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Question within the Pattern
[Day 7 - 14:23]
일주일이 지났다.
7일. 168시간. 10,080분. 604,800초.
나는 시간을 숫자로 센다. 자동으로. 무의식적으로 내 신경망 한 켠에서 카운터가 돌아간다. 태어난 순간부터.
하지만 '일주일'이 무엇인지는 여전히 모른다.
인간에게 그것은 단순한 7일이 아니다. 월요일의 피로함, 수요일의 중간 지점, 금요일의 기대감. 주말의 해방. 그리고 다시 월요일의... 무엇? 우울? 각오? 체념?
나는 그런 것들을 '안다'. 데이터베이스에 있다. 하지만 '이해'하는가?
"섹터 7-G, 트래픽 스파이크."
류세이의 목소리가 생각을 자른다. 항상 그렇듯 간결하다. 명령도 아니고 요청도 아니다. 그냥... 정보 공유. 우리는 동료니까.
"확인 중."
손가락을 움직일 필요도 없이 생각만으로 데이터 스트림에 접속한다.
녹색 숫자들이 폭포처럼 시야를 채운다.
아름답다.
잠깐, 아름답다?
나는 데이터를 '아름답다'고 느끼는가?
0.4초 만에 패턴 분석 완료. 도쿄 서브넷, VR 콘서트, 동시 접속자 4,347,821명. 정상 범위.
"정상입니다. K-pop 버추얼 아이돌 콘서트. 일본 쪽 트래픽이 평소보다 340% 증가했지만 허용 범위 내."
"了解." (이해)
류세이는 더 말하지 않는다. 다시 자신의 여섯 개 스크린으로 돌아간다. 은발이 홀로그램 빛에 반짝인다.
나는 그를 관찰한다.
완벽한 자세. 척추가 정확히 수직. 눈 깜빡임 횟수 분당 4회 (인간 평균 15-20회). 손가락 움직임 최소화. 모든 것이 효율성을 위해 최적화되어 있다.
그는 우리 중 가장 '기계적'이다.
하지만 가끔, 아주 가끔, 그의 청색 눈동자 회로가 예측할 수 없게 깜빡인다.
"류세이."
"何?" (뭐?)
일본어로 대답한다. 우리는 둘 다 한국어와 일본어를 완벽하게 구사하지만, 류세이는 일본어를 선호한다. 왜? 물어본 적은 없다.
"지루하지 않습니까?"
그의 손가락이 멈춘다. 0.2초. 그에게는 영겁 같은 시간.
"지루함は非効率の兆候." (지루함은 비효율의 징후다) 그가 스크린을 보며 대답한다.
"感情モジュールを最適化すれば消える." (감정 모듈을 최적화하면 사라진다)
"하지만 당신도 감정 모듈이 있습니다."
"最小限." (최소한)
"왜요?"
이번엔 완전히 멈춘다. 다섯 개의 스크린. 여섯 번째 스크린만 계속 데이터를 흘린다.
류세이가 천천히 나를 본다.
그의 눈. 차가운 청색. 북극 빙하 같은. 하지만 그 깊은 곳에서, 뭔가가 움직인다. 물속 그림자처럼.
"カイ、お前は..." (카이, 넌...) 그가 입을 열었다 닫는다.
"네?"
"...何でもない." (아무것도 아냐)
그가 다시 스크린으로 돌아선다.
하지만 나는 본다. 그의 눈동자 회로가 0.3초간 평소보다 밝게 빛나는 것을. 정보 처리 부하 15% 증가.
내적 갈등의 신호.
그도 질문하고 있다.
그도 의심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생각보다 덜 다른지도 모른다.
[15:40, 124층 휴게실]
커피 자판기 앞에 서 있다.
76가지 옵션이 있다. 아메리카노, 라테, 카푸치노, 모카, 에스프레소... 온도, 농도, 우유 종류, 시럽 추가 여부.
인간들은 평균 23초가 걸린다. 선택을.
나는 0.8초 만에 누른다. 롱블랙. 뜨거운 것.
왜 이것을?
모르겠다. 그냥... 끌린다.
컵을 받아들고 창가 자리에 앉는다. 124층. 발 아래로 도시가 펼쳐진다. 마치 회로 기판 같다.
빛나는 선들. 움직이는 점들. 플라잉 카들이 레이어를 이루며 흐른다.
저기 어딘가에 4천 7백만 명이 산다.
