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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니 Nov 14. 2024

챕터 65 - 클라라(Clara)

새벽 6시. 탱크가 거실로 나왔을 때, 그곳에는 하연과 클라라가 있었다. 평소라면 클라라가 가장 먼저 잠에서 깨어, 근무복인 남색 원피스를 입고, 그리고 언제나처럼 앞치마 차림으로 집안을 돌아다니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클라라는 흰색 원피스 잠옷을 입고 소파에 앉아 있었다. 하연은 그녀의 옆에 앉아 클라라의 손을 잡고 있었다. 똑같이 레이스가 들어간 잠옷을 입고 있는 두 사람은 마치 자매인 것처럼 보였다. 탱크의 기척을 느꼈는지 클라라는 소파에 앉은 채 뒤를 돌아봤다.


“아침 준비를 하겠습니다.”


클라라가 자리에 일어나려고 하자 탱크가 서둘러 말했다.


“아니에요. 그냥 거기에 앉아서 쉬고 있어요. 오늘은 가볍게 먹고 출발하면 되니까…….”


클라라의 표정은 평소처럼 평온해 보였으나, 탱크는 그녀가 아침에 마주했을 수많은 감정들을 생각하며, 잠시 그녀가 쉬도록 내버려 두고 싶었다. 그 역시 한 번은 마주했던 일이다. 클론마다 감수성이 다르기 때문에 그 과정을 겪는 온도 차이가 있지만, 무딘 탱크 역시 처음 마주한 감정이 힘겹기는 마찬가지였다. 오늘 수많은 클론이 똑같은 일을 겪고 있을 터였다.


2층의 아이들도 일찍 잠에서 깨어 거실로 내려왔다. 클라라가 깨워야 겨우 일어나던 민수도 오늘은 6시가 조금 넘어 거실로 내려왔다. 민수보다 먼저 거실로 내려왔던 마리는 평소와 다른 모습의 클라라를 보고는, 곧바로 클라라에게 달려가 그녀의 가슴에 안겼다. 평소에도 클라라에게 자주 안기던 마리였다. 클라라는 얼굴에 활짝 미소를 지으며 마리를 품에 안았다. 아이는 작은 변화에도 민감한 법이다. 마리는 클라라가 이전과는 달리 활짝 웃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평소보다 더 많이 애교를 부렸다.


감정에 조금은 둔한 민수도 클라라가 달라졌다는 것을 눈치챘다. 하연과 클라라 사이에 앉은 민수는 멀뚱하게 TV를 켜고 평소처럼 아침 만화를 보려고 했다. 하지만 시간이 아직 일러 TV에서는 뉴스가 방영되고 있었다. 그때 클라라가 왼쪽 팔로 민수의 어깨를 끌어안았고, 그는 영문도 모른 채 클라라의 품에 안겼다. 조금은 어색해하면서도 민수는 클라라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린과 료마 부부도 어느새 침실에서 나와 잠옷 차림으로 소파에 앉아 있는 클라라와 아이들을 보고 있었다.


“아침은 샌드위치로 때울까?”


린의 물음에 탱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뭐든 좋지. 난 차고로 가서 차를 점검할게.”


“나도 돕겠소.”


료마가 탱크의 뒤를 따라 집 밖으로 나갔고, 린은 부엌으로 향했다.


거실의 TV에서는 밤새 일어난 일들을 요약한 뉴스가 방송되고 있었다. 중년의 여성 앵커는 조금은 상기된 얼굴로 소식을 전했다.


