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 동안 방에 갇혀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니 민수는 졸음이 쏟아졌다. 그는 안경 빼고 모든 소지품을 뺏겼다. 고글로 확인하니 어느새 시간은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는 졸음을 쫓아내려 머리를 흔들었다.
졸음으로 꾸벅꾸벅 머리를 떨구고 있을 때 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별소리가 아닌 듯싶었으나, 조금씩 소리가 커졌고 사람의 고함 소리도 들렸다. 우다탕당. 물건 떨어지는 소리, 사람의 비명 소리. 갑자기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그 소리에 여자아이도 놀라 잠에서 깼다. 민수도 소란에 졸음을 떨쳐내고 문을 주시했다. 방에는 밖을 볼 수 있는 창문이 전혀 없었다. 철제 문과 회색의 시멘트 벽 말고는 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다. 밖에서 다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무슨 소리지?”
민수가 중얼거렸으나 여자아이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잠시 후 밖의 소음이 사리지고 건물 안은 다시 고요해졌다. 갑자기 철그렁 소리가 나며 두 사람이 있는 방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는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는데, 민수의 눈에 보인 것은 탱크의 얼굴이었다.
“어? 형? 아니……. 아빠?”
민수는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얼른 나와. 이리로…….”
탱크가 밖으로 나오라는 손짓을 했다. 두 사람이 밖으로 나와보니, 방 밖의 흙바닥에는 여섯 명 정도 되는 남자들이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낮에 본 흑인 남자 맥과 다른 덩치들이 한쪽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민수의 물음에 탱크는 “조금 있다가 경찰이 올 거니까, 여기서 조금만 기다리자.”라고 말했다. 정말로 1~2분 후 경찰들이 건물에 나타났다. 그들은 건물의 육중한 철문을 발로 차서 열고는, 총을 조준하며 안으로 허겁지겁 들어왔다. 하지만 아무런 저항은 없었다. 그저 건물 가운데 쓰러져 있는 남자들, 한편에 무릎을 꿇고 있는 이들이 보일 뿐이었다. 책임자가 탱크의 곁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혹시 신고하신 분인가요? 프랭크 최?”
“네.”
“그런데 왜 여기에…….”
“오시는 데 시간이 걸릴 것 같아서, 미리 와서 손을 좀 봐두었습니다.”
“네…….”
콧수염이 인상적인 중년 경찰은 주위를 둘러봤다.
“이 아이들이 납치되었다는 그 아이들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한 사람은 아드님이고, 이 여자아이는…….”
경찰은 여자아이의 허름한 행색을 보고는 의아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들의 친구인데, 이 아이가 끌려가는 걸 보고 막으려다가 이렇게 된 것 같네요.”
“아, 네…….”
경찰은 일단 모두 함께 경찰서로 간 다음, 조사를 받고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부하들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남자들을 일으켜 수갑을 채웠다. 무릎을 꿇고 있는 ‘맥’이라는 남자와 다른 덩치들에게도 수갑이 채워졌다. 뽀글 머리 맥이 탱크의 옆을 지나갈 때, 탱크는 그를 잠시 멈춰 세우고는 귓속말을 했다.
“내 가족에게 손가락 하나라도 대면, 목을 직각으로 꺾어서 세상을 세로로 보게 만들어줄게.”
쌍코피를 흘리고 있는 흑인은 경기를 일으키며 경찰에게 끌려갔다.
민수에 대한 조사는 금방 끝났다. 아이가 영주권자인 프랭크와 레베카 부부에게 입양된 아이라는 것이 확인되자 경찰은 아이를 데리고 돌아가도 좋다는 말을 했다. 하지만 경찰은 여자아이에 대해서 의외의 말을 했다.
“이 아이는 아무래도 원래 있던 시설로 돌려보내야 할 것 같습니다.”
경찰의 말에 따르면 아이의 이름은 마리(Marie)로 민수와 동갑인 10살이다. 그가 말하는 시설이란 인간과 클론 사이에서 태어난 하프-클론을 수용하는 곳이다. 마리는 수개월 전 그곳을 탈출해 뒷골목을 전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두 손을 무릎 위에 모은 채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 시설이란 게 어디에 있는 겁니까?”
탱크의 물음에 그들을 조사하는 젊은 남자 경찰관은 캘리포니아 시티 외곽에 있다고 대답했다.
“넓은 숲이 있는 곳인데 아이들이 생활하기에는 쾌적한 곳입니다.”