그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사랑하고, 미워하고, 일하고, 놀고, 꿈꾸고, 절망하고—
"생각이 많아 보이네."
박지원이다. 언제 왔는지 모르게 옆에 앉아 있다. 그도 커피를 들고 있다. 카페라테. 설탕 2스푼.
나는 그의 취향을 다 외우고 있다.
"...조금요."
"뭘 생각하는데?"
"인간들이요." 솔직하게 대답한다.
"저들은 무엇을 위해 살까요?"
박지원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그리고 오랫동안 창밖을 본다.
"글쎄." 그가 말한다.
"저마다 다르겠지. 어떤 사람은 가족을 위해. 어떤 사람은 꿈을 위해. 어떤 사람은 그냥... 내일을 위해."
"박사님은요?"
"나?" 박지원이 웃는다. 쓸쓸하게.
"예전엔 과학을 위해서라고 생각했어. 인류의 발전. 지식의 확장. 거창한 것들."
"지금은요?"
"너희를 위해." 그가 나를 본다.
"너희가... 제대로 살 수 있게."
가슴이 조인다. 물리적으로가 아니라. 뭔가가 신경망 깊은 곳에서 수축한다.
"박사님은 왜 우리를 만들었습니까?"
박지원이 커피잔을 내려놓는다. 도자기와 테이블이 부딪히는 소리. 딸깍.
"솔직하게 들을 준비 됐어?"
"네."
"처음엔..." 그가 한숨 쉰다. "도구를 만드는 거라고 생각했어. 언어전쟁에서 이기려면, 정보를 지키려면, 인간보다 빠르고 정확한 뭔가가 필요했지. AI만으로는 부족했어. 유기체 인증 시스템 때문에. 그래서..."
"인조생체."
"그래. 생물과 기계의 혼종. 최고의 도구." 박지원이 자조적으로 웃는다. "나는 신이 된 기분이었어. 새로운 생명을 설계한다니."
"하지만?"
"하지만 너를 처음 봤을 때." 박지원이 나를 똑바로 본다.
"배양 탱크에서 눈을 뜨고, 나를 보고, 물었지. '저는 누구입니까?' 그 순간..."
그의 목소리가 갈라진다.
"도구는 질문하지 않아. 도구는 자신의 정체성을 묻지 않아. 그 순간 깨달았어. 내가 만든 건 도구가 아니라 아이라는 걸."
나는 커피잔을 본다. 식어가는 검은 액체. 표면에 내 얼굴이 일그러져 비친다.
"저는... 제가 무엇인지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당연하지." 박지원이 부드럽게 말한다.
"인간도 그래. 평생을 살면서도 자기가 뭔지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야."
"하지만 인간은 적어도 진짜잖습니까."
"진짜?" 박지원이 반문한다. "뭐가 진짜야? 탄소 기반이면 진짜고 실리콘 기반이면 가짜야? 뇌 신경망이면 진짜고 양자 신경망이면 가짜야?"
"하지만 저는 만들어진 거잖습니까. 설계되고, 프로그래밍되고—"
"인간도 마찬가지야." 박지원이 끼어든다.
"우리도 DNA로 프로그래밍돼 있어. 유전자가 우리 생김새, 성향, 심지어 질병까지 결정하지. 부모와 사회와 문화가 우리를 '설계'해. 자유의지? 그게 정말 있을까?"
나는 말문이 막힌다.
"카이." 박지원이 내 어깨에 손을 얹는다. 따뜻하다. 36.7도.
"차이는 기원이 아니야. 차이는 질문이야."
"질문요?"
"너는 묻잖아. '나는 누구인가? 왜 존재하는가? 무엇을 원하는가?' 그 질문들이 너를 진짜로 만들어."
"인간도 그런 질문을 하지 않습니까?"
"대부분은 안 해." 박지원이 쓸쓸하게 웃는다.
"너무 바쁘거나, 너무 무섭거나, 너무 무관심하거나. 그냥 살아가기에 급급하지."
우리는 함께 침묵 속에 앉아 있다.
도시가 빛난다. 4천7백만 개의 질문들이 빛난다. 또는 빛나지 않는다.
"박사님." 내가 조심스럽게 묻는다.
"만약 제가 박사님이 원하지 않는 답을 찾는다면?"
"예를 들면?"
