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골목은 정숙한 시민이 갈 만한 공간은 아니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기 마련이기에, 아무리 아름다운 도시라고 해도 어두운 골목이 존재한다. 민수는 숨을 헐떡거리며 골목으로 들어섰다. 여자아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쬐끄만 게 빠르기도 하네.”
갈색 머리가 지저분하게 헝클어진 아이였다. 얼굴에 주근깨도 있었다. 키는 민수보다 조금 작았지만 비슷했다. 잘 먹지 못하는지 깡마른 소녀였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거리의 가게들을 돌아보고 있던 민수는, 그를 지나쳐가는 소녀를 보았다. 그가 좋아하는 집 근처 게임샵으로 들어가려 할 때였다. 쇼윈도 앞에서 잠깐 게임 포스터를 보고 있는 그를 한 소녀가 스쳐 지나갔다.
주머니에는 엣지 태블릿(Edge Tablet)이 들어 있었다. 겉보기에는 손바닥만 한 투명한 유리. 실제로는 전자 디바이스다. 현금을 들고 다니는 사람이 없는 시대이기에, 소매치기들은 사람들의 주머니에 있는 전자 장치를 훔쳐간다. 그 잠깐 사이, 민수의 점퍼 주머니 아래에 기다란 칼자국이 나 있었다.
광명에 있을 때는 그도 수없이 해본 일이었다. 민수는 손으로 외투의 주머니 자리를 더듬었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그가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한 여자아이가 급하게 뛰어가기 시작했다. 민수는 아이를 뒤쫓았다.
이곳 지리가 익숙한지 아이는 골목 사이를 자유롭게 휘저으며 달렸고, 결국 민수는 그녀를 시야에서 놓치고 말았다.
민수는 가방에서 고글을 꺼냈다. 평범한 뿔테 안경처럼 보이지만 그것을 쓰자 안경 위로 다양한 글씨들이 현시(現示)되었다. 고글은 골목 안에서 움직이는 물체들의 윤곽을 그려주었다. 고양이 한 마리, 바닥에 누워 거의 움직이지 않는 노숙자 한 명. 골목은 조용했다.
“놓친 것 같네.”
내 말에 민수는 바닥에 있는 빈 우유팩을 발로 차며 성질을 냈다.
“산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걸! 어떻게 나한테 이런 짓을 하지? 내가 광명에 있을 때는 하루에도 수십 개씩 주머니를 딴 사람인데?!”
고작 일주일 전에 민수는 태블릿을 깨 먹었다. 가방에 태블릿을 넣어두고 2층의 자기 방을 향해 투포환처럼 던졌다가 태블릿을 반토막 냈다. 탱크는 민수에게 “제발 조심 좀 하라”고 으름장을 놓으며 새 태블릿을 사주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주머니에 넣어 들고 다녔는데 소매치기를 당했다.
“내가 진짜, 반드시 잡아서 혼쭐을 내줄 테다.”
어쩔 수 없이 민수는 발걸음을 돌려 집으로 돌아갔다. 탱크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고민을 하며…….
집에는 클라라 혼자였다. 그녀는 여성 클론으로, 민수의 가족이 지하 캘리포니아 시티에 자리를 잡은 지 이틀 후 집으로 찾아왔다.
“시 당국에서 저를 이곳에 배치하였습니다.”
검은 머리를 반씩 단정하게 빗어 가르마를 만든 가정부는 “더 많은 클론이 필요하다면 시 당국에 신청을 하고 허가를 받아야 합니다.”라고 안내했다. 인형 같은 표정으로 그녀는 집에 온 첫날부터 가사를 도맡아 했다. 하연이 그녀에게 “이런 건 제가 할게요.”라고 말을 해도 그녀는 “제가 이곳에 필요 없다면 반품을 하셔도 됩니다. 그러면 저는 폐기될 겁니다.”라고 살벌한 이야기를 하고는 했다.
“오셨나요?”
