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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니워커 Sep 23. 2022

혼자가 될 나를 위한 집은 어디에 있나

10. 포기 못 하는 한 두 가지 빼고 포기할 줄 아는 것



이혼 과정 중, 그와 재산분할이 끝난 후 바로 시작한 건 내가 살 집을 구하는 일이었다.

 

원래는 지금 사는 집을 팔고 재산을 나눠 가질 생각이었다. 우리에게 재산은 이 집 한 채뿐이라, 집을 팔지 않고는 분할할 수 없었으니까.

그런데 그가 제안을 해왔다. 자기는 이 집에 계속 살고 싶다고. 같이 살던 이곳을 자기는 아직 떠나고 싶지 않다고.

역시 참 끊어내는 걸 잘 못하는 남자다. 그런 성격 때문에 우리 관계가 이런 파국이 되었음에도..

하지만 이 말은 굳이 입 밖으로 하진 않았다.

 

“늦게 재산분할을 해주면 나는 집을 살 수가 없어요. 1년 기간이라 전세 구하기도 애매해서, 오피스텔 월세로 들어가야 하는데 그 월세를 부담할 수 있겠어요?

그리고 내가 지금 매매하려고 한 집이 내년에는 훨씬 올랐을 수도 있어요. 그 경우에는 그때의 집 가치에 맞춰서 나에게 돈을 줘야 해요. 1억이 올랐을지, 2억이 올랐을지 알 수 없는데 괜찮겠어요?”

 

내 질문에 그러겠다고 했다. 나도 그의 상황을 봐서 월세가 비싸지 않은 집을 알아보겠다고 약속했다.

 


어차피 집을 살 것도 아니니, 회사 근처의 오피스텔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다행히 신축 오피스텔이 많은 동네였다.

퇴근 후 부동산을 찾아가 몇 군데의 집을 보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내가 참 지난 몇 년간 풍족하게 살았구나 새삼 느끼게 되었다.

내 예산에서 구할 수 있는 집은 대부분 실평수 6~7평 정도의 작은 오피스텔이었고, 그마저도 창문에서 보이는 게 앞동 뷰, 벽뷰, 공사장 뷰였다.

만약 1평이라도 실평수를 늘리고 싶다면 월세가 10만 원씩은 올라갔다. 적은 월세로 넓은 집에 살고 싶다면 지어진 지 15년이 넘는 오래된 오피스텔이나 빌라 밖에 대안이 없었지만, 여자 혼자 살게 될 경우 보안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그건 처음부터 배제했었다.

 

그동안 방3화2의 넓은 신축 아파트에서 편안히 살던 내게 상당한 충격이 온 순간이었다.

물론 결혼 전에는 좁은 집에서 4 가족이 북적거리며 살았었지만, 지금은 남편과 둘이 사니까 넓게 살고 있었는데..

갑작스러운 사회적 위치의 하락같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이혼 후 삶의 질이 떨어지게 될 거라는 건 예상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발품을 팔며 눈으로 내가 겪게 될 현실을 마주하니,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귀가하니 그가 집은 어땠냐고 물어본다. (우리는 이혼 접수를 했음에도 여전히 사이좋게 이런저런 얘기를 모두 공유하며 잘 지내고 있다.)

생각보다 많이 좁았다는 거, 조금이라도 평수를 늘리려면 월세가 20만 원은 더 들 수도 있을 것 같다는 거, 오피스텔들이 보안에 취약해 보였다는 거 등등 있는 그대로 말해주었더니 그도 걱정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일단 다른 동네도 더 가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회사에서 몇 정거장 더 가서 조금 더 낙후된 동네로 가면 비슷한 월세에 더 넓은 집은 가능해 보였으니까.

 

어쨌든 지금 내 상황에서 모든 조건을 만족하는 집을 구하는 건 무리일 거라는 걸 안다.

이혼을 선택할 때도 내가 나 답게 사는 걸 선택하는 대신 안정적인 결혼생활을 포기했듯이, 집 역시도 절대 포기 못하는 한 두 가지 빼고는 포기할 줄 아는 게 필요하다는 걸 새삼 느끼고 각오를 굳혔다.

 


그렇게 일주일 가량 오피스텔들을 알아보러 다니던 중 남편이 집 구하는 문제에 대해 다른 제안을 해왔다.

 

재산분할을 당장 완벽하게 해 줄 수는 없지만, 자기가 할 수 있는 최대한 노력해서 지금 일단 70% 정도의 목돈을 주고, 나머지 30%는 이자까지 쳐서 내년 스톡옵션을 받은 후에 줘도 되겠냐는 제안이었다.

70% 정도의 목돈이면 대출을 껴서 아파트를 지금 매매할 수 있지 않겠냐고. 부모님께 손 벌리기 싫었지만 당신이 좁고 안전하지 않은 동네에서 살게 되는 건 더 싫으니 부모님께 최대한 돈을 빌려서 주겠다는 거였다.

