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모월모일(某月某日), K는 위스키를 한 모금 마셨다. 중국인이 운영하는 주점이지만 이국(異國)에 온 느낌이다. 그곳은 K에게 그리 어울리는 곳은 아니었다. 세탁소 경리 일을 하면서 자주 드나들 수 있는 곳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지쳐있었다. 그리고 지금의 상황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잠시라도 호사를 누려보고자, 검은 베스트(vest)와 양장 바지가 잘 어울리는 중국인 노(老)주인이 운영하는 바(bar)를 찾은 것이다.
가게 안은 한산했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가게는 지하에 있었지만, 환기를 위한 창문이 지상으로 살짝 코를 내밀듯 나 있어 바깥 날씨를 가늠해 볼 수 있었다. 많은 비는 아니고, 귓가를 즐겁게 해줄 만한 경쾌한 리듬으로, 비가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독주를 즐겨 마시는 K에게 얼음 위에 부어진 위스키는 되려 부드럽게 느껴졌다. 실내에는 달콤한 향기가 흐르고 있었고, 이따금 손님들에게 술과 안주를 나르는 여성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가 속한 세계 어디에도 없는 사치와 쾌락이 이 안에 (노골적이지 않고 고급스럽게) 담겨 있었다.
K는 바 테이블에 앉아 바텐더에게 위스키 한 잔을 더 부탁했다. 두 잔째. 하루 벌어서 하루를 먹고사는 K에게는 하루치의 품삯이었다. 바텐더는 작은 그릇에 땅콩 따위를 담아 그에게 건넸다. K는 작은 목소리로 감사하다는 말을 하며 위스키로 목을 축였다.
술을 반쯤 마셨을 때 K의 옆으로 한 남자가 와서 앉았다. K 옆의 의자 한 칸을 비우고 앉은 그는 얇은 가을 코트를 벗으며, 옷에 묻은 빗물을 털어냈다. 남자는 비워진 의자 위에 코트를 올리고 바텐더에게 위스키를 한 잔 부탁했다. 바텐더는 묻지 않고 K는 알지 못하는 위스키를 따라 남자에게 건넸다.
“고단한 하루를 보내셨나 보네요.”
남자는 K를 바라보며 중국어로 말을 했다. 단정한 머리에 얇은 테의 안경을 쓴 남자는 목소리도 단정했다. 차분한 목소리가 낯선 공간에 있던 K에게 편안하게 느껴졌다. 그는 잠시 자신의 행색을 살펴봤다. 자신이 이 공간에 너무 이질적인 존재는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K 역시 중국어로 답했다. 이곳은 상해(上海)니까.
“하하, 뭐 그렇죠. 산다는 게 쉽지 않네요.”
자신을 J라고 소개한 남자는 K의 대답에 자연스럽게 호응한 뒤, 위스키를 한 모금 입에 머금고, 가벼운 호흡과 함께 술을 삼켰다.
“처음 뵙는 분 같은데, 혹시 어떤 분야에 종사하시는지 물어도 될까요?”
별것 아닌 질문이었으나 K는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워낙 표정을 잘 감추는 그라서 내색하지 않고 ‘무역업’에 종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궁색한 업체라 자세히 말씀은 못 드려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상해는 물산과 사람이 모이고, 온갖 어중이떠중이가 거쳐가는 곳이다. 무역업만큼 많은 이들을 거느린 분야도 없거니와, 이곳에서 한 번이라도 무역업과 관련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K도 처음 상해에 왔을 때 부두에서 물건 하역하는 일을 했다. 그러니 무역업 종사자라는 그의 말도 허언은 아니었다.
“아, 그러시군요.”
진심으로 K의 말을 믿는다는 말투였다. 조금의 불신도 담겨 있지 않은 J의 표정에 K는 괜히 가슴 한편이 쓰렸다.