클라라가 무표정한 얼굴로 민수를 반겼다. 이럴 때 보면, 피부가 없는 순수 안드로이드가 더 살갑다는 생각도 든다. 클라라가 손을 내밀며 민수의 가방을 받으려고 했다.
“내가 들고 갈게. 아줌마, 배고픈데 뭐 먹을 거 없어?”
“알겠습니다. 씻고 오실 동안 간식을 준비해 두겠습니다.”
실내복으로 갈아입은 후 손을 씻고 부엌으로 내려오니 클라라가 접시에 샌드위치를 담아 민수에게 내주었다. 민수는 식탁에 놓인 컵에 오렌지 주스를 따랐다. 그는 주스를 한 모금 꿀꺽 마신 후 중얼거렸다.
“그 계집애. 잡히기만 해 봐.”
“네? 뭐라고요?”
“아니야, 아줌마. 그냥 혼잣말한 거야.”
“더 필요한 게 있나요?”
“아냐, 없어.”
“그럼 전 다른 집안일을 좀 하겠습니다.”
민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클라라는 부엌을 나가 집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부엌 한쪽에는 클라라가 장을 봐온 것인지 비닐봉지에 담긴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얼마 후, 집으로 사람들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하연은 근처의 백화점으로 민수의 옷과 운동화를 사러 갔었고, 린은 필라테스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두 사람이 온 후 료마(시라카와씨)가 검은색 검도복을 그대로 입고 집으로 왔다. 그는 시내에 있는 검도장에 보조 강사로 일자리를 구했다. 오후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샤워를 하고 돌아온 린은 부엌에서 저녁 준비를 하고 있는 하연을 돕기 시작했다. 클라라도 부엌으로 돌아와 세 여인은 함께 수다를 나누며 요리를 준비했다. 부엌 찬장에 내장된 스피커에서는 내가 선곡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금도 영국 지하도시에서 운영되고 있는 Decca 레코드의 클래식 모음집, Classical Ensemble. 바흐나 핸델 같은 바로크 풍의 음악들이 많이 들어 있어서, 부엌에는 산뜻한 기분이 감돌았다.
“나, 태블릿 잃어버렸어.”
민수가 누구에게라고 할 것도 없이 말을 했다.
“어디서?”
하연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린도 한마디 거들었다.
“산 지 얼마나 됐다고? 그새 또 잃어버렸어? 너 이번에는 그냥 못 넘어갈걸? 탱크 오빠가 널 달까지 던져버릴 수도 있어. 잘하면 워싱턴에서 멈출 수도 있겠다.”
린이 감자를 깎으면서 키득거렸다.
“집에 오다가 뭣 좀 보고 있는데 누가 훔쳐간 거야.”
‘훔쳐갔다’는 말에 하연이 손에 들고 있는 부엌칼을 내려놓고 민수의 근처로 왔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누가? 혹시 어디 다친 건 아니지?”
“그런 건 아냐. 몰래 훔쳐간 거야. 소매치기.”
민수가 식탁에 앉아 수학 문제를 풀며 대답했다.
“소매치기?”
린이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여기도 그런 게 있어? 그런 건 옛날 한반도에서나 있던 일인데?”
“몰라. 넋 놓고 있다가 당했어. 쬐끄만 여자애였는데…….”
“얼굴은 봤어? 예뻐?”
린이 장난스러운 얼굴로 민수를 놀리듯 물었다.
“뭔 소리야? 쫓아가다가 옆모습만 봤어. 지저분하고 못생겼어.”
“우린 널 믿어주겠는데, 글쎄 탱크 오빠도 널 믿을지는 모르겠다.”
린이 그런 소리를 하며 다시 감자 깎기에 집중했다. 민수는 뚱한 표정을 지으며 11인치 태블릿에 표시된 수학문제를 쳐다봤다. 잘 풀리지 않았다. 고등학교 수학 문제였는데, 소매치기 일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아 그러는 것인지, 문제가 어려운 것인지 감이 오지 않았다. 태블릿 펜으로 여백에 몇 자 적다가 다 지우고 다시 쓰기를 반복했다.