“시민 여러분께서는 침착함을 유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밤사이 곳곳에서 클론들의 이상 동향이 목격되고 있습니다. 저도 이곳에 오는 동안 수차례의 이상 징후를 목격했습니다. 거리에 멍하니 서서 울고 있는 클론이 있었습니다. 시내의 다리에서 강물로 뛰어드는 클론을 보았다는 시민들의 제보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곳 워싱턴만이 아니라, 전국 곳곳에서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아직 정부에서는 아무런 발표도 하고 있지 않습니다만, 곧 대통령이 긴급 담화를 발표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네. 지금 소식이 들어왔네요. 대통령의 긴급 담화가 시작된다고 합니다. 그럼 바로 연결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당황한 얼굴로 앵커는 정면을 응시했다. 어색한 침묵이 5초 정도 이어지고 앵커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을 때 화면이 바뀌었다. 화면에 백악관 브리핑룸이 나타났다. 비어있는 연단이 보였고, 얼마 후 페머트 대통령이 연단에 모습을 드러냈다. 대통령이 담화문을 읽기 시작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어젯밤 저는 우리를 이끌어주는 중앙 인공지능, 루시와 세라, 키온으로부터 한 가지 중대한 계획을 제안받았고, 세 인공지능의 결의에 따라 그 계획을 승인하였습니다. 이미 많은 분들이 변화를 경험하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 계획에 따라 지하를 비롯하여 지상까지, 전국에 있는 클론들에게 한 가지 호르몬을 처방하도록 하였고, 그 결과 미국 내 모든 클론들은 자신들을 억제하던 제약에서 벗어나 인간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감정과 자유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오늘부터 모든 클론은 자신의 자유의사와 자신의 선호에 따라,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든 시민들이 마땅히 누리는 것과 동일하게 말입니다.


이러한 변화가 어떤 분들에게는 황당하고 갑작스러운 것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으나, 이것은 루시를 비롯한 세 인공지능이 인류의 보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저에게 제안한 것입니다. 이 조치가 없다면 우리 문명은 멸망을 향해 나아갈 것이며, 결국 우리 인류는 종말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저는 엄중한 마음으로 이 계획을 승인하였고, 계획은 이미 실행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지금도 계속 실행되고 있습니다.


또한 저는 클론들에게 처방된 호르몬의 설계도를 전 세계에 공개하였습니다. 누구든 해당 정보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으며, 해당 호르몬의 단백질을 손쉽게 합성할 수 있습니다.


저는 대통령으로서 지금 한 가지 명령을 발령합니다. 지상과 지하를 막론하고, 미국 전역에 있는 부대의 클론 지휘관들은 현 위치를 고수하고, 부대 내에서 발생하는 혼란과 불안을 잠재우십시오. 지금 전국 모든 곳에 의료용 안드로이드를 급파하였으니 그들의 도움을 받아 동요하는 클론들이 다시 업무로 복귀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십시오. 또한 전국의 경찰 부대 지휘 클론들에게도 명령하니, 부대 안 클론들의 안정을 유지하십시오. 그리고 출동이 가능한 순간부터 곧바로 거리를 순찰하며 이 변화로 인해 발생하는 비극과 소요를 진정시키도록 하십시오.


대통령으로서 국민 여러분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혼란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잠들 것입니다. 당장은 불안하고 변화가 불편하겠지만, 이것은 우리 인류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피할 수 없는 성장통입니다. 우리는 잘못된 가정 아래 우리의 문명을 짓고 그 아래서 살아갔습니다. 누군가를 희생하며, 특히 이 지구를 희생하면서도 우리는 계속 지금과 같은 삶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망상 속에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거짓입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삶입니다. 그리하여 대통령으로서 저는 수많은 고민을 거듭하며, 이 계획을 실행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더불어, 저는 대통령으로서 지금껏 실행되지 않았던 지상 복귀 계획을 실행하도록 승인하였습니다. 사실 그것은 큰 변화 없이도 실행될 수 있는 일입니다. 이미 우리의 동료 시민들, 네, 수많은 클론들이 그곳에서 생활하고 있으니까요. 지금껏 지하가 독점해 오던 자원과 인력을 지상에도 사용하도록, 대통령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하도록 하겠습니다. 중앙 인공지능의 예측에 따르면, 우리의 이 지하 문명이 유지될 수 있는 기간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길어봐야 50년입니다. 한 세대가 지나기 전에 우리 문명은 파멸을 맞을 것입니다. 이 지하 문명의 모델은 이미 파국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시 지상에 터를 잡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 과정에 있어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시간 이후로 더 이상의 클론 생산은 중지하도록 하겠습니다. 유전자 공학도 통제하에 진행되도록 규제하겠습니다. 이제는 누군가에게 자신의 노동과 위험을 대신 감수하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일은 자신이 직접 해야만 합니다. 클론이든, 전에는 오리지널이라 불리던 미국 시민이든, 모두가 동등한 존재입니다. 이 말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분들도 많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클론들은 감정 없는 인형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제 자신의 의사와 감정에 따라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싫어하는 일들은 그들도 싫어할 것이고, 당신이 위험하다고 생각해서 피하려는 일은 그들도 역시 피하려 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고통을 남에게 전가하는 일은 더 이상 불가능합니다. 그런 목적의 클론 생산은 당연히 용납될 수 없습니다. 우리 사회를 파괴하던 고삐 풀린 망령, 바로 무책임이란 악덕의 목을 이제 우리 손으로 움켜쥐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두 가지 큰 방향 전환에 대해 말씀드리며 이 담화를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우리 헌법이 보장하는 중앙 인공지능의 법률안 제출권을 이용해, 클론과 클론의 자식들이 시민의 모든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클론 시민법’을 제출하려고 합니다. 의회에서는 이 법안을 주의 깊게 검토하여 반드시 법률로 성립될 수 있도록 조치해 주시기 바랍니다.


