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니워커 Sep 28. 2022

이혼하고 동거하는 게 이상한가요

13. 전남편과 하우스메이트로 살기


 

보통의 부부는 이혼하면 바로 떨어져 살 것이다.

심지어 내 경우처럼 남편의 외도가 이혼 사유라면 이혼 접수가 되기 전부터 별거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우리는 이혼 절차가 마무리된 후에도 2개월 더 같이 살았는데, 이유는 단순했다. 내가 구한 집의 이사 시점까지만 같이 살기로 했을 뿐이다.

 

이혼 후에도 당분간 같이 산다고 부모님께 말씀드리니 걱정을 많이 하셨다.


“불편하지 않겠어..? 우리 집 와있으면 되잖니.”


“안 불편해요. 이사를 한 번 더 하는 게 훨씬 불편하죠.”

 

그렇다. 난 그저 합리적인 선택을 했을 뿐이다.

 

그와 결혼하고 약 7년 간 우리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이사를 4번이나 했었다. 그 과정에서 느낀 건, 이사는 안 할수록 좋다는 것과, 이삿짐이 많을수록 힘들다는 단순한 깨달음이다.

 

안타깝게도 나는 이삿짐이 많은 편이었는데, 특히 책이 일반인보다 훨씬 많았다. 대충 세봐도 3000권 가까이 되고, 그 책들을 버릴 생각이 없었다. 그 짐들을 다른데 보관이사를 해놓고, 부모님 댁에 옷과 필수품을 챙겨서 가고, 2개월 뒤 다시 짐들을 챙겨서 새 집으로 간다? 상상만 해도 피곤해지는 상황이었고, 이사를 2번 하는 셈이라 돈도 많이 드는 방법이었다. 심지어 이 무렵 회사에서 일이 쏟아지는 중이었기에, 정신적으로도 체력적으로도 그럴 힘이 없었다.

 

물론 이 모든 건 그가 기꺼이 그렇게 하라고 이해해줬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하면, 그가 그걸 원했다.

이혼까지 해서 이제 정말 남남인 사이임에도, 아직도 그는 나를 끊어내지 못했다. 나와의 진짜 이별을 최대한,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미루고 싶어 했다.


그걸 나도 알고 있었기에 어쩌면 그 마음을 이용한 것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내가 겨우 이만큼 이기적으로 행동했다 한들 무슨 욕을 먹겠는가.

 


그와의 2개월은 평화롭고 한결같았다.

 

우리는 여전히 주말에는 손을 잡고 근처 맛집을 찾아가 데이트를 했고, 좋아하는 커피를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고양이들과 같이 놀았고, 주말 예능도 함께 보며 깔깔 거리며 웃었다. 퇴근 시간을 서로에게 공유했고, 회사에서의 힘들었던 일, 사소한 에피소드도 잠들기 전에 말하다가 잠이 들었다.

 

그랬다.

전남편만큼 동거인으로 편하고 친한 사이는 없었다.

 

서로를 배신해선 안된다는 의무감에서 해방되니, 오히려 참 편해졌다. (물론 이건 나 혼자만 그렇게 느낀 걸 수도 있다.)

이미 6년이나 함께 살며 서로의 생활방식을 잘 알고 있고, 청소와 같은 집안일 배분도 완벽하고, 각자의 취미와 시간을 존중해주는 마음도 그대로였다.

 

이보다 더 완벽한 하우스메이트가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이제 와서 이 이별이 조금 아쉬워지기까지 했다. 심지어 어떤 때는 그냥 이대로 동거하는 친구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으려나,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좋은 점만 있진 않았다.

 

겉으로 보는 우리는 정말 평화로웠지만, 내 마음이 늘 평화롭지는 않았다.

물론 그의 바람을 아무에게도 말 못 하고 속으로 눈물 흘리던 시기에 비하면 잔잔한 호수 같은 마음 상태였지만, 잔잔하던 호수에 작은 모래알 하나만 던져도 파문은 이는 법이다.

 

아주 작은 계기로 지난 시간이 다시 떠오르거나, PMS 기간이라 어쩔 수 없이 우울해지는 시기가 찾아오면 나는 또 마음이 울렁였다.

 

이렇게 멍청이처럼 순순히 이혼해주는 게 잘하는 걸까 하는 뒤늦은 후회도 잠시 스쳐가고, 재산 분할을 좀 더 할 수 있었을 텐데 너무 적게 받았나 하는 속물적인 생각도 들었다.


무엇보다 이혼을 선택한 게 정말 내 미래의 행복에 최선이었을까 하는, 이제 와서 할 필요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 쓸데없는 생각이 들 때면 밖으로 나갔다.

마침 햇살이 눈부시고 하늘이 푸른 가을이었다.


시원한 바람을 느끼며 한강을 뛰거나, 그냥 산책만 해도 기분 전환이 잘 되는 성격이라 참 다행이다 싶었다.


안 좋은 생각을 오래 담아두어 봤자 그 누구도 신경 써주지 않고 나만 손해인데, 내가 굳이 나를 지옥으로 밀어 넣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언제나 나를 끌어올려 줄 수 있는 것도, 나를 응원해줄 수 있는 것도, 나를 아껴주고 지지해줄 수 있는 것도, 가장 먼저 나 밖에 없다.

 

오늘도 나 자신에게 파이팅을 외쳐준다.

넌 분명 최선의 선택을 했고, 그동안 잘해왔고, 앞으로도 틀림없이 잘할 거니까 걱정 말라고.

그러니 지금 느끼는 그 감정들도 자연스레 사라질 테니 걱정 말라고.

 

평화롭고 이상한 이 동거 기간도 곧 끝이 난다.


그와 추억이 많은 카페였는데, 우리가 이혼할 무렵 폐업하신다는 말을 들었다. 세상에는 이렇게도 무수한 마지막이 흩뿌려져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