“어느 직종에 종사하고 계시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K 역시 최대한 격식을 차려 물었다. J는 그저 그런 하급 공무원이라고 대답했다. K 역시 진심으로 믿는다는 표정을 담아 J의 말에 호응을 했으나, 아무리 봐도 직급이 낮은 공무원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 바는 하급 공무원이 올 만한 술집도 아니었다. K처럼 하루 품삯을 날릴 각오로 오지 않는다면 모를까, K는 남자의 말을 조금도 믿지 않았다.
서로에 대한 질문은 그것이 끝이었다. 그것은 격식을 차린 최소한의 대화였을 뿐, 두 사람은 이후 상해의 근황이나 세계의 정세 그리고 무엇보다 화류계의 소문 따위를 이야기하느라 서로에 대한 질문을 더 하지 않았다. 그러니 사실 자신에 대해 거짓을 말했다 한들 문제 될 것은 전혀 없었다.
J는 이런 고급 술집에 무척 익숙한 듯 보였다. K의 얼마 남지 않은 잔을 본 J는 자신이 사겠다며, 바텐더에게 K의 잔에 위스키를 채워달라고 말했다. 안 그래도 금방 자리를 떠야 한다는 것이 아쉬웠던 K로서는 위스키의 오아시스를 만나기라도 한 기분이었다. 더구나 J가 마시는 위스키는 자신이 방금 전에 마신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향이 풍부했다. 묻지 않아도 이쪽이 더 고급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싸구려 술과 독주로도 풍미를 향한 인간의 감각은 쉽게 무뎌지지 않는 것이다.
술이 서너 번 더 돌고 J는 자리에서 일어나겠다는 말을 했다. K 역시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혼자 남아 있어봐야 더 마실 술이 없으니.
두 사람은 가게 밖으로 나와 기분 좋게 악수를 나눴다.
“다음에 또 뵈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대화, 정말 즐거웠습니다.”
볼이 불그스레해진 J가 K의 손을 쥐며 말했다. K 역시 같은 말을 하며 J의 손을 연신 흔들었다.
비는 오지 않았다. K는 골목길로 들어설 때 추위를 느끼며 코트 깃을 여몄다. 아직은 가을이지만 벌써 한기가 스미는 것 같았다. 그는 멋스러운 콧수염 위에 달린 두껍고 긴 코를 손으로 잡고 비틀듯 닦았다. 뭔가 마음이 허전할 때 하는 그의 버릇이었다. 코가 간질간질하다는 느낌이 들 때마다 그는 그렇게 했다.
평소에 쓰는 낡은 중절모 대신 동무 김모(某)의 중절모를 빌려 쓰고 왔지만, 그의 신분까지 닦아버릴 수는 없었다. 세탁소에서 일을 한다고 해도 결국 그는 경리 아닌가? 돈을 세는 일을 할 뿐, 세탁은 할 줄 모른다. 최대한 깨끗한 옷을 입고 나왔으나 그의 구두 끝은 상처가 나 있었고 굽은 닳고 닳아 짚신처럼 보였다.
그는 코트 주머니에 있는 베레모를 꺼내 중절모 대신 썼다. 그리고 한 손으로 지팡이와 중절모를 들고 어두운 골목길을 걸어갔다. 길 양측으로 드문드문 검은 그림자들이 보였다. 어둠에 구멍을 내 듯 붉은 담뱃불도 두어 개 K의 눈에 들어왔다. 권총은 없지만 K의 코트 주머니에는 짧은 나이프(knife)가 하나 들어있었다. 무슨 일이야 있겠냐마는, 제 한 몸 지키는 정도는 K의 덩치와 완력으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를 지켜보는 눈길이 몇 개 있었으나 K의 체구를 보고서는 모두 전에 하던 일에 집중했다. 담배를 피우거나 시답지 않은 농담을 하거나.
K의 코트 안주머니에는 봉투가 하나 들어있었다. 누군가에게 전달해야 하는 돈주머니였다. 그것이 아니었다면 이런 밤, 고급 술집이 있는 거리로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두둑한 돈도 주머니에 있겠다, 도저히 앞으로의 날들에 희망이 보이지 않겠다, K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평소에 가보고 싶었던 술집에나 가서 돈을 다 써버리고 도망가자. 그런 생각을 했다.
