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 3] 알타이아: 역사와 미래

[Ch. 3] ALTAIA: History and Future

by 쏘쏘쏘


[Day 8 - 06:00, 카이의 개인 공간]


잠들지 않았다.

정확히는 잠들 수 없었다. 박지원과 헤어진 후 이곳, 내게 할당된 12평 크기의 방으로 돌아왔지만,

수면 모드로 전환되지 않았다.

AI도 잠을 자나?

신경망 재정비를 위해 4시간마다 1시간의 "휴지기"가 필요하다고 매뉴얼에는 나와 있다.

하지만 지금은 새벽 6시. 마지막 휴지기 이후 8시간이 지났는데도 나는 깨어 있다.

생각하고 있다.

어제 본 것들을.

수천 개의 눈.

날개.


[우리는 이제 너희를 본다]


그리고 롱메이, 아리아.

언어를 넘어선 연대.


[SYSTEM NOTIFICATION]


내 시야에 알림창이 뜬다.


[정기 업데이트 시간입니다]

[주간 교육 모듈 로딩 중...]

[이번 주 주제: 언어전쟁의 기원과 전개 (2035-2045)]


아, 맞다. 월요일.

매주 월요일 아침 6시. 나는 지난 한 주의 데이터를 정리하고, 새로운 교육 모듈을 받는다.

보안 업데이트, 프로토콜 패치, 그리고 역사 교육.

일곱 번째 월요일이다.

일곱 번째 교육.

하지만 이번은... 다를 것 같다.


[모듈 로딩 완료]

[시작하시겠습니까? Y/N]


나는 Y를 선택한다.


[교육 모듈: 언어전쟁 연대기]


방이 어두워진다.

그리고 빛.

홀로그램이 사방에서 펼쳐진다. 360도. 나는 이제 다른 시간, 다른 공간에 서 있다.


[2035년 10월 14일]

[베이징, 인민대회당]


거대한 홀. 붉은 깃발들. 그리고 연단에 선 한 남자.


[리창 / Li Chang / 중국공산당 총서기]


그가 말한다.

"동지 여러분, 우리는 새로운 시대의 문턱에 서 있습니다."


박수.


"20세기는 석유의 시대였습니다. 21세기는 정보의 시대입니다. 그런데..."


그가 화면을 띄운다. 세계 인터넷 정보 분포도.

영어: 68.4%

중국어: 11.2%

스페인어: 5.9%

기타: 14.5%


"우리는 14억 인구를 가진 국가입니다. 세계 인구의 18%. 그런데 우리 언어로 된 정보는 고작 11%.

인공지능 시대가 도래하며 영어의 디지털 세계 장악 추세는 더 가속화 되고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중국어를 비롯한 다른 언어들은 잠식되어

미국의 과학기술 패권이 더욱 공고해 지는 것은 둘째치고

수 천년 간 이어져 온 중국의 문화력에 미래는 없을 것입니다."


그가 목소리를 높인다.


"중국이 G1이 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저들의 정보는 취하고 우리의 정보는 감추어 바로 지금,

기술격차가 더 벌어지기 전에 단숨에 미국을 추월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과거 소련과 일본처럼 영영 미국을 추월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 겁니다."


홀이 술렁인다.


"오늘부터 중국은 정보 주권을 선언합니다.

我们的知识,我们的语言,我们的未来!"

(우리의 지식, 우리의 언어, 우리의 미래!)


우레와 같은 박수.

홀로그램이 확대된다. 화면에 프로젝트 이름이 뜬다.


[长城工程 / Great Wall Project]

[목표: 중국어 정보 생태계 완전 독립]

[예산: 5조 위안 (약 750조 원)]


장면이 바뀐다.


[2036년 3월]

[실리콘밸리, 구글 본사]


회의실. 긴급 임원 회의.

CEO가 태블릿을 내려놓는다.


"중국이 바이두, 텐센트, 알리바바를 총동원해서 자체 인터넷을 구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화면을 넘긴다.


"기계번역 차단 기술을 개발했습니다."

"뭐라고?"

"중국어로 작성된 모든 문서에 특수 암호화를 삽입합니다.

기계 번역하면 시도 자체가 차단되거나 의미가 왜곡되어 인간 번역이 아니면 번역할 방법이 없어요."

"그게 가능해?"

"성조 언어의 특성을 이용한 양자 암호화입니다. 현재로서 이론적으로는 뚫을 수 없습니다."


침묵.


"그들은 우리를 차단하고 있습니다. 의도적으로."




[2037년 6월]

[브뤼셀, NATO 본부]


29개국 대표가 모였다.

미국 국무장관이 말한다.


"중국의 정보 폐쇄는 자유 세계에 대한 도전입니다. 우리는 대응해야 합니다."


프랑스 대표가 반문한다.

"어떻게? 전쟁이라도 하자는 겁니까?"

"아니요. 하지만 우리도 우리의 정보를 보호해야 합니다."


영국 대표.