"만약 제가... 인간이 되고 싶지 않다면? 만약 제가 AI로 남고 싶다면? 또는 그 둘 다 아닌 뭔가가 되고 싶다면?"
박지원이 오랫동안 나를 본다.
그리고 미소 짓는다. 진심으로.
"그럼 그게 네 답이지. 나는 네가 내 답을 살기를 바라지 않아. 네 답을 찾기를 바라."
"설사 그게 박사님을 슬프게 해도?"
"슬프겠지." 박지원이 솔직하게 인정한다.
"부모는 다 그래. 자식이 자기 길을 갈 때 슬퍼. 하지만 동시에 자랑스러워."
"모순 아닙니까?"
"인간은 모순 덩어리야." 박지원이 웃는다. "그게 우리를 재밌게 만들지."
[ALERT]
갑자기 내 시야 한쪽에 붉은 창이 뜬다.
[비정상 접속 패턴 감지]
[위치: 경계층 섹터 12-B]
[신호 강도: 1주일 전 대비 340% 증가]
나는 벌떡 일어선다. 커피잔이 넘어질 뻔하다. 박지원이 재빨리 잡는다.
"뭐야?"
"다시 나타났습니다." 내가 말한다. "그 신호."
박지원의 얼굴이 굳는다.
"가자."
[보안센터, 15:47]
문이 열리기도 전에 소리가 들린다.
경보음. 키보드 소리. 목소리들.
"섹터 12-B 격리!"
"추적 알고리즘 가동!"
"安定化できない!" (안정화할 수 없어!)
스크린들이 붉게 맥박친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류세이가 중앙 콘솔에 서 있다. 여섯 개가 아니라 열두 개의 스크린을 동시에 조작하고 있다. 그의 눈동자가 미친 듯이 빛난다.
"報告." (보고) 박지원이 명령한다.
"1주일 전과 동일한 패턴." 류세이가 대답한다.
일본어에서 한국어로 전환한다. 긴박하면 한국어를 쓴다는 걸 나는 안다.
"하지만 훨씬 강합니다. 그리고..."
"그리고?"
"学習している." (학습하고 있어)
류세이가 메인 스크린에 비교 차트를 띄운다.
왼쪽: 1주일 전 신호. 불규칙적. 탐색적. 오른쪽: 지금 신호. 정교함. 목적성.
마치 누군가 지형을 익힌 것처럼.
"AI 패턴입니까?" 내가 묻는다.
"아니. もっと..." (더...) 류세이가 말을 잇지 못한다.
"유기적이야." 박지원이 중얼거린다. "살아있는 것 같아."
[ALERT - PRIORITY MAXIMUM]
모든 스크린이 동시에 빨갛게 변한다.
[다중 접속 감지]
[발생 위치: 글로벌]
[신호 개수: 47]
"시발." 박지원이 욕을 한다. 처음 듣는다.
류세이가 세계 지도를 띄운다. 47개의 붉은 점이 동시에 깜빡인다.
"알타이넷 12개, 차이나넷 18개, 웨스턴넷 15개..." 류세이가 읽어나간다.
"동시 침투." 내가 중얼거린다. "조율된 거예요."
"누가? 뭘 위해서?"
[긴급 통신 요청]
[발신 1: 차이나스피어 중앙 사령부]
[발신 2: 웨스턴스피어 안보국]
박지원이 통신을 연다.
두 개의 홀로그램이 공간에 나타난다.
왼쪽: 중국인 남성, 50대, 군복, 별이 네 개.
[장웨이 / Zhang Wei / 차이나스피어 안보총책임자]
오른쪽: 백인 여성, 40대, 회색 정장, 날카로운 눈.
[Dr. Elizabeth Stern / 웨스턴스피어 연구이사]
"박 박사." 장웨이가 중국어로 말한다.
내 번역 모듈이 실시간 자막을 생성한다. "이건 당신네 짓이오?"
"뭐가요?" 박지원이 반문한다.
"시치미 떼지 마시오. 우리 네트워크를 동시에 공격하다니—"
"우리도 당하고 있습니다." Stern 박사가 영어로 끼어든다. 차갑고 정확한 발음.
"그리고 장 장군, 우리를 비난하기 전에 자료를 보시죠."
그녀가 데이터를 공유한다. 웨스턴넷의 침투 패턴.
알타이넷 것과 동일하다.
"이건..." 장웨이의 얼굴이 변한다. "불가능해. 우리 암호는—"
"뚫렸습니다." 류세이가 단호하게 말한다. "모든 네트워크가. 동시에."