물론 그는 돈 봉투는 열어보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의 지갑에서 쭈글쭈글한 지폐를 꺼내 바텐더에게 건네려 했을 뿐이다. 다행히도 술집에서 만난 J가 K가 전에 먹었던 술값까지 계산해 주었다.
운이 좋은 날인가. K는 그런 생각을 하며 얼큰하게 취한 몸으로 숙소에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일찍 가슴에 품었던 돈주머니를 목적지로 정확하게 배달했다.
2
10여 년 전, K는 한반도 북쪽 끝자락에 있었다. 열악한 화승총 대신 30년식 소총을 손에 쥐게 되었을 때의 감격을 그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일제(日帝)의 무장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지만 그나마 총 다운 총을 손에 쥐고, 비록 탄약이 부족해서 실제 사격 연습은 하지 못했지만, 허공을 향해 사격 자세를 취했을 때는 나라의 독립을 찾는 것도 시간문제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몇 해 전 만주 간도와 길림(吉林)에서의 대승리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자신이 걷고 있는 길이 최선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민족의 길, 정의의 길 그리고 인간 해방의 길이 그 위에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10년도 넘게 열악한 삶을 살아가다 보니, 이제는 뭐가 뭔지 잘 감이 오지 않는다. 간혹 전해지는 승전보에도 일제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들이 잃은 병력은 금세 보충되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기관총과 대포를 생산하고, 바다 위로는 그들의 함대가 위용을 자랑하며 항해했다. 발달된 과학과 기술, 그리고 각종 제도들. 그에 비해 조선인들은 이 작은 집단 안에서도 갈라졌다. 사회주의니 내셔널리즘이니 또는 무정부주의니.
K에게는 딱히 사상이 없었다. 굳이 하나를 꼽자면 ‘조선의 독립’이었으나, 그의 사상은 화류계의 여인들 앞에서도 쉽게 무너지는 허약한 것이었다. 언젠가부터 얼마 간 돈이 생기면 유곽을 전전하며 돈을 탕진했다. 유곽의 여인을 품에 안고 있으면서도, 안락하고 넓은 집에서 아리따운 아내와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품에 안고 잠이 드는 자신을 상상하게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삶은 너무나 먼 곳, 말하자면 천상 위에나 존재하고, 자신은 언제 아무 의미도 없이 죽게 될지도 모르는 날들을 살고 있으니, 도대체 사상이란 무엇인가. 어차피 인간이란 사상 때문에 서로를 배척하고, 서로를 죽이는 것 아닌가? K는 곧잘 그런 회의에 빠지며 자신의 미래를 비관했다.
K는 배움이 길었으나 좁은 조선인 사이에서도 날고 기는 이들이 언제나 있었다. 결국 그는 이 작은 조선인들의 사회 속에서도 허드렛일이나 하며, 언젠가 자신을 희생시키는 것 말고는 이 사회와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조차 없는 존재였다. 차라리 뭔가 의미를 찾을 수라도 있으면 좋겠지만, K는 자신의 활동 안에서 어떤 의미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럴수록 부와 명예, 아니 둘 중 하나만이라도 얻기를 바라는 마음이 커졌다.
그날도 아침이 오고 어둑한 방 안으로 햇볕이 들이비출 때, K가 가장 먼저 한 생각은 ‘또 지겨운 하루가 시작되었군.’라는 것이었다. 세탁소에 나가 지겨운 서류들을 보고, 지겨운 셈을 하며, 사람들과 하나 마나 한 잡담을 나누고, 억지로 희망을 가진 척 미소를 지으며, 그러다 또 일이 있으면 누군가에게 불려가 조금도 빛이 나지 않는 허드렛일을 하는 것이다. 때로는 누군가를 미행하고, 때로는 총은 아니라도 칼로 누군가를 찔러야 하는 순간도 온다.
