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설에서 가져온 짐이라고는 사진 한 장과 낡은 공책뿐이었다. 여자애라면 가지고 있을 법한 곰 인형 하나도 없었다. 사진에는 마리와 어떤 젊은 여성의 모습이 있었다. 여성은 마리의 어머니로, 마리는 3년 전 즈음 처음으로 그녀를 보았다고 했다. 머리를 정갈하게 묶어 정리한 마리의 어머니는 아무런 표정 없이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설에서는 가끔 이런 식으로 아이가 부모를 만날 수 있게 해 주고, 그것을 사진으로 남기고는 했다. 하프-클론의 인권도 충분히 챙기고 있음을 홍보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마리는 그날 이후 어머니를 만난 적이 없다고 했다. 마리의 어머니는 따뜻한 스웨터를 입고 있지만, 사진에서는 아무런 온도도 느껴지지 않는다. 마리는 수용 시설 아이들이 입는 남색의 옷을 입고 있었다. 단조로운 디자인의 원피스였다. 그녀 역시 이렇다 할 표정은 짓고 있지 않았다.
시설에서는 ‘위탁’이란 이름으로 마리가 탱크의 집에 머무는 것을 허가해 주었다. 주기적으로 시설을 찾아 관리를 받아야 하지만, 훈육을 탱크의 가정에서 맡는다는 전제 하에 외부에 머무는 것을 허락한 것이었다. 이런 경우가 흔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다. 클론 부모 쪽은 그럴 형편이 못 되었고 그럴 필요도 못 느꼈다. 대부분의 인간 부모 쪽도 아이를 찾아가려 하지 않았다.
하프-클론의 수용 시설은 조화로운 지하 도시에서 그 아이들의 존재를 지우는 역할을 한다. 외곽에 아이들을 모아두고 일반 시민들의 눈에 띄지 않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하프-클론은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로 살아간다. 나이가 들어 일자리를 구하기 쉽지 않고 사회 안에 자리를 잡기도 어렵다. 보통은 범죄자로 전락하거나 뒷골목을 전전하며 살아가게 된다. 마음이 여린 사람들은 하프-클론 아이를 입양하기도 하지만 그런 경우는 흔하지 않다. 하프-클론은 이 체제를 위협하는 징후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을 혐오하고 철저하게 차별했다.
크게 하품을 하며 방에서 나온 민수는 깜짝 놀라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마리는 복도에서 창으로 바깥 풍경을 보고 있었다.
“뭐가 있어?”
민수는 서둘러 손가락으로 눈곱을 떼며 마리에게 물었다.
“그냥, 저기 나무에 새가 앉아 있어서…….”
마리는 나뭇가지 위 붉은머리오목눈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작고 동그란 몸을 가진 새는 잠시 마당의 나뭇가지에 앉아있다가, 마리의 시선을 느꼈는지 날아가버렸다. 민수는 마리의 시선을 쫓아갔으나 ‘저게 뭐가 신기한 거지’라는 눈빛으로 고개를 갸우뚱할 뿐이었다. 민수의 시선을 느꼈는지 마리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마당에 나무가 있는 집은 처음 봤어. 수용소에 있을 때는 방에 있는 창문이 다 막혀 있었거든. 골목에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고…….”
마리는 아이보리 색의 원피스 잠옷을 입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언제나처럼 푸석해 보였으나, 하연이 자주 빗겨주는지 전보다는 차분해진 느낌이었다. 민수는 그제야 자신의 잠옷 차림이 민망했는지 얼른 자리를 피했다. 그는 화장실에 가는 길이었다.
민수는 화장실에 들어가 소변을 보고, 거울을 보며 뻗친 머리를 정리했다.
가족이 모두 모여 식사를 하는 자리. 잠옷 위에 넉넉한 카디건을 입고 부엌으로 온 민수와 달리, 마리는 그새 몸단장을 마치고 내려왔다. 그녀는 하연이 사 온 옷을 입고 있었다. 마리는 흰색의 얇은 긴팔 티셔츠를 안에 입고, 겉에는 긴 청치마를 덧대어 입었다. 끈으로 머리를 묶어 차분한 느낌이었다. 민수는 그녀를 힐끔 쳐다보다가 눈이 마주치자 앞에 놓인 시리얼 통을 들어 그릇에 털어 넣었다.
식사를 마치고 탱크는 서둘러 부대로 출근을 했고, 민수는 10분 만에 세수와 양치질을 대충 하고는 학교로 갔다. 화이트 부부(린과 료마)는 삼십 분쯤 뒤에 함께 나갔다. 린은 요즘 필라테스를 배우고 있다. 몸이 유연한지 적성에 맞았고, 열심히 배우면 료마처럼 강사로 일자리를 구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집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는 상업 지구로 향했다.