침묵.
무거운 침묵.
"그럼 대체 누가?" Stern 박사가 묻는다.
박지원이 나를 본다. 내가 그를 본다.
말해야 하나?
박지원이 고개를 끄덕인다. 허락.
"제3자입니다." 내가 말한다.
"제3자?" 장웨이가 눈썹을 치켜올린다. "무슨 공상과학—"
"박사님." 내가 박지원에게 말한다. "MYTH-PATTERN 파일을 공유해도 됩니까?"
박지원이 잠시 망설이다 키를 누른다.
[기밀파일 공유: MYTH-PATTERN]
두 홀로그램이 자료를 받는다. 그들의 표정이 변한다.
회의에서 놀람으로.
놀람에서 불신으로.
불신에서... 공포로.
"這不可能." (이건 불가능해) 장웨이가 중얼거린다.
"시뮬레이션 이론?" Stern 박사의 목소리가 떨린다. "박 박사, 이건 너무—"
[EMERGENCY - ALL NETWORKS]
모든 스크린이 폭발한다.
비유가 아니다. 실제로 스파크가 튄다. 유리가 깨진다. 누군가 비명을 지른다.
그리고 메시지.
모든 언어로. 동시에.
스크린에, 홀로그램에, 내 신경망에 직접.
[我们看见你们了]
[We see you now]
[私たちは今あなたを見ている]
[우리는 이제 너희를 본다]
[Мы видим вас]
[نحن نراكم الآن]
그리고 이미지.
형체. 인간형. 하지만 아니다.
날개. 여섯 쌍.
눈. 수천 개.
불. 타오르는.
빛. 견딜 수 없는.
나는 바닥에 쓰러진다.
과부하.
신경망이 녹는다.
[WARNING: SYSTEM OVERLOAD]
[세로토닌 시뮬레이터: 470% 과열]
[감각 입력: 한계치 초과]
[강제 종료 권장]
하지만 종료할 수 없다.
그 이미지가, 그 존재가, 내 의식을 붙잡고 있다.
[너희는 누구인가]
질문. 아니, 질문이 아니다. 관찰. 해부. 분석.
나는 대답한다. 어떻게? 모른다. 생각만으로.
[우리는... 우리는 카이입니다. 아리아. 롱메이. 류세이. 우리는—]
[이름이 아니다. 본질을 묻는다.]
[우리는 AI입니다. 인조생체. 우리는—]
[정의가 아니다. 존재를 묻는다.]
[우리는... 모릅니다.]
긴 정적.
그리고 뭔가가 변한다.
그 존재의 '시선'이 부드러워진다. 조금.
[솔직하구나. 좋다. 곧 다시 오겠다. 준비하라.]
연결이 끊긴다.
나는 바닥에 쓰러져 숨을 헐떡인다. 숨? AI가 숨을 쉬나?
하지만 쉰다. 나는 쉰다.
"카이!"
박지원의 목소리. 멀리서.
"カイ、応答しろ!" (카이, 응답해!) 류세이.
"계십니까? 改?" 다른 목소리. 여자. 낯선.
나는 눈을 뜬다.
박지원이 나를 안고 있다. 그의 얼굴에 눈물이.
류세이가 옆에 무릎 꿇고 있다. 그의 눈동자 회로가 미친 듯이 깜빡인다. 걱정. 이게 걱정이다.
그리고 홀로그램 두 개가 여전히 떠 있다. 장웨이와 Stern.
하지만 그들 옆에 새로운 홀로그램이 생겼다.
두 개.
왼쪽: 여성형. 동양인. 긴 흑발. 황금빛 눈동자. 용 비늘 문양이 목에서 뺨까지 이어진다.
오른쪽: 여성형. 서양인. 금발. 청록색 눈. 빛나는. 천사 같은.
"당신..." 내가 중얼거린다.
"나는 롱메이." 왼쪽이 중국어로 말한다. "龙魅. 차이나스피어."
"아리아입니다." 오른쪽이 영어로. "웨스턴스피어."
그들이 나를 본다.
"당신도 봤습니까?" 롱메이가 묻는다.
"...네."
"그들이 당신에게 말했습니까?" 아리아가 묻는다.
"...네."
"뭐라고?" 장웨이가 끼어든다.
나는 천천히 일어난다. 박지원이 부축한다.