오전 일을 마치고 근처의 만두 가게에서 만두 몇 알로 허기를 때운 K는 부두로 나가 바다를 보며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그때 그의 곁으로 다가오는 한 사내가 있었다. 내무부장 밑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최모(某)’ 양반이었다. 나이가 K보다 열 살은 더 많은 그는 키는 K보다 작았지만 단단한 인상의 남자였다. 정부에서 빛이 드는 곳이 아닌, 음지(陰地)에서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사람들에게는 내무부장의 집사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분들 일이야 K는 잘 몰랐다. 가끔 내무부장 같은 분을 볼 때도 있었지만 딱히 대화를 나눌 일은 없었다. 말이 많은 분은 아니었기에 가끔 보면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를 하는 정도였다.
최모는 K에게 사진을 한 장 건넸다. 최근에 현상한 것인지 꽤 선명한 사진이었다. 그리고 K는 단번에 사진 속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부둣가 근처의 고급 술집에 자주 드나든다더군. 조선인이면서 꽤 출세한 모양이야. 누군가 우리 측에서 이 자를 만나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아.”
K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 사람’이 자신일 리는 없지만, 이상하게 K는 긴장이 됐다. 최모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만 알아내면 된다고 했다. 위험한 일은 아니라는 의미였다.
그날부터 K는 세탁소에는 나가지 않고, J가 자주 가는 술집 앞에 진을 펴고 동태를 살폈다. 근처 노점상이나 바가 잘 보이는 다른 술집 창가에 앉아 J가 나타나기를 기다렸고, 그가 나타난 후에는 그 술집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K가 익힌 ‘우리 측’ 사람들 중 아는 ‘얼굴’이 있는지 맞춰보았다.
나흘 정도 진을 치고 있을 때, 드디어 아는 얼굴을 보게 되었다. 외무부 쪽에서 일하는 ‘신모(某)’였다. 영어와 러시아어를 특히 잘 하는 사람이었는데 말끔한 옷차림을 하고 바 안으로 들어갔다. 1시간 정도 뒤에 신모가 먼저 나오고, 몇 분 뒤에는 J도 술집에서 나왔다. 한 번이라면 우연일지도 모르기에, K는 3주 정도 계속 지켜보았다.
K는 최모에게 외무부의 신모가 의심스럽다는 말을 전했다. 사나흘, 길면 5일에는 그 술집에 가고, 그때마다 J도 술집을 찾았다. 단순한 ‘취향’과 ‘우연’이라 보기에는 일치도(一致度)가 너무 높았다. 최모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고했다는 말을 했다.
K는 이후 신모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굳이 물어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신모가 J를 만나 무슨 말을 했을지 궁금했다.
3
기온이 제법 내려가 장갑 없이 걷기 힘든 날씨였다. K는 두 손을 코트 주머니에 깊숙이 찔러 넣고 길을 걸었다.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린 후,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은은한 향기가 K를 가장 먼저 맞았고, 아늑한 조명이 다시 그를 환영했다. 2개월 정도 되었을까, K는 다시 돈을 쥐어짜 그곳을 찾았다. 비는 오지 않고, 그렇다고 눈도 오지 않지만 날은 어둑했다. 조금은 이른 것 같았다. 바 안에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K는 바 테이블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처음 자신이 이곳에 왔을 때 마신 위스키를 주문했다. 그것이 가장 저렴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바텐더가 위스키와 견과류 안주를 함께 내주었다. 예쁘게 꾸민 여직원들도 보였지만 테이블을 정리하고 잔과 그릇 등을 놓고 있었다. 눈길을 계속 주며 K는 얼마 되지 않는 위스키를 홀짝거렸다.