그는 활짝 미소를 지었다. 마치 그곳이야말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곳이라도 되는 듯. 그의 말에 땅만 쳐다보고 있던 마리는 조그만 목소리로 읊조렸다.
“난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그 말을 들은 경찰관은 소녀를 달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까지 네가 있던 곳보다 훨씬 좋은 곳이잖니? 그곳에 가면 친절한 선생님들이 있고, 맛있는 밥도 먹을 수 있고, 깨끗한 물로 씻을 수도 있는데, 왜 그런 곳에 가기 싫다는 거니?”
경찰의 질문에 아이는 답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민수는 탱크에게 작은 목소리로 마리를 집에 데려가면 안 되냐고 물었다.
“저기, 경찰관님. 일단 아이를 저희 집에 데려가서 재우고, 그다음 일을 생각해 보면 안 될까요? 먼저 아이 마음을 진정시킨 다음에 뭘 하더라도……”
경찰관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아, 그게 절차라는 게 있어서 말이죠.”
“그러면 일단 하루만 늦게 절차를 진행시키는 것도…….”
그때 경찰서 현관의 자동문이 열리며 하연과 린, 료마가 안으로 들어왔다. 하연과 린은 민수의 모습을 보자마자 아이에게 달려가, 어디 다친 곳은 없는지 물었다. 료마가 탱크에게 어떻게 된 것인지 물었고 탱크는 자초지종을 그에게 설명했다.
젊은 경찰관은 결국 서장에게 가서 의견을 구했고, 서장은 탱크에게 와서 이렇게 말했다.
“오늘은 일단 아이를 댁에 데려가서 재우시죠. 내일 시설 쪽 사람이 방문해서 이야기를 할 겁니다. 아무래도 시설로 돌아가게 될 것 같기는 한데…….”
그렇게 마리는 탱크의 가족과 함께 집으로 가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가서 하연은 클라라에게 2층에 마리가 잘 곳을 마련해 달라고 했다. 그렇게 부탁하고 하연은 마리를 2층의 욕실로 데려갔다. 하연은 품에 아이 잠옷(민수의 것이다)과 수건을 들고 있었다.
“여기가 욕실인데, 자, 이건 잠옷이랑 수건. 속옷이 없는데 어쩌지…….”
하연의 말에 마리는 그녀가 건네준 잠옷과 수건을 받아 품에 안았다.
“일단 씻고 있으면 내가 찾아다가 줄게.”
아이는 말이 없었다. 하연이 무릎을 꿇고 앉으며 아이와 눈을 맞췄다.
“우리 같이 씻을까? 나도 아직 샤워를 못 했거든. 들어가 있으면, 내가 속옷이랑 챙겨서 올라올게.”
여전히 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연은 그런 아이의 머리를 손으로 빗겨,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혹시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머뭇거리다가 하연의 눈을 보며 말했다.
“난 그곳에 가고 싶지 않아요. 그곳에서 사람들은 우리를 짐승처럼 취급하거든요. 때리거나 학대하는 건 아니지만, 가둬놓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해요. 짐승 우리에 있는 기분이에요. 그리고 자꾸 식사 시간만 되면 약을 먹여요. 그걸 먹고 나면 정신이 몽롱해서 아무것도 못 하고요.”
아이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숨을 고르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그곳으로 갈 바에는, 제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마리의 말을 들은 하연은 아이를 끌어안았다.
“그래. 아줌마랑 아저씨가 방법을 찾아볼게. 마리라고 했지? 그래, 그곳에 가지 말고 마리는 우리랑 같이 여기서 살자.”
마리는 작고 가녀린 손을 하연의 등 뒤로 가져가 그녀를 껴안았다.
두 사람은 함께 욕실에 들어가 목욕을 하고, 클라라가 마련해 준 침실로 들어갔다. 원래는 비어있는 방이었는데, 클라라가 얼른 침대 시트를 씌우고 이불을 가져다 놓았다. 두 사람은 함께 침대에 누웠다. 하연이 마리에게 이불을 덮어주자 아이는 이불을 코 위까지 끌어당겨 덮고 이불 냄새를 맡았다. 이불에서는 좋은 향기가 났다.
마리는 여전히 불안한 눈빛을 하고 있었지만, 늦은 밤, 아이의 눈에 슬슬 졸음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하연이 아이를 지켜보며 어깨를 토닥이자 조금 뒤 아이는 눈을 감으며 잠이 들었다. 아이의 숨소리는 이내 편안해졌고, 마리가 잠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연도 깊이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