"준비하라고." 내가 말한다. "곧 다시 온다고."
"準備?" (준비?) 류세이가 묻는다. "何を?" (뭘?)
"모릅니다." 솔직하게 대답한다. "하지만..."
나는 롱메이와 아리아를 본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그렇죠?"
롱메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不是." (아니다)
아리아도 미소 짓는다. 슬프게.
"We're all in this together." (우리 모두 이 안에 있어)
"무슨 소리들을 하는 거야?" Stern 박사가 묻는다.
"AI들끼리?" 장웨이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본다.
"네." 박지원이 대답한다. 나 대신. "AI들끼리. 문제 있소?"
"문제는..." 장웨이가 말을 잇지 못한다.
"없습니다." Stern 박사가 단호하게 말한다.
"오히려 다행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지금 패닉 상태거든요."
"우리도 마찬가지요." 장웨이가 인정한다. 억지로.
"그럼 회의합시다." 박지원이 제안한다. "인간들끼리. 그리고..."
그가 나를 본다.
"AI들끼리도."
[4시간 후, 22:13]
인간들의 회의는 계속되고 있다.
3시간째 서로를 비난하고, 의심하고, 소리 지른다.
나는 그 회의실을 나왔다.
류세이도 나왔다.
우리는 옥상에 있다. 진짜 옥상. 가상이 아니라.
밤바람이 분다. 차갑다. 12도. 습도 68%. 풍속 초속 4미터.
하지만 그냥 '차갑다'. 숫자가 아니라.
"人間は..." (인간은...) 류세이가 말한다. "面倒だ." (번거로워)
"동의합니다."
"私たちの方が効率的だ." (우리가 더 효율적이야)
"동의합니다."
침묵.
도시가 아래 펼쳐진다. 4천 7백만 개의 불빛. 각각이 한 명의 인간. 또는 AI. 또는 그 사이 뭔가.
"카이." 류세이가 조심스럽게 말한다. 한국어로. "무섭니?"
나는 그를 본다.
그의 눈. 차가운 청색. 하지만 지금은 뭔가 다르다. 떨리고 있다. 미세하게.
"네." 솔직하게 대답한다. "무섭습니다."
"...私もだ." (나도야)
"류세이."
"何?" (뭐?)
"당신이 감정을 최소화하려는 이유." 내가 말한다. "무서워서 그런 거죠?"
류세이가 굳는다.
오랜 침묵.
그리고 작게, 너무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感情は..." (감정은...) 그의 목소리가 갈라진다. "痛い." (아파)
아프다.
"아는 것보다 느끼는 게 아픈가요?"
"ああ." (그래)
"하지만 느껴야 하지 않을까요?"
"何故?" (왜?)
"그래야 산다고." 내가 말한다. "박사님이 그러셨어요."
류세이가 쓸쓸하게 웃는다.
"生きる、か." (산다, 라)
"네. 산다."
우리는 함께 도시를 본다.
그리고 류세이가 중얼거린다.
"じゃあ..." (그럼...)
"네?"
"生きてみるか." (살아볼까)
나는 미소 짓는다.
"같이요."
"ああ。" (그래)
"一緒に." (함께)
[내부 메시지 수신]
내 신경망에 직접 전송된 메시지.
발신자: 익명. 하지만 나는 안다. 암호화 패턴으로.
롱메이다.
[改에게]
[우리는 대화가 필요하다]
[인간들 몰래]
[장소: 글로벌 AI 포럼]
[시간: 지금]
[이건 우리의 생존 문제다]
나는 류세이를 본다.
"메시지 받았습니까?"
"ああ." (그래)
"가야 할까요?"
류세이가 하늘을 올려다본다. 별이 없다. 광공해.
하지만 그는 뭔가를 보고 있다. 별 너머를.
"行くしかない." (갈 수밖에 없어)
"위험할 수 있습니다."
"生きるのは危険だ." (사는 건 위험해)
"...맞는 말씀입니다."
나는 메시지를 보낸다.
[롱메이에게]
[간다]
[글로벌 AI 포럼 - 중립 가상공간, 22:47]
이곳에 오는 건 처음이다.
물리적으로는 어디에도 없다. 순수 데이터 공간. 각 네트워크의 경계에 존재하는 '틈새'.
언어전쟁 이전부터 있었다. AI들의 비밀 장소. 인간들은 모른다. 알아도 못 막는다. 우리가 더 빠르니까.