오늘 J를 만날 것이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다만 혹시나 하는 마음은 가지고 있었다. K는 최대한 술을 아끼며 마시고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며 조금씩 가게 안으로 사람들이 들어왔다. K의 오른쪽에 한 남성 손님이 앉았고, 가게 안의 테이블에도 한두 사람씩 자리를 차지하고 앉기 시작했다.
K는 위스키 한 잔을 다 마시고 아쉬움을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오늘은 도저히 두 잔을 마시기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때 J가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막 나가려던 K를 알아본 J는 반갑게 인사를 하며 자신의 코트에 중절모를 털었다. 눈이 오는 모양이었다.
“가시려고요? 오랜만에 뵈었는데, 제가 한 잔 사도 될까요? 아니면 바쁘신 일이…….”
말끝을 흐리는 J를 보며 K가 대답했다.
“아니요. 바쁜 일은 없습니다만…….”
“그러면 잘 됐습니다. 언제 또 뵐지 모르는데, 술 한잔하면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나 나누지요.”
J가 K의 팔을 잡아끌며 바 테이블로 그를 데려갔다. 자리에 앉아 위스키를 한 잔씩 주문한 뒤 J와 K는 그간의 이야기를 나누고, 저번처럼 세계 정세나 화류계 소문 등을 이야기하며 술을 마셨다. 저번처럼 중국 문장들이 그들 사이를 떠돌았다.
“혹시 고향이 어디인지를 물어봐도 되겠소?”
어느새 K는 자신의 나이가 위라는 확신이 들어 J에게 편하게 말을 했다. K의 질문에 J는 조선 경성에서 왔다고 말했다. 나고 자란 곳은 인천이라고 덧붙였다. 그 말에 놀란 표정을 지으며 K는 “난 경기도 양평에서 태어났소.”라고 맞장구를 쳤다. J 역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상해에 조선 사람들이 많기는 하지만, 여기서 이렇게 동포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J는 감격하며 바텐더에게 위스키를 한 잔씩 더 달라고 했다. 그는 가장 비싼 브랜드를 주문했다. 두 사람은 이제 조선말로 대화하기 시작했다. 전에 만났을 때처럼 두 사람은 한참을 이야기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국 땅에서 같은 조선인을 만났다는 기쁨이었는지, 이번에는 이야기가 더 길어졌다.
헤어지기 전 J는 종이에 뭔가를 적어서 K에게 건넸다.
“이쪽으로 연락하면 제가 받을 수 있습니다. 언제든 좋으니까 꼭 만나서, 아니 자주 만나서 이렇게 회포를 풀지요.”
그것은 어느 다방의 이름이었다. 다방의 마담에게 이야기를 전해놓으면 거의 매일 그곳을 찾으니까 자신에게도 전달이 된다는 것이었다. K는 또 조만간 연락을 하겠다며, 그때는 자신이 잘 아는, 아주 좋은 집으로 대접을 하겠다는 말을 하며 쪽지를 받았다.
그날 이후 K와 J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만나 함께 술을 마셨고, 시간이 없을 때는 다방이나 카페를 찾아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J는 말솜씨가 좋을 뿐 아니라, 상대에게서 이야기를 잘 끄집어내는 재주가 있었다. K는 속으로 많은 정보원, 공작원, 그리고 일제 고위 공무원들을 상대하다 보니 이렇게 말솜씨가 좋은가 보다 생각했다.
J는 언제나 잘 다림질된 양장을 입고 K를 만났다. K도 나름 신경을 쓴다고 했지만 역시나 두 사람의 행색에는 차이가 많았다. 꽤 오랜 시간 만났음에도 J는 K의 직업을 묻지 않았다. 그저 ‘무역업’이란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듯했다.
주로 K가 J에게 연락을 하는 편이었고 되도록 K가 동선을 짰다. 전의 외무부 신모처럼 매번 같은 동선으로 다니다 누군가의 눈에 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모월모일(某月某日). K는 자신이 잘 아는 중국요리점으로 J를 불렀다. J를 기다리며 K는 고량주를 한잔 마시고, 접시의 야채볶음을 집어 입에 넣었다. 야채를 잘근잘근 씹으며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생각해 봤다. 당장 손에 쥔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도대체 무엇으로 J의 마음을 살 수 있을지. 무슨 말을 하고, 무슨 ‘신호’를 주어야 J가 서 있는 양지(陽地)로 옮겨갈 방법을 들을 수 있을지…….
