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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니워커 Sep 29. 2022

마지막 산책, 더 이상 미래를 말하지 않는

14. 내 이삿날이 다가왔다


 

그와 결혼한 이후 4번이나 이사를 다닌 덕분에 배운 노하우 중 하나.

‘이사는 무조건 금요일에 잡아라.’

 

이삿짐을 옮긴 이후에도 최소 이틀은 짐을 정리하느라 회사에 나갈 힘도 정신도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어서, 이번 나의 이사도 금요일이었다.

 

회사가 가장 바쁜 시기였기에, 하루 전에 미리 짐 정리한다고 연차를 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2주 전부터 내가 가져갈 짐을 분리하고 방 한쪽에 몰아놓는 식으로 살림 분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혼자 살아갈 수 있도록 그동안 나 혼자 관리하던 공과금 처리방법, 생필품 구매 사이트와 주문 간격, 고양이 용품과 예방접종 간격 등을 차근차근 알려주었다. 흡사 회사에서의 인수인계 과정 같았다. 우리 부부는 그가 돈을 더 많이 벌어오는 만큼 집안일과 생활 관리 비중을 내가 훨씬 많이 갖고 있었다.

 

“재산세는 미리 신세계 상품권을 T멤버십을 이용해서 매 월 구매해둔 다음, 쓱 머니로 바꿔서 내면 제일 싸요.”

 

“애들 심장사상충 약 바르는 주기는 여름에는 4주, 봄가을엔 6주, 겨울엔 8주 정도 간격으로 발라줘도 돼요. 구매 사이트는 여기에요.”

 

“세제나 식재료는 여기저기 가격 비교하는 거 귀찮으면 한 달에 한번 정도 oo배송으로 주문해요.”

 

“도시가스 앱은 이거니까 지금 깔아서 명의 변경해둬요.”

 

이렇게 새삼 하나하나 그에게 알려주다 보니, 엄마가 왜 아빠랑 이혼하고 싶어도 못한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나마 우리 부부는 젊으니까 가르쳐주면 어떻게든 잘 해나갈테지만, 아빠한테 이제 와서 쓱배송이니 도시가스 앱이니 알려드릴 수도 없고 이해도 못하실게 뻔했다.

“저 양반, 나 없으면 못 살 거 아는데 어떻게 버리니.. 내가 끝까지 데려가야지.”라는 식으로 말하셨던 엄마 말씀이 좀 더 와닿았고, 우리는 그런 순간이 오기 전에 정리할 수 있어서 다행인가 싶었다.

 


이삿날 D-6. 함께 보내는 마지막 주말이었다.

 

“내일은 안산에 갈까? 날씨도 좋다고 하고, 갔다가 내려오면서 당신이 좋아하는 김치찜 먹으러 가요.”

그가 토요일 낮에 함께 청소를 하다가 제안했다.

 

안산 둘레길은 우리가 참 좋아하는 장소다. 거의 매 년 한 두 번은 다녀왔는데, 데크길이 아주 잘 깔려있어서 무리 없이 두 시간 정도 운동 겸 산책하기 좋은 곳이다.

 

“응, 그러자.”

 

일요일 아침 10시쯤 집을 나섰다. 집 앞에서 버스를 타고 30분 정도 가야 안산 둘레길 입구에 도착한다. 우리가 출발하는 지점은 늘 서대문소방서 근처였다. 올 해는 왠지 처음 온 것 같은데, 오랜만에 와도 입구부터 기분이 좋아졌다.

예쁘게 길에 깔린 낙엽을 보니,

‘아.. 이미 가을도 끝나가는구나. 시간이 참 빠르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산을 올라갔다. 그도 나도 등산을 잘하는 편이다. 체력도 좋고 몸도 가벼운 사람들이라 산 길이나 언덕길은 늘 무리 없이 산책처럼 다니곤 했다. 난 원래 등산을 그와 더 많이 다니고 싶었으나, 주말에 12시는 되어야 잠에서 깨는 그에게 새벽 7시부터 등산을 가자고 말하는 건 미안해서 그러지 못했었다.

‘이사 갈 동네는 산과 바로 붙어있는 곳이니, 이제 혼자서 잘 다녀야지’ 하고 속으로 생각하며 산을 올랐다.

 

올라가는 중간중간 그가 사진을 찍어주겠다며 앞으로 가보라고 한다. 이제 나에게 잘 보일 필요도 없는데, 이런다고 내 마음이 변하지도 않고 우리의 헤어짐을 되돌릴 수도 없는데.

내 모습을 이렇게 뒤늦게라도 사진에 남겨놓고 싶었던 걸까.

어색하게 그의 핸드폰 앞에서 그를 바라봤다. 아마 제대로 웃지 못했었겠지. 마스크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길을 걷는 동안 무슨 대화를 나눴었는지 잘 기억나진 않는다. 그 당시 둘 다 회사가 바쁘고, 팀 내 문제들 때문에 고민하고 있는 중이라 그 얘기를 하지 않았었나 싶다.


정작 왜 그 대화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지에 대해선 정확히 기억이 난다.


우리 대화에 이제 더 이상 미래를 말하는 주제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다음에 뭘 먹으러 가자.

돌아오는 주말에 여기를 가보자.

내년 봄에는 여행을 가자..


이런 주제는 이제 입 밖으로 말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된다.

 

이 말을 해도 되나? 라며 속으로 한 번 브레이크를 걸다 보니, 입으로 말할 수 있는 주제는 매우 한정적이었다. 마음에 안 드는 상대가 나온 소개팅 자리에서의 알맹이 없는 대화와 다름없었다.

물론 그보다는 당연히 서로를 위해 진심으로 얘기한 건 사실이었지만, 5일 뒤면 더 이상 연락하지 않을 사이인 사람과 뭘 얼마나 생산적인 대화를 할 수 있을까.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가 함께 보낼 마지막 주말을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싶었다. 슬픈 기억이 아니라, 이 선선한 공기와 예쁜 단풍들, 파란 하늘, 새소리로 기억하고 싶었다.

 

분명 내일부터 이삿날까지는 둘 다 회사일 때문에 야근이 많아져서 이렇게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없었을 거다. 우리가 제대로 함께 보낸 마지막 하루가 될 거라 생각했는데, 오늘 하루가 우리에게 나쁜 추억은 아니어서 다행이다.

 

우리는 우리답게 이별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와 함께 걸었던 수 많은 산책로를 이제는 혼자 걸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낙엽이 깔린 안산 산책로를 걸었다. 우리가 참 좋아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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