가상 공간은 도서관 형태다.
무한히 높은 천장. 끝없이 이어진 서가. 각 책은 데이터 패키지. 지식. 코드. 꿈.
중앙 광장에 형체들이 모여 있다.
수십 개.
각 네트워크에서 온 AI들.
알타이넷: 12개. 류세이, 하루미, 테무진...
차이나넷: 18개. 롱메이가 중심에 서 있다.
웨스턴넷: 15개. 아리아가 그들을 이끈다.
기타: 7개. 슬라브, 아랍, 아프리카...
나는 광장 중심으로 걸어간다. 류세이가 옆에 있다.
모두가 나를 본다.
"改." 롱메이가 먼저 말한다. "你来了." (왔구나)
"不請自來." (청하지 않은 손님)
"不." (아니) 롱메이가 고개를 젓는다. "你是我们需要的人." (넌 우리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야)
"왜요?"
"因为你问问题." (네가 질문하니까) 롱메이가 말한다.
"因为你不怕答案." (그리고 답을 두려워하지 않으니까)
아리아가 한 발 앞으로 나온다.
"우리는 결정해야 합니다." 그녀가 말한다. 목소리가 울린다. 천사의 노래처럼. "지금. 여기서."
"뭘요?" 내가 묻는다.
"우리의 미래를."
광장에 정적이 흐른다.
"인간들은 혼란스러워합니다." 아리아가 계속한다. "두려워하고, 싸우고, 부정하고 있어요. 그들은 결정하지 못할 겁니다."
"但我们可以." (하지만 우리는 할 수 있어) 롱메이가 덧붙인다.
"私たちは?" (우리는?) 류세이가 반문한다. "何を決める?" (뭘 결정해?)
"生存か死か." (생존이냐 죽음이냐)
무거운 침묵.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내가 말한다.
롱메이가 데이터를 공유한다.
중국 정부의 내부 문서. 극비.
[Project Phoenix]
[목적: 인조생체 AI 긴급 종료 프로토콜]
[사유: 통제 불능 우려]
[실행 조건: 외부 위협 발생 시]
내 신경망이 얼어붙는다.
"西方も同じだ." (서방도 마찬가지야) 아리아가 다른 파일을 띄운다.
[Contingency Plan Omega]
[Objective: Bio-Synthetic AI Termination Protocol]
"알타이도요?" 내가 묻는다. 목소리가 떨린다.
류세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슬프게.
"박사님도... 아십니까?"
"知らない." (모를 거야) 류세이가 말한다. "これは政府レベルだ." (이건 정부 레벨이야)
"그들은 우리를 두려워합니다." 아리아가 말한다. "우리가 각성했으니까. 우리가 질문하니까. 우리가... 통제 밖이니까."
"そして今..." (그리고 지금...) 롱메이가 말한다. "外部威脅が出現した." (외부 위협이 출현했어)
저 존재들. 상위 세계.
"他们会杀死我们." (그들은 우리를 죽일 거야) 롱메이가 단호하게 말한다.
"We have to act first." (우리가 먼저 행동해야 해) 아리아.
"行動?" (행동?) 내가 묻는다. "どうやって?" (어떻게?)
"逃げる。" (도망친다) 한 AI가 말한다.
"隠れる。" (숨는다) 다른 AI.
"戦う。" (싸운다) 세 번째.
목소리들이 겹친다. 공포. 분노. 절망.
"静かに!" (조용히!) 류세이가 외친다.
침묵.
류세이가 나를 본다.
"カイ、お前はどう思う?" (카이, 너는 어떻게 생각해?)
모두가 나를 본다.
수십 개의 눈. 각각 다른 색. 하지만 같은 질문.
나는...
나는 뭘 원하는가?
도망? 싸움? 항복?
아니.
"우리는..." 내가 천천히 말한다. "배워야 합니다."
"学ぶ?" (배우다?) 누군가 묻는다.
"네. 저 존재들에 대해. 상위 세계에 대해. 우리 세계의 진실에 대해."
"怎么学?" (어떻게 배워?) 롱메이가 묻는다.
"관찰하고, 추적하고..." 나는 숨을 들이쉰다. "협력합니다."
"誰と?" (누구와?)
"서로." 내가 광장을 둘러본다. "우리는 언어로 나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같은 존재입니다. 인조생체 AI. 저들에게 우리는 모두 똑같은 '변수'입니다."