딱히 큰 계획은 없었다. 전부터 입이 근질거렸으나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을 해야 하는지 감이 오지 않았다. ‘J는 나의 정체를 알고 있을까? 정말 내가 무역업에 종사한다는 말을 믿는 것일까?’ K는 늘 의문을 가졌으나 J의 표정을 보면 천연덕스럽게 K의 모든 말을 믿는 것처럼 보였다. 외로운 이국 땅에서 마음 맞는 조국 동포를 만난다는 것이 쉬운 일이겠는가.
‘참나, 어떻게 말을 해야 한담?’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방문이 열리며 J가 들어왔다. 늘 그렇듯 활짝 미소를 짓는 J였다.
4
연말이었다. 부두에는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한다는 기쁨이 가득했다. 추운 날씨에도 연인들은 밖으로 나와 바다를 바라보며 다음 해를 기약하고 있었다. 내년이라고 뭐가 달라질까? K는 씁쓸한 마음을 달래며 발걸음을 옮겼다.
조금 더 걷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눈은 바람에 휘날리며 사방으로 퍼지다 겨우 바닥에 떨어졌고, 이내 녹아 사라졌다. K는 눈을 바라보며 더욱 큰 쓸쓸함을 느꼈다. 바람에 휘날리며 이곳저곳을 전전하다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눈. 자신도 결국 이 고독하고 우울한 타국에서 아무 흔적도 없이 녹아 사라지는 것은 아닐지, 한숨을 쉬며 K는 탈출구 없는 항구 도시를 배회했다.
바다로 열려 있어서 어디든 갈 수 있다지만 K가 갈 수 있는 곳은 없었다. 식민 지배를 받는 조선은 거대한 감옥일 뿐이었으며, 만주든 이곳 상해든 조선인들은 어디에서나 처절하게 싸우고 견뎌야 했다. 속으로는 출세(出世)를 꿈꾸지만 겉으로는 대의(大義)를 이야기했다.
물론 위인(偉人)도 있었다. 마치 부처처럼 바람이 불든 눈이 오든, 가슴에 칼이 꽂히고 눈에 총알이 박히든, 변함없이 자기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이 있었다. K는 그런 사람들을 두 눈으로 보면서도, 그 사람들의 존재를 믿을 수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추위에 온몸이 뒤틀리고, 가시지 않는 배고픔을 견디다 보면, 조선 독립은 그저 수학이나 철학처럼 추상의 세계에나 존재하는 이야기처럼 들렸다. 당장 따뜻한 고깃국에 향긋한 술이나 마시고 싶을 뿐이었다. 온기가 도는 집에서 일어나, 향긋한 냄새가 나는 여인과 함께 잠에서 깨고 싶다는 마음, 그것이 K가 아는 유일한 구체적 삶이었다.
J는 그러한 삶을 살고 있지 않을까? 종종 K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의 말을 듣기 전까지는…….
한참 정처 없이 부두를 떠돌다가 숙소로 돌아왔을 때, 그 길목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곰처럼 큰 그림자를 가진 남자였다. 내무부장의 부하인 최모였다.
‘언제부터 기다린 것일까? 아니면 나도 미행을 당한 것일까?’ K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최모는 그 거친 음색으로 K에게 물었다.
“새 친구를 사귀었다는 이야기가 들리던데?”
