고, 그다음 주 수요일 저녁 여의도에서 만나기로 정해졌다. 퇴근 후 친구들과 한강 치맥이라니, 이게 대체 얼마만인지 생각만 해도 설렜다. 소개팅도 아닌데 예쁜 옷 입고 가야겠다며 옷을 고르기까지 했다.
벙개 당일은 계속 따뜻해지던 날씨가 갑자기 찾아온 추위와 강풍으로 하필이면 조금 쌀쌀해진 날이었다. 다들 아침부터 “우리 이러다 한강에서 입술 파래져서 덜덜 떨다 오는 거 아니에요?”하며 장난 섞인 걱정을 내비쳤고, 일단 여의도에서 만나 저녁을 먹고 생각해 보기로 했다. 처음 만난 날 이후 7 명 모두가 다 모인 건 처음이었다. 내 고백을 하기에 딱 좋은 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밥을 다 먹어갈 때쯤 아무래도 한강은 너무 추울 것 같다는 의견이 많았다. 대안으로 여의도에서 일하는 K 가 자주 가는 술집이 있다기에 모두 거기로 가자고 찬성했다. 들어설 때는 평범한 술집 같았는데 7 명이 모두 들어가는 룸이 있어서 우리끼리 이야기하기 딱 좋았다.
다들 마시고 싶은 술들을 시키고 가벼운 안주를 주문하고 수다를 이어가던 중, H 가 게임 제안을 했다. 가벼운 질문 게임이 있는데 그걸 지금 하면 딱 좋을 것 같다고 말해서 시작하게 되었다. 랜덤으로 질문 쪽지를 하나씩 꺼내 읽고 질문에 대답한 뒤, 그 질문을 적은 사람이 누구인지 맞추는 게임이었다.
“카레맛 똥? 똥맛 카레?” 같은 식의 말도 안 되게 웃기는 밸런스 게임 질문을 적은 사람도 있었고, “가장 기억에 남는 연애는?” 하는 식의 연애 질문도 있었다. “오늘 모인 사람들 중 이상형이 있다, 없다?” 같은 흥미진진한 질문도 있었다. 서로 어느 정도 친해진 후 물어보는 질문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다들 질문을 적은 사람을 잘 맞춰 나갔다.
그러다가 내가 질문지를 뽑을 차례가 되어 뽑았는데, 질문을 보자마자 ‘아!’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나 이거 제일 마지막에 읽고 대답해도 돼요? 이제 거의 다 돌았으니까요. 마지막에 대답하고 싶은 질문이 나왔어요."
다들 궁금해하면서도 그러라고 하고 다음 순서로 넘어갔다. 2 명이 더 대답한 뒤, 내 차례가 되었다.
"내가 뽑은 질문은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용기 낸 순간은 언제인가요?’ 에요. 내 인생에서 가장 용기를 냈던 순간은..."
심호흡을 가볍게 하고 말을 이어갔다.
"그 순간을 말하려면 여러분한테 말해야 할 게 있어요. 원래 오늘 말할 생각이었는데, 질문이 정말 운명적으로 나에게 왔네요."
사람들의 눈을 하나하나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난 사실 돌싱이에요. 작년에 이혼했거든요."
모두가 조금은 놀라는 표정이었지만 그렇다고 나를 이상하게 보거나 하는 눈빛은 없었다.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사람들하고 대화하고 싶어서 처음엔 나왔던 건데, 여러분과 이렇게 계속 친해지고 만나는 게 좋아서 앞으로도 친하게 지내고 싶거든요. 그런데 내가 돌싱인 걸 계속 숨기면 거짓말하는 게 되니까,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이혼한 사람은 이 모임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솔직히 말해줘도 돼요.”
“무슨 상관이에요. 말해줘서 고마워요. 정말 전혀 몰랐어요. J 님 그런 티도 안 나고 사람 대할 때도 그렇고.”
모두 괜찮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말해줘서 고맙다고 말해줬다.
“고마워요 다들. 아무튼 다시 질문으로 돌아오자면, 내가 인생에서 가장 용기 낸 순간은, ‘작년에 이혼을 결심했던 순간’ 이에요. 지금 이 고백을 하는 건 그거보다 어렵진 않네요.”
그래, 내 인생에서 사실 이 정도 고백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난 훨씬 큰 상처도 입어봤고, 인생을 뒤바꿀 중요한 선택도 해봤으니까.
만약 이 고백으로 인해 이들을 잃게 되더라도 아직 관계가 깊어지기 전인 지금이라면 딱히 상처받지 않고 금방 정리할 수 있을 걸 알고 있었다.
모두와 앞으로도 친구로서, 더 마음을 터놓는 친구로서 지낼 수 있게 되어 다행스러운 마음이었다. 이들과의 만남이 계속해서 내 삶에 영향을 줄 거라는 예감도 들었다.
하지만 내 고백을 그들이 각각 어떻게 받아들였을지는 그 후에 알게 되었다.
*이 브런치북의 완결편이 책으로 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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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손을 꼭 잡고 이혼하는 중입니다>와 일부 이어지는 조니워커 시리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