 

역시 그 답다고 생각했다. 언제나 나를 먼저 생각해주는 사람이었다. 그의 죄는 여전히 용서할 수 없지만, 내가 지난 6년 간 함께 산 사람은, 그래, 이런 사람이었다.

 

난 그의 말 대로 하기로 했고, 이제 오피스텔 월세가 아닌 아파트 매매를 알아보는 것으로 2차 부동산 발품이 시작되었다.

 


내가 3X년간 살아오면서 가장 살기 좋았던 동네는 지금 사는 동네였다. 그래서 그처럼 사실 나도 이 동네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분할한 재산으로 구할 수 있는 동네는 서울의 아주 가장자리 동네이거나, 비 역세권이거나, 지어진 지 20년 이상 된 구축이거나, 100세대 미만의 나홀로 아파트뿐이었다.

 

오피스텔을 구할 때와 마찬가지로 선택과 집중이 필요했다.

매매할 집은 더더욱 신중해야 했고, 앞으로 최소 2년 길게는 10년 넘게 살게 될 집에서 내가 포기 못하는 가치를 적어봤다.

 

1. 500세대 이상의 대단지

2. 15년 이내의 상태 좋은 아파트

3. 회사까지 전철 환승 없이 30분 이내에 갈 수 있는 위치

4. 숲, 산, 강처럼 자연환경이 가까이에 있는 집

5. 거실 창문으로 트여 있는 뷰를 볼 수 있는 고층

 

이렇게 필수조건을 생각해둔 다음 집을 찾아보니 후보가 두 군데 정도로 좁혀졌고, 바로 부동산에 전화해서 집을 보러 갈 약속을 했다.

 

후보지는 지금 살고 있는 마포 정 반대쪽 경기도였지만, 회사와는 전철로 20분밖에 걸리지 않는 위치였다.

주말에 집을 보러 가기로 했다고 그에게 말했더니, 그가 자기도 같이 갈 수 있냐고 했다. 당신이 앞으로 살게 될 동네인데, 안전한지 괜찮은지 자기도 보고 안심하고 싶다고.

그의 마음이 어떤 지 충분히 느껴져서 그러자고 했다.

 

전철로 1시간 넘게 걸려서 그도 나도 처음인 동네에 방문했고, 한여름이었지만 아파트 단지가 울창한 숲에 둘러싸여서 덥지 않게 느껴지는 곳이었다. 마치 산속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었고, 매물로 나온 집도 앞은 하늘, 뒤는 산을 볼 수 있는 좋은 집이었다.

 

그 집을 보자마자 그도 나도 마음에 들었다. 우리가 지난 6년 간 몇 번의 이사를 하며 느낀 건, 모든 집은 인연이 있고, 내 집이다 싶은 집은 바로 느낌이 온다는 거였다.

이 집이 그런 집이었다.

 

다른 동네의 아파트도 몇 군데 가봤지만 아무 감흥이 생기지 않아서 오래 고민하지 않고 이 집으로 하겠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도 역시 그 집은 좋아 보였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다음 날 은행에 가서 대출이 가능한지 우선 상담을 받아보았고, 충분히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원리금 대출이 가능하다는 걸 확인한 후 부동산에 전화를 했다.

내가 계약하겠다고.

 

부동산 매매는 결혼 후 몇 번 해봤지만 그가 주도해서 계약을 해왔었다. 늘 공동명의이긴 했지만 대출을 그의 이름으로 받았기에 매매계약의 모든 순간에 내가 함께 하진 않았었다.

그래서 가계약금을 내가 직접 보내는 것도 처음이었다.


부동산으로부터 계약 조건과 잔금 일정까지 문자로 받고, 등기부등본까지 받았다.


이제 내가 가계약금 500만 원을 보내는 순간, 이 계약은 체결된다.

 

가계약금을 보낸 다는 건,


내가 이 집을 매매하는 걸 돌이키지 않겠다는 각오.


그와의 이혼을 돌이키지 않겠다는 각오.


우리의 이별은 이혼 확정 전에 이미 이렇게 정해져 버린다는 각오.

 


돌이킬 수 없는 그 순간, 마음이 울렁였다.


회사에서 일하는 중이었는데 자리에 앉아있었음에도 내 안의 뭔가가 흔들리는 기분이 들었다.

잠시 화장실에 가서 거울을 보며 내 눈을 쳐다봤다.


괜찮다고.

넌 할 수 있다고.

혼자 단단하게 꿋꿋하게 앞으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고.


나 자신에게 응원을 보내고, 심호흡을 한 후 가계약금을 이체했다.

 

그리고 그에게는 한 줄로 간단하게만 이 소식을 알렸다.

 

“가계약금 보냈어요.”

 

몇 달 뒤 나 혼자 살게 될, 나의 성, 나의 집.

그동안 살았던 그 어떤 집보다도 앞으로의 내 인생에 큰 영향을 주게 될 거란 예감이 든다.

 

나의 홀로서기는 작은 첫발을 내디뎠다.


단지 안 산책로가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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