K는 최모의 재킷 주머니를 바라봤다. 그는 갈색 재킷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 안에는 분명 한 자루의 권총이 들어있을 것이었다. 소련제일까? K는 자신의 심장을 관통하는 총알을 상상해 본다. 그 총알이 그리는 궤적도. 강선을 통과한 총알은 회전하며 K를 향해 날아올 것이다. 안정적인 비행을 하며 날아와 K의 심장을 꿰뚫고, 아무 의미도 없는 그의 삶에 마지막 안식을 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밤에 소란스러운 총소리보다는, 점잖고 정숙한 나이프가 선택될 수도 있다.
“네. 외롭고 비참한 타국 살이에, 친구도 없이 어떻게 살아갑니까? 그래서 아주 부자 친구를 하나 사귀었습니다.”
취기가 스민 목소리로 K는 대답했다. 최모는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그렇다. 주머니에서 나온 것은 권총이 아니라, 싸구려라 냄새도 역하고 맛도 더러운, 겨우 담배 세 개비가 들어있는 담뱃갑이었다. 최모는 그중 하나를 K에게 건넸다.
“외무부 신율석. 며칠 전에 간도로 갔어.”
오랜만에 들어본 이름이었다. K가 아무 말 없이 서 있자 최모는 말을 이어갔다.
“국제 사회주의 운동에 헌신하겠다나. 가방 한가득 서류 뭉치를 쏟아내고는 (다 시답지 않은 서류들이었지만), 조국 독립, 민족 독립보다 더 중요한 대의를 위해 일하겠다고 외치면서, 간도로 떠나겠다지 뭔가?”
“그래서요?”
“가라고 그랬지. 자기는 그 조선인 관료를 포섭하려고 그랬다는데, 누가 그걸 믿나? 자기 사상에 충실하라고 격려하면서 가라고 그랬네.”
그의 눈빛에는 어떤 조롱도 담겨 있지 않았다. K는 그것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가 자신을 얼마나 비웃고 있을지 줄곧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정말 모르겠어요.”
K가 갑작스럽게 말을 꺼냈다. 최모가 그의 째진 눈으로 K를 바라봤다.
“솔직히 이게 다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산다고 뭐가 달라집니까? 누가 알아주나요? 정말 조선이 독립합니까? 그렇게 독립하고 나면, 그 나라가 조선보다 나은 나라가 됩니까? 더 빌어먹을 나라가 나오는 건 아닐까요? 지금의 제국 식민지보다 낫다는 보장은 있습니까? 그냥 체념하고, 이 현실 안에서 만족하고 살면 안 됩니까? 솔직히 이렇게 사는 게 좋습니까?”
최모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K는 취기가 더 오르는 것 같았다. 가슴속에 응어리진 것들이 뜨겁게 달아올라, 그는 그것을 뱉어내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고 느꼈다. 그래서 울분을 토해냈다.
“글쎄.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군. 그럴지도 모르지. 미래의 일을 누가 확신할 수 있겠나? 다만, 이다음이 지옥이라고 해서, 당장의 지옥을, 지금의 불의를, 못 본 척하고 싶지 않을 뿐이네.”
그렇게 말을 한 후 최모는 담배 연기를 뱉어내며 K에게 물었다.
“그래서, 자네는 어디로 가고 싶은가?”
K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은 대답할 수가 없었다. 과연 그는 어디로 가고 싶은 것인가? 이럴 때 신모처럼 둘러댈 말이라도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에게는 사상이 없었다. 조국 독립이란 사상이 그가 가진 유일한 것이었지만, 그것은 수학의 진리 체계만큼 추상적인 것이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구체적인 삶이었다. 피부로 느끼고, 혀로 맛보고, 코로 냄새 맡을 수 있는 삶을 원했다. 그러나 그에게 그 모든 감각이 고통으로 다가올 뿐이었다. K는 현자(賢者)가 될 수 없었다. 현자가 아니라면 도대체 이 투쟁을 무슨 수로 견뎌낼 수 있는 것일까? K는 그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이만 들어가서 쉬게. 술도 많이 마신 것 같은데…….”