집에는 하연과 클라라, 그리고 마리가 남았다. 그럴 때면 마리는 하연에게 “전 뭘 하면 되나요?”라고 묻고는 했다. 하연은 마리가 민수처럼 학교에 나가기를 바랐지만, 이 도시에서는 말도 되지 않는 일이었다. 하프-클론을 받아주는 학교는 없다. 그들이 받을 수 있는 교육은 수용 시설에서 받는 것뿐인데, 영어와 기초적인 산수가 전부였다. 마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물어볼 때면 하연은 “그냥 너 하고 싶은 거 하면 돼.”라고 대답했지만 아이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알지 못하는 눈치였다.
클라라가 좀처럼 쉬지 않고 집 이곳저곳을 헤집고 다니는 동안, 하연은 자신이 직접 마리에게 선생님이 되어주면 어떨까 생각하고는, 민수의 방에 있는 책을 몇 권 들고 왔다. 하연 역시 어린 시절부터 홀로 살아 배움이 길지 않았으나, 한반도를 떠난 이후로는 이런저런 것들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민수보다도 배움이 모자랄지 모르지만, 그녀는 마리와 함께 공부하면 될 것이라 생각하며 거실의 테이블 위에 책을 올려두었다. 민수가 집에 돌아오면 마리의 공부를 봐달라고 하면 될 테니까. 그리고 닉도 언제든 부를 수 있으니까 말이다.
하연이 수학책을 펼치자 마리는 별로 내켜하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공부 같은 건 별로 해본 적이 없으니 책 보는 습관이 들지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이 집에 계속 머물고 싶은 마리는 착한 딸처럼 하연이 하라는 대로 하고, 하연이 가르쳐주는 것들을 공책에 적었다. 처음에는 싫어하는 눈치였으나 그녀가 문제를 하나씩 풀 때마다 하연이 칭찬을 해주니, 마리도 그것이 싫지 않은 모양이었다. 일단 그녀에게 이처럼 인내심을 가지고 누군가 관심을 가져준 적은 없었다. 교실 안에 50명도 더 되는 아이들을 아무렇게나 집어넣고, 칠판에 적힌 것들을 무조건 따라 쓰게 한 다음, 숙지하지 못한 아이들에게는 매질을 가하는 것. 그것이 지금 시대에 하프-클론들이 받는 교육이다. 1 대 1의 교육 같은 건 상상할 수도 없다.
“오후에 민수가 돌아오니까, 그때 좀 더 자세히 알려달라고 그러자.”
하연의 영어는 발음이 조금 어색했으나 의사소통은 충분한 수준이었다. 하연의 말에 마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민스요?”
“음……. 찰스. 찰스의 한국어 이름이 민수야.”
“아……. 민스.”
“민. 수.”
“아, 민수……. 이상한 이름이네? 근데 걔가 공부를 잘해요? 그렇게 안 보이는데…….”
새초롬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는 마리가 귀여워 하연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렇게 안 보여도 의외로 머리가 좋아.”
마리는 못 믿겠다는 눈치였다. 그녀는 이번에는 영작 교재를 보며, 예문을 따라 쓰고 있었다. 마리는 말을 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지만 맞춤법은 매우 서툴렀다.
1시간 정도 공부를 하다가 마리는 힘이 드는지 몸을 이리저리 꼬기 시작했다. 그것을 눈치챈 하연은 책들을 덮으며 마리에게 잠깐 쉬자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마리는 바닥에서 벌떡 일어나 소파로 몸을 던지더니, 허공에 이렇게 말했다.
“닉. 나 TV 틀어줘.”
아이들은 뭐든 빠르게 배운다. 내 존재를 듣게 되었을 때 마리는 뭐 그럴 수도 있지,라는 표정을 짓고는 빠르게 나를 활용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여자아이들이 좋아할 법한, 예쁜 여자애들이 나오는 만화나 드라마를 열심히 봤다. 전에는 한 번도 생각조차 못했을 법한 평범한 소녀의 삶을, 마리는 동경의 눈빛으로 바라보며 그 모든 것을 스펀지처럼 흡수했다. 화면에는 알록달록 예쁘게 차려입은 여자아이들이 어디론가 우르르 몰려가고 있었다. 마리는 그 모습을 넋을 잃은 채 바라보고 있다.
하연은 TV 속 소녀들보다 마리의 그런 모습이 더 예쁜지 한껏 미소를 지으며, 테이블 위에 널브러진 책들을 챙겨 부엌으로 향했다. 하연은 부엌에서 마리의 간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마리가 한창 TV를 보고 있을 때 클라라는 무슨 일이 그렇게 많은지 거실을 수차례 지나다녔지만, 마리는 그런 클라라를 아랑곳하지 않고 홀린 눈으로 화면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