료마가 부엌으로 들어왔다. 그는 클라라에게 부자연스러운 영어로 세탁기 호스에서 물 새던 것 고쳐놨다고 말했다. 클라라는 닭고기를 손질하다 무표정한 얼굴로 료마에게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한 시간 후 탱크가 집으로 돌아왔다. 탱크는 소매치기를 당했다는 민수의 말을 역시나 믿지 않았다. 또 어디엔가 흘렸거나 부셔먹었구나,라고 생각했지만 생각을 말로 내뱉지는 않았다. 그저 미간에 잔뜩 주름을 잡고, 절간 입구에 있는, 천왕문을 지키는 사천왕(四天王) 같은 표정으로 민수를 바라볼 뿐이었다. 결국 민수는 짜증을 내면서,
“알았어. 이제 태블릿 안 사줘도 돼. 내가 그 여자애 잡아서 태블릿 찾아올 테니까, 그땐 나한테 사과할 준비나 하고 있어!”
라고 탱크에게 호언장담했다. 그런 모습이 귀여운지 하연과 린은 웃기만 했고, 료마는 평소처럼 묵묵히 접시에 담긴 닭고기를 느린 동작으로 썰어 천천히 맛을 음미했다.
가족은 큰 식탁에 둘러앉아 함께 저녁식사를 했다. 모든 사람이 착석한 후에는 클라라도 식탁 끝자리에 앉았다. 가운데 앉은 탱크 우측으로 하연과 민수가 앉았고, 그 맞은편에 린과 료마 부부가 앉았다. 그리고 민수 옆자리에 클라라가 앉아 조용하게 저녁을 먹었다.
무표정하고 담담한 얼굴로 닭고기를 먹고 있는 클라라.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그녀는 “저는 따로 먹어도 됩니다. 나중에 남는 걸로 대충 영양에 맞게 조리해서 먹겠습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식구들이 매번 함께 먹자고 말해 이제는 자연스럽게 가족들과 함께 식사를 한다. 그녀는 감정 표현을 별로 하지 않지만, 이제는 능숙한 영어로 린이 우스운 이야기를 할 때면 클라라도 농담을 이해하고 가벼운 미소를 짓기도 한다. 클론이라고 해서 완전히 감정이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녀는 미세하게 새어 나오는 감정으로 린의 농담에 웃고, 또 민수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기도 한다. 자신은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지만…….
그들은 전형적인 미국식 가족이었다. 저녁 시간이면 화목하게 한 자리에 모여 담소를 나누며 닭고기나 쇠고기를 먹는다. 영주권 신청을 준비하면서 성을 시라카와(白川)에서 화이트(White)로 바꾼 료마 부부는 언젠가 아이를 입양해 기르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북적북적한 이 자리에 아이가 들어온다면 저녁 시간은 더욱 떠들썩해질 것이다.
이웃들은 프랭크 & 레베카(하연) 부부와 린 & 료마 화이트 부부를 원래부터 이곳에 있어야 할 사람들, 전형적인 미국 시민, 그러니까 지하도시에 사는 것이 당연한 사람들로 여기고 있다. 오랜 시간 집을 비우기는 했지만, 대항해 시대의 모험가처럼 위험을 무릅쓰고 지상을 돌아다니느라 그랬다는 소문이 퍼져 있다. 군에서는 탱크의 연락두절과 장시간의 이탈을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인공지능의 판단에 따라 그는 아무런 징계 없이 군에 복귀했다.
탱크는 캘리포니아 시티 변두리에 있는 부대로 출퇴근하며 생활하고 있다. 작전 장교로 근무하고 있다. 그는 장기간 자리를 비웠음에도 평점이 좋아 조만간 소령으로 진급할 예정이다. 프랭크 최의 나이는 서류상으로 서른 살인데, 그가 노안인 편이라 누구도 어색하게 여기는 사람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