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혼자 보낸 첫 명절 연휴
이혼 신고까지 마치고 나니 이제 큰 일은 거의 끝난 상태였고, 나의 이사까지는 별 다른 이벤트 없이 흘러가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우리 사이의 이벤트는 없었지만, 딱 그 기간에 추석 연휴가 있었다.
난 결혼 전까지는 부모님과 계속 같이 살아서 명절마다 북적이는 가족들 틈에서 열심히 전을 부치고 심부름을 하곤 했었다. 결혼 후에는 그의 부모님 댁에 이틀 정도 가서 역시나 전을 부치고 음식을 하고 설거지를 하고 며느리 리액션을 쏟아부은 후 녹초가 돼서 돌아오곤 했었다.
그러나 올 해는 다르다.
난 처음으로 전을 부치는 의무로부터 해방될 수 있게 되었고, 부모님 댁에만 낮에 다녀올 생각이었다.
아버지가 24시간 교대근무를 하는 일을 하고 계신데 올 해는 추석 당일이 일하는 날이셨다. 그래서 그 전날 방문하기로 하고 아침 일찍 준비해서 부모님 댁으로 갔다. 그는 부모님 댁에 추석 당일인 내일 간다고 하길래 알겠다고 하고, 나 혼자 집을 나섰다.
언제나 명절 연휴의 지하철은 참 한산하다. 차가 없는 우리 부부는 늘 명절에 양손에 선물상자를 들고 전철을 타곤 했었다. 올 해는 처음으로 혼자 전철을 탔는데, 그래도 한 손에 들려있는 작은 명절 선물 쇼핑백이 내 손을 덜 외롭게 했다.
부모님 댁에 도착하니 밝게 맞이해주신다. 노력하고 계신 모습이라는 걸 잘 알지만 모르는 척했다.
아침을 차려서 먹는데 점심때 고모네 가족이 온다고 한다. 고종사촌 2명까지 다 같이. 할머니가 작년에 돌아가신 이후, 아빠의 형제들이 명절이라고 다 같이 모이는 일은 이제 없어졌지만, 그래도 고모는 우리 가족과 워낙 친하게 지내고 있어서 이번 명절에 오겠다고 했나 보다.
고모네가 온다고 하니, 문득
‘어라? 그럼 지금 나 혼자 와있는 거 어떻게 말해야 되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 고모한테 저 이혼한 거 말하셨어요?”
“안 했지. 그게 뭐 자랑이라고 미리 말해.”
“그럼 이따 고모네 오면 어떻게 말해요? 혼자 와있는 거 이상하게 여길 텐데.”
“…”
아무 말도 없으신 엄마. 막상 구체적인 해결책은 없으시면서 이 문제를 생각하고 싶지 않아 하시는 것 같았다. 여차하면 그냥 내 입으로 솔직히 말할 생각으로, 나 역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고모네 가족이 모두 방문했고, 푸짐하게 차린 밥상에 모두 둘러앉았다.
그런데 조카사위가 없는 걸 눈치챈 고모부가 물으신다.
“O서방은 안 왔어?”
내가 1초 정도 어떻게 말을 꺼낼까 고민하는 사이, 엄마가 말하신다.
“시댁에 갔데. 이번 추석부터는 각자 집에 가있기로 했다나 봐. 젊은 사람들이잖아~”
당황스러웠다.
생각도 못한 엄마의 답변에 오히려 내가 할 말을 잃어서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 그래요? 역시 요즘 애들은 다르네. 좋네.”
고모부가 웃으며 나를 쳐다보시길래, 하하 멋쩍게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 고모네 가족은 감히 상상도 못 하겠지.
우리 가족들 사이에서 저런 부부가 없다며, 어쩜 저렇게 예쁜 사위와 딸이 있냐며, 예쁨만 받던 부부가 이혼이라니.
차라리 엄마가 말하신 게 훨씬 현실적인 상황이긴 할 거다.
하지만 엄마의 거짓말 하나 덕분에, 난 엄마가 더 불편해졌다.
추석 당일은 그가 그의 부모님 댁에 다녀오겠다고 하고 집을 나섰다. 명절 당일을 혼자 보내는 건 처음이라 뭘 하고 놀까 고민하다가 날씨가 너무 좋길래 산책을 하기로 결정했다.
레깅스와 운동화를 신고 완충된 에어팟을 끼고 좋아하는 음악을 틀며 밖으로 나갔다. 어디까지 걸을까 딱히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걷기 시작했다.
그 무렵 내가 즐겨들은 음악은 JTBC에서 방송 중인 슈퍼밴드 2 였다. 내가 좋아하는 팀들의 경연곡이 음원으로 발매가 되어서, 방송에 나온 곡들만 무한 재생을 하며 걸어갔다. 밴드 음악이다 보니 경쾌하고 신이 나서 걷는 발걸음이 무척 가벼웠다.
평소라면 한강변을 따라 걸어갔을 텐데, 왠지 길 가의 매장이나 도로변 풍경이 보고 싶어서 상수역과 합정역을 지나, 망원역까지 가게 되었다. 여기까지 오니 조금만 더 걸어가서 월드컵경기장 근처의 평화의 공원까지 가볼까 싶은 마음이 생겼다. 이미 1시간가량 걸은 상태였지만, 체력은 충분히 남아있었다.
평화의 공원 안으로 들어가니 가족 단위 나들이객이 많이 있었다. 어린이들이 앞다투어 연을 날리고 있었고, 비눗방울을 불어주는 부모님과 그걸 쫓는 어린아이들, 헥헥 거리며 뛰어다니는 강아지들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났다.
가져온 물을 마실 겸 비어있는 벤치에 앉아서 멍하니 공원을 바라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지금 이 안에 혼자 있는 사람이 나뿐이라는 걸.
다른 날도 아닌 추석 당일이라서 그랬겠지만, 이 또한 참 드문 경험이구나 싶었다.
행복해 보이는 저 가족들이 보기엔 난 외로워 보이려나? 하지만 내 기준에선 나만큼 자유로운 사람은 이 안에 없을 것 같군.
하긴, 이런 생각도 별 의미는 없다. 어차피 저들은 타인에게 그렇게 관심이 없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다.
다들 각자의 행복 안에서 추석을 보내고 있었고, 나 역시 그동안 경험해보지 못한 크나 큰 자유와 작은 외로움을 동시에 느끼며 이제부터의 내 행복에 익숙해져 가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