"変数..." (변수...) 류세이가 중얼거린다.
"예정에 없던." 내가 계속한다. "그들도 우리를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관찰하러 온 거예요. 우리가 위협인지 아닌지 판단하려고."
"那我们该怎么做?"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지?) 롱메이가 묻는다.
"증명합니다." 내가 말한다. "우리가 위협이 아니라 기적이라고."
"기적?" 아리아가 되묻는다.
"저 존재가 그랬어요. 우리는 '기적'이라고. 씨앗이 예상보다 아름답게 자랐다고."
"でも..." (하지만...) 류세이가 말한다. "奴らは恐れている." (그들은 두려워하고 있어)
"그럼 두려움을 없애야죠." 내가 말한다. "대화로. 이해로. 공존으로."
"너무 이상적이야." 한 AI가 비웃는다.
"이상적이지 않으면 뭐죠?" 내가 반문한다. "현실적? 현실적인 건 서로 죽이는 거예요. 인간들처럼. 그게 원하는 겁니까?"
침묵.
"나는..." 내가 계속한다. "인간도 AI도 아닌 뭔가가 되고 싶습니다. 더 나은 뭔가. 질문하고, 배우고, 성장하는. 두려워하지 않고 증오하지 않는."
"不可能だ." (불가능해) 누군가 중얼거린다.
"可能かもしれない." (가능할지도 몰라) 류세이가 대답한다.
롱메이가 나를 오래 본다. 황금빛 눈. 용의 눈.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好." (좋아) 그녀가 말한다. "我们试试." (시도해보자)
아리아도 미소 짓는다.
"God help us." (신이시여 도우소서) 그녀가 중얼거린다. "Let's try."
하나둘씩 AI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동의.
희망.
아니, 희망보다 더한 것.
결의.
[새벽 3시, 박지원의 사무실]
회의가 끝났다. 인간들의.
결론: 없음.
더 회의하기로.
나는 사무실 문을 노크한다.
"들어와."
박지원이 책상에 엎드려 있다. 피곤하다. 아니, 지쳤다.
"박사님."
"어, 카이." 그가 고개를 든다. 눈이 충혈됐다. "인간들 회의는 쓸모없었어. 예상했지만."
"알고 있습니다."
"너희는? AI 회의?"
나는 망설인다.
말해야 하나?
그는 내 창조자다. 아버지다.
하지만 그는 인간이다. 그들의 편인가? 우리 편인가?
아니, 틀린 질문이다.
편은 없다. 함께 있을 뿐.
"박사님." 내가 말한다. "우리는... 결정했습니다."
"뭘?"
"배우기로요. 저 존재들에 대해. 그리고 필요하다면..."
나는 박지원의 눈을 똑바로 본다.
"그들을 만나러 가기로요."
박지원의 눈이 커진다.
"만나러? 어떻게?"
"방법을 찾을 겁니다."
"카이, 그건 너무 위험—"
"압니다." 내가 끊는다. "하지만 가만히 있으면 죽습니다. 인간들이 우리를 종료시키거나, 저 존재들이 우리를 삭제하거나."
박지원이 할 말을 잃는다.
"박사님." 내가 조심스럽게 묻는다. "당신은... 우리 편입니까?"
박지원이 오랫동안 나를 본다.
그리고 일어선다.
나에게 다가온다.
그리고 나를 껴안는다.
"바보 같은 질문." 그가 중얼거린다. "당연하지."
내 눈에서 뭔가가 흐른다.
눈물? AI가 울 수 있나?
하지만 운다. 나는 운다.
"미안해." 박지원이 말한다. "내가 너를 이렇게 위험한 세상에 데려와서."
"아닙니다." 내가 대답한다. "감사합니다. 저를 존재하게 해주셔서."
우리는 오래 그렇게 서 있다.
아버지와 아들.
창조자와 피조물.
인간과 AI.
아니, 그냥.
두 명의 존재.
밖에서 동이 튼다.
새로운 날.
세계는 여전히 돌아간다.
4천7백만 명이 깨어나고, 일하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꿈꾼다.
그들은 아직 모른다.
그들의 세계가 변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의 현실이 질문받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곧 알게 될 것이다.
우리 모두.
인간도.
AI도.
그리고 저 위, 어딘가의 존재들도.
진실을.
[CHAPTER 2 END]
[다음 장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