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는 잠시 숨을 고른 뒤, 그녀의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골목길이 복잡해서 처음에는 방향을 잡기 어려웠지만, 광명에서 오랫동안 비좁은 골목을 제집처럼 드나들던 그였다. 그때의 감각이 살아나며 민수는 훈련받은 생쥐처럼 미로 같은 골목을 벗어나, 빠르게 소녀의 집으로 향했다.
민수가 그녀의 집 앞에 도착했을 때, 여자애는 다른 누군가와 함께 있었다. 민수는 집이 보이는 골목 속 어둠으로 숨어 그들을 지켜봤다. 고글을 쓰고 배율을 조정해 상황을 자세히 지켜봤다.
“벌써 며칠째야, 또 빈손이야?”
여자아이의 앞에는 몸이 날렵해 보이는 남자가 하나 있었다. 그는 손바닥으로 여자애의 뺨을 세차게 때렸다. 그 충격에 소녀는 바닥에 손을 짚으며 쓰러졌다. 그녀의 머리를 묶고 있던 고무줄이 헐거워져 안 그래도 부산스러운 머리카락이 더 헝클어졌다.
“어제는 잡동사니만 들고오더니 오늘은 아예 빈손이야? 정신 안 차릴래? 밥값을 해야 널 데리고 있든가 하지. 차라리 너, 그냥 시설로 돌아갈래?”
남자의 말에 여자애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지금 나가서 돈 될 만한 거 가져올게. 요 며칠 운이 안 좋아서 그랬어. 정신 차리고 이번에는 제대로 한 건 해올게. 그러니까, 제발 여기에 계속 있게만 해줘.”
여자애는 울듯한 목소리로 남자에게 호소했다.
“아냐. 안 되겠다. 요새 널 너무 풀어놓았던 것 같아. 다른 애들도 내가 널 너무 오냐오냐 한다고 그러더라. 너 자꾸 이러면 나도 곤란해져. 요즘 맥이 널 아주 못마땅해한다고.”
남자는 입고 있던 가죽점퍼를 벗어 옆에 쌓여있는 고무타이어 위로 던졌다. 그는 입에 담배를 하나 물고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남자는 담배를 입에 물고 주변을 둘러보며 뭔가를 찾았다. 그때 남자와 같이 있던 뚱뚱한 히스패닉 남자가 근처 철망에 세워져 있던 각목을 들고 그에게 다가왔다. 배가 불룩하고 덩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이건 안 돼. 잘못 때리면 머리 터져.”
그는 문득 뭔가 생각이 났는지 바지에 묶여 있던 허리띠를 풀었다. 그리고 오른손에 허리띠를 둘둘 말았다.
“이게 좋겠네.”
그는 히죽거리며 웃었고, 뚱뚱한 남자도 같이 웃었다. 여자아이는 그 앞에서 저항할 생각도 없이 그대로 주저앉아 있었다. 남자가 허리띠를 만지작거리며 여자아이 앞에 섰다.
그때 민수가 앞으로 달려 나갔다. 나는 민수의 이어폰에 대고 “어쩌려고 그래?”라고 말하며 다급하게 그를 말리려 했으나, 손이 없는 내가 그를 무슨 수로 말리겠는가? 민수는 어느새 배낭에서 수제 테이저 건을 꺼내어 두 사람을 겨누었다. 민수가 총손잡이에 있는 버튼을 조작하자, 고글에는 두 개의 표적이 나타났다. 여자애를 때린 백인 남자와 배가 나온 히스패닉 남자. 테이저 건은 두 사람을 표적으로 고정했다.
“뭐야, 저 녀석은? 손에 든 건 뭐지? 장난감 총인가?”
민수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여자아이는 뒤를 돌아봤다. 그 순간 민수는 방아쇠를 당겼고, 총에서 두 개의 집개 같은 물건이 연속으로 발사됐다. 그리고 작은 집개가 두 사람에게 달라붙었다. 집개가 두 사람의 몸에 달라붙자, 둘은 경기를 일으키며 바닥에 쓰러졌다. 테이저 탄환은 두 사람의 허벅지에 달라붙었고, 강한 전기를 발생시키며 그들을 기절시켰다. 그들은 땅바닥에 쓰러져서도 계속 경련을 일으켰다.
민수가 여자애의 손을 잡고 그녀를 일으켰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빛이 보이는 곳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민수야. 저 사람들 죽는 거 아냐? 아까 보니 게거품을 물고 쓰러져 있던데?”
내 말에 민수는 “괜찮아. 내가 다 조절해 놔서 죽진 않아.”라고 대답했다. 그 말을 하면서도 민수는 쉬지 않고 달렸고, 손을 잡힌 소녀도 그를 따라 계속 달렸다. 두 사람은 백화점이 있는 번화가를 지나, 한참을 더 달렸고, 어느 다리에 이르렀다.
“잠깐만. 이제는 못 뛰겠어. 나 숨 좀 돌릴래.”
