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엄마와 나 사이에 작은 우물이 생겼다
불볕더위가 2주 넘게 이어지던 일요일 오후.
주말 점심은 그와 항상 외식을 하던 습관이 있어서, 기어이 이 더위를 뚫고 합정역 라멘집에 가서 라멘을 먹고 커피까지 마시고 돌아온 오후였다.
유명한 줄 서는 맛집답게 30분이나 기다려서 라멘을 먹었으나, 기다린 보람이 있게 역시 맛은 훌륭했다. 다른 데서 먹기 힘든 바질 라멘이 인기 메뉴인데, 초록색 육수를 보니 더위가 살짝 사라지는 것 같은 착각도 들었다.
더운 날씨 때문에 얼마 걷지 않았는데도 많이 지쳐버려서, 집에 돌아온 이후 침대에 누워 멍하니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그는 어제 대청소를 했음에도 한 번 더 청소기를 돌리고 있었다. 청소기 소음이 백색소음처럼 느껴졌는지 스르륵 잠이 오려던 참이었다.
그때 부르르르 울리는 전화.
엄마였다.
"네, 엄마."
난 애교 많은 딸은 아니라서 전화를 자주 하지도 않고, 막상 통화를 해도 용건만 간단히 하는 편이다.
"응. 뭐해?"
"그냥 누워있어요."
"왜? 어디 아파?"
"아뇨. 그냥 더워서 쉬는 거예요."
이미 전화기 너머 엄마의 목소리가 싸한 느낌이 들어서 얼른 통화를 마치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 잘 지내지?"
"네 그럼요."
"법원은 다녀온 거야?"
"네 저번에 다녀왔죠. 8월 10일에 숙려기간 끝나고 다시 가면 돼요."
아.. 전화만 하는데도 마음이 불편해졌다.
"없죠."
단호한 내 한 마디에 엄마는 잠시 머뭇 거리다 급히 화제를 돌리셨다.
"밥은 잘 챙겨 먹고 있니? ABC주스 만드는데 너 생각이 나서.."
날 생각해서 하는 말씀인걸 아는데도, 이 통화의 목적과 그 끝이 너무 뻔히 보여서 상냥하게 대답하기 힘들었다.
"저 그거 안 마시잖아요."
"너네는 어쩜... 너네 언니도 그러고 몸에 좋다는 건 다 안 먹고. 너네 언니는 좋다는 건 안 먹고 매일 배달음식만 시켜먹고."
"저 밥 건강하게 잘 먹고 있으니 걱정 마세요."
"나중에 혼자 살면 밥은.."
"(엄마 말을 자르고) 밥 제가 잘 챙겨 먹어요. 걱정 마세요."
엄마의 목소리가 이미 울먹이기 시작했다는 걸 알면서도 애써 무시했다.
"그래.. 그냥.. 엄마는 걱정이 돼서.."
얼른 화제를 돌리고 싶었다.
"백신 예약은 하셨어요?"
"응, 언니가 아빠 거랑 내 거랑 둘 다 같은 날 같은 시간 같은 병원으로 잡아줬어."
"잘 됐네요."
"응, 너네 언니 없었으면 어쩔 뻔했나 몰라. 고맙지."
"그러게요."
"그러니 우리 걱정은 말고 너 건강 챙기면서 잘 지내고.. 그래.."
울음이 목 끝까지 차오르셨는지, 서둘러 전화를 끊으셨다.
평화롭고 나른하던 주말 오후, 가슴에 돌덩이 하나가 쿵 내려앉는다.
나의 이혼 소식을 듣자마자
"내 딸 인생에 흠이 생겼는데!"라고 말하신 엄마.
이혼이 내 인생의 흠이라고 말하신 이후 나는 오히려 엄마를 대하는 마음에 작은 골이 생겨버린 것 같다.
이런 엄마의 반응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엄마에게 난 평생 자랑거리인 딸이었으니까.
학창 시절 전교 1등이라 동네에서 유명했고, 괜찮은 성격과 외모 덕분에 인기도 많았고 (익명의 공간이라 미친 척하고 적어봅니다) , 그중에 흠잡을 데 없이 좋은 사윗감을 데려와서 결혼 적령기에 결혼을 하고, 사이좋게 예쁘게 사는 모습만 보여드렸었다.
그렇게 자랑스럽던 딸이 이혼이라니.
엄마 아빠 세대에게는 아직까진 이혼이 불명예스러운 딱지라고 생각하실 수 있다는 건 이해하지만, 나의 경우는 이혼 사유가 너무나 명확하고 딸을 위해서도 이혼을 말리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금처럼 혹시라도 내 마음이 조금 바뀌어서 이혼하지 않고 표면적으로 ‘자랑스러운 딸과 사위’ 타이틀을 유지하고 싶은 마음을 내비치실 때마다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실망감이 나를 엄습한다.
흠 아니라고.
난 예전에도 지금도 똑같다고.
불행해지지 않는다고.
말로 설득하기보단 앞으로의 내 삶을 보여드리는 수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엄마의 그 말이 괜히 아프게 느껴질 때가 있다.
괜찮아요 나는.
정말로요.
하지만 지금 이렇게 말해봤자, 엄마는 믿지 않을 거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