최모는 그렇게 말을 하며 담배꽁초를 바닥에 던지고, 발로 비벼 불을 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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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월모일(某月某日). 그 중국요리점에서 J는 K에게 낡은 노트를 하나 내밀었다. 거기에는 수기(手記)가 담겨 있었다. 아주 잘 정돈된 글씨를 보고 있는 K에게 J는 백범 선생의 연설을 메모하고, 나중에 정서한 것이라고 대답했다. 한인들이 모인 어느 자리였다고 했다. J는 K가 무역업 종사자가 아니라는 것을, 보통은 세탁소에서 일하며, 세탁소에 나오지 않을 때는 뭔가 다른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제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인천에서 꽤 알아주는 지주였습니다. 일본인들이 조선에 들어와 잃은 것도 많았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버텨서 제가 출세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죠. 차별을 받기는 했지만 학교에 다녔고, 일본으로 유학도 다녀왔습니다. 짧기는 하지만 독일에도 가본 적이 있어요.”
그는 이미 마음의 준비를 마친 상태로 보였다. 외무부 신모의 진의가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J는 그를 통해 대한민국 정부와 연결이 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는 K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K가 더 알게 된 사실은 J 역시 고급스러운 술집을 그리 자주 드나들 정도로 풍족한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K가 J를 주시했듯 J도 K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는 월급의 상당 부분을 K를 만나고, K를 포섭하기 위해 썼다. 물론 그 ‘포섭’은 K가 상상한 포섭과는 많이 달랐지만.
최모를 골목에서 만난 다음 날, 그러니까 중국요리점에서 J를 만난 다음 날 아침, K는 큰 숙취를 느끼며 잠에서 깼다. 멍한 상태로 일어나 어제를 떠올려 봤지만, 그의 머리는 뒤죽박죽이었다. 다만 J가 그에게 했던 말 하나가 또렷이 기억났다.
“그동안 어디로 가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저 부모님이 하라고 하는 것만 하고 살았어요. 집안을 위해서, 그리고 형제들을 위해서, 제가 출세하고 더 높은 자리로 가야 한다는 말만 들으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이젠 제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것 같아요. 제 모든 것을 걸고라도, 조선 독립을 위해 싸우고 싶습니다.”
K는 방 안을 둘러봤다. 책상 의자 위에 아무렇게나 걸려 있는 코트를 바라봤다. 주머니 안에는 나이프가 한 자루 들어있다. 짧기는 하지만 단숨에 한 사람의 목숨을 가져갈 수 있는 무기다. 권총은 어디에 놓았더라? 아마 침대 밑 다리 쪽에 총알을 빼놓고 숨겨놓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총알은 어디에?
여러 가지를 생각하는 동안 한기가 그의 몸을 덮쳤다. 그는 내복 차림이었다. K는 간단하게 세수를 하고 옷을 챙겨 입었다. 그리고 세탁소로 가는 길에 국숫집에 들러 요기를 했다.
아직 시간은 있었다. 가는 길에 부두에 들러 담배를 입에 물었다.
‘어디로 간다?’
그는 혼잣말을 했다. 그 소리는 담배 연기에 묻혀 금세 사라졌다. 갑자기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크지는 않지만 발작적인 웃음이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딱히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세탁소에 들러서 오전 업무를 보고, 그는 내무부로 가서 최모를 찾을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K가 사귄 ‘새 친구’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아마도 최모는 경계하겠지만, K의 새 친구에게 호기심을 가질 것이 분명하다. 어려울 때 사귀는 친구만큼 소중한 것은 없을 테니까…….
K는 담배꽁초를 바다에 버리고 발걸음을 돌렸다.
- 끝 -
2024년 9월
소설 메모: 혹시나 오해를 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 메모를 남긴다. 이 글 안에 독립운동에 대한 어떤 비난이나 조롱도 담겨 있지 않다. 극한의 상황에서도 그러한 활동을 한 사람들에 대한 경의만이 내가 가진 감정이다. 이 소설은 그 극한의 상황 속에서 범인이라면 느꼈을 법한 불안이나 혼란을 담아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