여자아이가 민수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그녀는 숨을 몰아쉬었다. 조금 있다가 호흡이 안정되자 여자아이가 민수를 쏘아붙이며 말했다.
“어쩌자고 그런 짓을 한 거야?”
“아니, 나는, 그 사람이 너를 때리려고 하니까…….”
여자아이는 화가 잔뜩 난 표정으로 민수를 노려봤다. 그녀는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민수를 지나쳐 걸어갔다. 민수가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5분 정도를 걷다가 여자아이는 강가의 어느 벤치에 앉았다. 민수가 쭈뼛쭈뼛 그녀의 근처로 다가갔다. 소녀는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강물은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고, 지하 도시의 인공조명은 오후의 햇볕처럼 부드러운 빛을 내보내고 있었다. 길가에 세워진 나무들은 5월의 인공 태양광을 받으며 광합성을 하고 있었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물론 그것은 자연의 바람이 아니었다. 도시 어디엔가 있는 공조 시스템이 만들어내는 바람이었다.
소녀는 한참이나 벤치 위에 다리를 모으고 쭈그려 앉아 강물을 바라봤다. 민수는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옆자리에 앉았다. 여자아이는 검은색 긴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발 쪽이 해져 군데군데 끈처럼 실밥이 흘러나와 있었다. 남색의 얇은 바람막이 안에는 검은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여자아이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고무끈으로 다시 동여맸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어차피 난 돌아가야 돼. 미안하지만, 네 태블릿은 나한테 없어. 아마 아까 그 사람들이 이미 팔아넘겼을 거야.”
소녀는 그렇게 말을 하며 왔던 길을 되돌아가려고 했다. 민수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가면 또 맞을 텐데, 뭐 하러 가?”
“그럼 어디로 가라고? 거기가 내 집인데?”
“그래도……. 차라리 다른 데로 도망가서 지내면 되잖아? 굳이 거기로 가야 할 이유가 뭐야?”
여자아이는 민수를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너 같은 샌님이 뭘 알겠어? 난 돌아갈 거니까, 넌 집으로 돌아가. 엄마가 걱정하시겠다. 괜히 여기 있다가 아까 그 사람들한테 잡혀 가지 말고. 너 같은 애랑은 안 어울리는 데니까,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마.”
햇볕을 받은 여자아이의 얼굴은 무척 희었다. 주근깨가 난 코 안으로 아까 맞았을 때 난 것인지, 눌어붙은 피가 조금 보였다. 결국 소녀는 왔던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민수도 그녀의 뒤를 따라 걸었다.
하지만 몇 걸음 못 가고 여자아이는 멈춰 섰다. 그녀는 뜻하지 않은 사람을 본 듯, 앞을 막아선 남자를 보며 겁에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맥…….”
그녀의 앞에는 흑인 남자가 한 명 서 있었다. 보통 체구의 남자는 전체적으로 둥근 모양의 곱슬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남자의 한쪽 눈동자는 하얗게 번져 있었고, 나머지 오른쪽 눈으로 여자아이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새로 사귄 친구인가?”
그는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의 옆에는 덩치가 큰 남자가 세 명 서 있었다. 그리고 민수의 등 뒤로 두 명의 남자가 다가오며 민수와 여자아이를 둘러쌌다.
“도망가려던 게 아니에요.”
소녀는 다급한 목소리로 변명했다.
“그래. 도망가봐야 네가 갈 곳이 어디 있겠어? 이만 돌아가자. 저 꼬마도 함께 가지. 좀 타일러둘 필요가 있을 것 같은데…….”
남자의 말에 민수의 뒤에 있던 남자가 그의 목덜미를 잡았다. 민수는 뿌리치려고 했으나 힘이 워낙 강해 저항할 수 없었다.
여자아이와 민수는 남자를 따라, 그들이 도망쳐온 집으로 다시 돌아왔다. 두 사람은 허름한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몇 개의 방을 지나고, 큰 공간을 지난 다음, 어느 방에 갇혔다. 집 밖에서 볼 때는 몰랐는데 들어와 보니 굉장히 큰 공간이었다. 뒷골목 불량배들의 아지트였다. 마구 지어놓은 곳 같았지만, 원래는 콘크리트 건물이었던 것 같다. 부서진 곳을 이리저리 덧대여 놓았기 때문에 밖에서 볼 때 허름해 보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얼른 돌아가라고 했잖아.”
여자아이는 바닥에 다리를 모으고 앉아 퉁명스럽게 말했다.
“저 사람들은 누구야?”
민수의 물음에 소녀는 “글쎄……. 가족이라고 할까?”라고 대답했다. 그렇게 말하며 소녀는 먼지가 가득한 바닥에 누웠다.
“그냥 아까 몇 대 맞고 끝내는 게 나았을 텐데…….”
소녀는 혼잣말을 했다. 어쩌면 원망이 담긴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민수는 그저 맞고 있는 그녀가 안쓰러워 도운 것이었는데 뭔가 일이 많이 틀어졌다. 민수는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이러려던 게 아니었는데……. 운수 사나운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