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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니워커 Oct 11. 2023

단 둘이 처음 만나보네요

10. 위스키 로드의 시작


홈 파티 이후로도 모임에서 종종 벙개를 하고, 와인을 마시기도 했다.

그런데 정작 이 무렵 나는 와인이 아니라 위스키에 빠지고 있었다.


위스키를 좋아하게 된 건 회사 회식자리에서 우연히 마시게 된 조니워커 블루라벨 때문이었다. 그때는 ‘위알못’이라 그게 얼마나 좋은 술인지 모르는 상태로 마셨었다. 비싼 술이라길래, 내가 아무리 술을 못해도 이 기회에 마셔봐야지 하며 한 모금 마시는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어라? 위스키가 단순히 독한 술이 아니었어? 이런 부드러운 맛이 난다고? 게다가 목구멍을 타고 흘러가면서 남는 잔향이 이렇게 좋다고?"

나도 모르게 감탄하며 술잔에 남은 조니워커 블루를 홀짝홀짝 마시게 되었고, 그게 내 위스키 인생의 시작이었다.




원래 덕질은 유전자라서, 하나를 덕질할 수 있는 자는 다른 분야에도 푹 빠질 가능성이 높은 법이다. 난 그런 내 성격을 잘 알고 있어서 책과 커피 외에는 어떤 분야에도 깊이 빠져들지 말자고 평소에 조심하는 편이었고, 그 이유 때문에 남들이 다하는 게임도 유튜브도 드라마도 거리를 뒀었다. 중독을 피하려면 애초에 발을 들이지 않는 게 좋으니까. 하지만 예고도 없이 훅 하고 내 삶에 난입해 버린 위스키 덕분에 숨어있던 덕질 유전자가 다시 깨어나고 있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시작이 조니워커 블루라니!

처음 마실 때는 몰랐지만, 위스키 중에서도 고급 라인으로 면세점에서 사도 한 병에 20~30 만원 정도 하는 비싼 술이었다. 게다가 큰 단점 없이 훌륭한 맛 덕분에 다른 일반적인 위스키는 이미 나를 만족시켜주지 못했다. 그래도 이걸 데일리 위스키로 자주 마실 수는 없는 노릇이니, 적당한 가격대에서 괜찮은 위스키를 발견해 보자는 마음에 회사 근처 Bar에 가보기도 하고, 추천을 받아 마셔보기도 했다.


그렇게 위스키를 공부하던 중 '남대문 던전'의 소문을 듣게 되었다. 위스키 애호가들의 성지로 불린다는데, 입문자로서 안 가볼 수 없었다. 인터넷에서 방문 후기들을 찾아보니 완전 초보자가 혼자 가기엔 좀 무섭기도 하고, 남대문 시장 자체가 워낙 복잡해서 길을 못 찾을 것 같았다. 그래서 3040 모임 단톡방에 슬쩍 벙개 공지를 올렸다.


"저랑 남대문에 위스키 사러 가실 파티원 모집합니다."


슬프게도 이 모임은 대부분 와인을 좋아해서 선뜻 같이 가자고 손드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그때 K가 톡을 남겼다.


"저도 위스키 사러 가려고 했는데 같이 가실래요?"


"오! 좋아요."


다행히 한 명을 모집했고, 잠시 뒤 K에게서 개인 톡이 왔다.


"다른 분들 있는 방에서 얘기하면 민폐일 수 있으니 따로 톡 드려요."


"오, 네네. K님 언제 시간 되세요?"


"음, 이번 주 토요일 낮에 어떠세요?"


"전 좋아요. 토요일 오후 3시쯤 회현역에서 만날까요?"


"그러시죠."


짧고 간결한 연락. K의 실제 말투와 표정이 연상돼서 왠지 웃음이 났다. 하긴 나도 카톡 말투에서 평소 성격이 묻어나니까.




약속한 토요일은 예년보다 더워진 6월 중순이었다. 한 낮 기온이 30도를 넘는다고 하길래 가지고 있는 옷 중 가장 시원한 원피스와 샌들을 신고 남대문을 향했다. 가고 있는 중 카톡이 왔다.


"너무 덥네요."


"그러게요. 얼른 사고 시원한 곳으로 이동하시죠."


"네, 전 차를 가지고 가는 중이라 XX 주차장에 주차할 예정이니 그쪽으로 오시면 돼요."


