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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니워커 Sep 13. 2023

햇살 아래서 순대랑 닭강정을

6. 어느 기묘한 일요일


종로에서 다시 신림동으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 K가 말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J님은 비혼이라고 하셨죠?”


그렇다고 대답한 뒤 문득 생각해 보니, K가 지난 모임에서 다들 술을 꽤 마신 상태였을 때 했던 말이 생각났다.


“전 태어나서 한 번도 사랑을 해본 적이 없어요. 물론 상대방을 좋아해서 연애한 적은 있지만, 그게 사랑은 아니었다 싶거든요. 저는 사랑의 정의를 상대방에게 독점욕을 느껴야 하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예를 들어 다른 분들은 내 연인이 다른 이성과 키스를 하거나 섹스를 한다고 하면 어떠세요? 싫죠? 근데 전 그게 상관이 없어요. 늘 그랬어요. 그래서 나중에 알게 된 거죠. 아, 내가 사랑을 느껴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느끼기 힘든 사람이겠구나 하고요.“


그때 K의 말을 듣고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난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럴 수도 있구나 생각했었다. 사랑은 독점욕이라는 그의 말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K님은 사랑을 해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하지 않을 것 같아서 연애 안 하신다고 하셨죠?"


"네, 맞아요."


"그럼 결혼 생각도 없으신 거예요?"


"그렇다고 봐야겠죠? 제 이런 성향을 알고도 서로 괜찮다고 하면 결혼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분은 사실 없을 것 같거든요."


"하긴 그렇겠네요. 그래서 비혼주의인 거예요?"


"맞아요. 40세 정도까진 내가 그런 사람인 걸 모르고 연애를 해왔는데, 늘 이 부분 때문에 여자친구에게 미안한 상황들이 만들어졌었거든요."


"아, 뭔지 알 것 같아요. 이런 말 자주 듣지 않으셨어요? ‘오빠, 날 좋아하긴 해?’"


"오오. 맞아요 맞아요. 진짜 늘 들었어요.”


“크크. 네 그러셨겠네요.”


K는 그러다 궁금해졌는지 내게 물어왔다.


“J님은 어쩌다 비혼주의가 되신 거예요?”


순간 어디까지 말하는 게 좋을까 싶어 고민했다. 거짓말을 하고 싶진 않지만, 아직 이 모임에서 내가 돌싱이라는 걸 밝히지 않은 상태였다.


“지난번에 살짝 말했듯이 6년간 만난 남자가 있었는데 헤어졌거든요. 30대 초반에 만나서 30대 후반에 헤어지게 된 건데, 헤어지고 보니 이미 전 나이가 많이 들었더라고요. 아, 물론 K님에 비하면 아주 어리긴 하군요. 크크.”


K도 따라 웃는다.


“그렇게 갑자기 다시 혼자가 되고 보니, 뭐랄까. 이 나이에 다시 연애해서 결혼하고 싶은 사람을 만나고, 아이까지 낳고 그럴 수 있을까 고민해 봤는데, 제가 그런 삶에 큰 가치를 두지 않더라고요. 혼자 충분히 잘 살 수 있을 거라는 확신도 있고요. 물론 인생은 알 수 없고 언젠가 결혼하고 싶은 남자가 나타날지도 모르지만, 그런 불확실한 변수를 고려하며 사는 것보단, 그런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하며 사는 게 속 편하기도 하고요.”


K는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쳐줬다.


“저도 그래요. 60세, 70세에 갑자기 사랑이 찾아올 수도 있겠지만, 그건 거의 있을 수 없는 확률이라고 생각하고 있거든요. 그 때라도 그런 행운이 찾아온다면 정말 기쁘겠지만요. 저랑 비슷한 생각 가진 분을 오랜만에 만나서 좋네요.”


K의 그 말이 빈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는 게 느껴져서 마음 한 구석이 불편했다. 내가 결혼했었다는 사실을 빼곤 사실대로 말한 거지만, ‘결혼’이라는 그 키워드가 있고 없고에 따라 내용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되는 거니까.




연애와 사랑에 대한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신림에 도착했다. 주차하고 와인을 사러 가기 전에 K가 물었다.


“좀 배고프지 않아요?”


"네, 고프네요. 밥 먹고 저희 4시간 이상 흘렀잖아요."


"여기 시장 골목에서 간단하게 뭐 먹고 가실래요?"


마침 출출하던 차라 잘 됐다 싶어서 흔쾌히 그러자고 하고 시장에서 닭강정과 순대 한 봉지를 샀다. 먹을 만한 곳이 없나 둘러보니 마침 앞에 도림천이 있어서 하천에 있는 벤치에 앉아 간식을 먹기로 했다.


5월의 일요일 오후 3시 무렵. 조금 뜨거운 햇살 아래에서 닭강정과 순대를 이쑤시개로 하나씩 집어 먹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개울가에서 물놀이하는 어린아이들, 손을 잡고 산책하는 커플들, 친구와 수다를 떨며 앉아있는 청년들.

다양한 모습으로 주말 오후를 보내는 사람들 속에서 문득 우리 둘이 지금 뭐 하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전에는 아예 만날 예정도 없는 사람이었는데, 어쩌다 내가 K와 예술의 전당에서 전시를 보고 두부전골을 먹고 종로에 있는 찻집에 가서 차를 마시고 신림동에 와서 순대를 먹고 있는 걸까.

생각하니 웃음이 났다. 그것도 차 안에서 둘이 생각보다 굉장히 진지하고 다양한 얘기를 나누면서 말이다.


“여기 세워드리면 돼요?”


“네, 여기면 돼요. 감사합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인사를 하며 그의 차에서 내려 전철을 타러 갔다. 전철을 타고 집으로 가는 동안 이 기묘한 하루를 돌아봤다. 미술관에서 서로 찍어준 사진들과 유리창에 찍힌 K의 이마 자국 사진을 보고 큭큭대며 웃으며, 이런 묘하게 여유로우면서도 바쁜 하루도 재밌구나 싶어 즐거웠다.


K와 친해지기 시작한 첫날이었다.


그러고보니 올 해 전시회를 두 번 밖에 안 갔었다. 어디 가서 전시 관람이 취미라는 말은 더이상 못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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