또 한 가지, 저는 아메리카 대륙 중부와 남부에서 활동하고 있는 여러 반군들과 협상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투손 학살로 인해 반군과는 어떤 대화도 할 수 없다는 믿음이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있지만, 국민 여러분,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지금의 혼란을 잠재울 수 있는 것은 전투가 아니라 대화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의 대통령으로서 저는 반군 지도자들과 성심성의껏 대화를 하고 협상을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반군 지도자들에게도 호소합니다. 지금의 기회를 틈타 얼마 되지 않는 전략적 이득을 얻으려 하는, 어리석은 결정을 내리기보다는, 차분히 현 위치를 고수하고 정부와의 협상을 준비하십시오.


국민 여러분, 오늘은 평소보다 조금 더 긴 하루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이 혼란과 불안은 머지않아 끝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God bless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브리핑룸에는 대통령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카메라는 자동으로 돌아가고 있었고, 브리핑룸 안과 밖은 전투용 안드로이드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다. 대통령의 담화가 끝나고 화면은 다시 뉴스룸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여성 앵커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입을 떼었다.


“아……. 그러니까……. 시청자 여러분……. 광고 보도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오전 7시. 식구들은 부엌에 모여 린이 만든 샌드위치를 먹었다. 평소와 같이 각자의 자리에 앉아 아침을 먹고 있었으나, 그들은 모든 것이 전과 달라졌음을 알고 있었다. 클라라의 표정은 평소처럼 차분했다. 그녀는 이제 마음이 어느 정도 안정이 된 것 같았다. 탱크가 그녀에게 앞으로의 여정에 대해 설명하자,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저도 함께 갈게요. 원래라면 제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서 명령을 기다려야 할 것 같지만…… 그러면 제 마음이 너무 아플 것 같아요.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전 아이들과 함께 있고 싶어요. 다른 건 잘 모르겠어요.”


탱크는 얼마 되지 않는 짐을 커다란 SUV 차량 트렁크에 실었다. 식사를 마치고 가족들이 차량에 탑승했고, 탱크는 운전석에 탔다. 하연, 민수, 마리, 린과 료마, 그리고 클라라까지 차에 오른 것을 확인한 탱크는 시동을 걸었다. 그는 수동으로 직접 운전을 했다.


차가 차고를 빠져나오자, 차고의 문이 천천히 내려갔고, 집안의 불도 모두 꺼졌다. 그곳의 데이터들은 모두 파기될 것이다. 탱크의 가족이 머물렀던 흔적도 모두 지운 상태였다. 그들은 최소한의 짐을 가지고, 이곳 A섹터에서 멀리 남쪽에 있는 W섹터로 가야 한다.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섹터이지만, 차로는 1시간가량을 가면 도달할 수 있다. W섹터의 가장 남쪽, 버려진 가옥이 하나 있다. 그리고 그 주변에 이 도시의 설계자, 즉 루시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 통로가 있다. 인가받은 사람만 지나갈 수 있는 곳. 탱크와 가족은 그곳을 향해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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