주말 낮 시간에 서울 한복판에 차를 끌고 오다니. 제시간에 도착하실지 걱정하며 회현역으로 향했다.


K가 말한 주차장에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는데 왠지 기분이 이상했다. 딱히 데이트도 아니고 그저 벙개 약속일뿐인데 왠지 빌딩 유리에 비쳐 보이는 내 모습을 보며 머리도 한번 정리하고 옷매무새도 가다듬었다. 이건 그냥 여자의 본능인 건가.

'그래, 어쨌든 남자 사람을 만나는 건데 이 정도는 원래 하는 거 아니겠어?' 하며 괜히 혼자 멋쩍어했다.


곧 도착한 K는 차를 타워주차장에 주차하고 밖으로 나왔다. 지난번부터 느꼈지만, 그는 옷을 깔끔하게 잘 입는다. 처음에 그의 나이를 실제보다 5살 이상 어리게 봤던 것도 그의 옷차림과 스타일 때문이었으니까. 내 주변 K의 연령대인 남자들은 대체로 아저씨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데, K는 달랐다. 깔끔한 흰 티셔츠에 몸에 잘 맞는 청바지, 흰 운동화를 신고 나온 K의 오늘 옷차림은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었다.

오늘은 그중에서도 평소 모습과 조금 다르다 싶었는데, 아! 안경을 쓰고 있었다. 아마 운전해서 오느라 쓴 것 같았는데, 안경 쓴 모습이 낯설었다.


"길 안 막혔어요?"


"좀 막힐 것 같아서 일찍 나왔었어요. 원래 전철 타고 오려고 했는데 너무 더울 것 같아서 차를 안 탈 수 없었어요."


"더위 많이 타나 보네요?"


"더위보다도 피부가 햇볕 받으면 금방 예민해져서 가능하면 햇빛을 피하는 편이거든요."


"아아, 그럼 얼른 시장 골목으로 들어가시죠. 거긴 건물들 때문에 해가 좀 가려지잖아요. 어디로 가는지 알고 계세요?"


"네, 전 와 봤었어요. 따라와요."


K가 앞장서고 내가 뒤따라 가면서 어떤 위스키를 살지 얘기를 나누다 보니 금방 위스키 마니아들의 성지라는 남대문 던전에 도착했다. 실제 도착해 보니 위스키매장은 5군데 정도뿐이고, 그 안에서 주인장에게 일일이 가격을 물어보며 구매해야 하는 시스템이라 나같이 겁 많은 초보자는 혼자 왔다간 눈탱이 맞기 쉬웠겠구나 싶었다. K와 함께 온 덕분에 그가 가격을 물어봐주기도 하고 이런저런 팁을 줘서 원하던 위스키를 적당한 가격에 살 수 있었다.




"고마워요! 덕분에 혼자는 못 와볼 곳을 와봤네요."


"뭘요. 저도 덕분에 위스키 잘 샀어요."


"그런데 문득 생각해 보니, 우리 모임에서 이렇게 단 둘이 벙개해보는 건 처음이네요?"


"아, 그렇네요. J님하고 저번에 도림천에서 순대 먹은 날은 R님이 중간까지 같이 있었으니까."


"네, 사실 둘이 보면 좀 어색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생각보단 괜찮네요."


"그러게요. J님이 상대방을 편하게 해주는 편이라 그런 것 같아요. 제가 말을 잘 못하는데 J님이 잘하시니까 마음이 편하네요."


웃으며 말하는 K의 얼굴을 보니 나도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러고 보면 소개팅남도 아니고, 썸남도 아니고, 사귀는 사람은 더더욱 아닌 남자와 단 둘이 주말 오후를 보내는 게 얼마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어쩌면 처음 해보는 경험 같기도 했다.


어릴 때도 해보지 않은 일을 30대 후반이 된 지금 처음 해보는 일이 이제 점점 낯설지가 않다. 나이와 경험은 반비례 관계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참 좁은 세상에 갇혀 있었구나,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이 세상의 진실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무더운 6월 어느 주말, K와의 하루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사진 속 위스키들은 이미 거의 다 마셨고, 지금은 위스키 컬렉션이 두 배 정도 늘어나있다.

*이 브런치북의 완결편이 책으로 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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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손을 꼭 잡고 이혼하는 중입니다>와 일부 이어지는 조니워커 시리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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