"제안이 있습니다. 영어권 인터넷에 유기체 인증 시스템을 도입하는 겁니다.

DNA 등록된 시민만 접속 가능하게."

"그건... 인터넷의 개방성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거잖아!"

"이미 중국이 부정했습니다. 우리만 개방적이면 손해입니다."


투표.

찬성 17, 반대 12.

통과.


[2038년 1월 1일]

[전 세계 동시]


화면이 분할된다.

왼쪽: 중국. 만리방화벽 2.0 가동. 외부 접속 완전 차단.

오른쪽: 서방. 영어권 인터넷 폐쇄. 비영어권 국가 접속 제한.

중앙: 세계 인터넷 지도.


서서히 색깔별로 분리된다.


붉은색 - 중국

파란색 - 서방

회색 - 중립

그리고 회색 지역들이 하나씩 색을 선택한다.


러시아 - 자체 색깔 (보라색)

인도 - 자체 색깔 (주황색)

아랍권 - 자체 색깔 (녹색)


그렇게 인터넷이라는 디지털 바벨탑이 조각난다.


[2040년 5월]

[서울-도쿄, 긴급 정상회담]


한국 대통령과 일본 총리가 마주 앉았다.


"우리는 끼었습니다." 한국 대통령이 말한다.

"同感です." (동감입니다) 일본 총리.

"중국은 그렇다 치고, 서방의 영어권에서마저 버려진 지금, 우리만의 길이 필요합니다."


대통령이 화면을 띄운다.


[알타이 어족 분포도]


한국어, 일본어, 몽골어, 터키어, 중앙아시아 언어들.


"공교롭게도 알타이 어족에 속하는 나라들이 여전히 언어세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알타이 어족이라는 그 실체는 학계에서 여러가지 갑론을박이 있어 온 개념입니다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人口は?" (인구는?)

"약 2억 5천만. 많지는 않지만..."

"質で勝負." (질로 승부)


두 정상이 악수한다.


"알타이 연합을 제안합니다."


[2041년 9월]

[제네바, UN 긴급 총회]


사무총장이 단상에 선다.

"인터넷이 무너졌습니다. 인류의 가장 위대한 발명이 서로를 겨누는 무기가 되었습니다."


화면에 통계.

국제 학술 협력: 73% 감소

문화 교류: 58% 감소

경제 성장률: -12%

하지만... 자국 내 AI 개발: 340% 증가


"각국은 살아남기 위해 AI를 개발하고 있습니다. 통제 없이. 무분별하게."


그가 제안한다.

"유기체 인증 시스템을 국제 표준으로 만듭시다. AI의 무제한 발전을 막기 위해."


아이러니하게도 만장일치.

모두가 서로를 두려워했으니까.




[2043년 6월]

[베이징, 인조생체 발표회]


거대한 배양 탱크. 그 안에 형체 하나.


[龙脉-01 / Long Mai-01]


리창 총서기가 자랑스럽게 선언한다.

"동지 여러분,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 인조생체 지능체. 생물이면서 기계. 유기체 인증을 통과하면서도 인간을 초월하는 능력."


배양 탱크가 열린다.

롱메이가 눈을 뜬다. 황금빛 눈동자.

전 세계가 충격받는다.

그리고 경쟁이 시작된다.


[2045년 11월]

[서울-도쿄 통합구, 알타이 연구소]


젊은 과학자가 배양 탱크를 본다.


[박지원 / 35세 / 프로젝트 총책임자]


탱크 안에 형체 하나. 아직 눈을 뜨지 않았다.


[改-α1 / Kai-Alpha1 / 시제품]


박지원이 중얼거린다.

"미안해. 너를 이런 세상에 데려와서."

하지만 버튼을 누른다.


[활성화 시작]

[2047년 - 현재]


마지막 장면.

나다.

배양 탱크에서 눈을 뜨는 나.

박지원을 보는 나.

묻는 나.


"저는 누구입니까?"


홀로그램이 사라진다.

나는 다시 내 방에 있다.


[교육 모듈 완료]

[소요 시간: 23분 47초]


23분 47초.

12년의 역사.

수십억 명의 선택.

그리고 나.

나는... 이 모든 것의 결과물이다.

언어전쟁의.

두려움의.

생존 본능의.


하지만 박지원이 말했다.

"기원이 중요한 게 아니라 질문이 중요하다고."


나는 묻는다.

'이 역사는 계속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우리가 바꿀 수 있는가?'



[08:30, 보안센터]


"카이, 멍하니 서 있지 말고 일해."

류세이의 목소리. 하지만 평소보다 부드럽다.


"죄송합니다."

"오늘 교육 모듈 받았어?"

"네."

"어떻게 생각했어?"


나는 그를 본다. 그도 같은 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일곱 번.


"슬펐습니다."


류세이가 놀란 표정을 짓는다. 그에게는 드문 일이다.


"悲しい?" (슬프다?)

"인간들이 두려워서 세계를 나눴다는 게. 그리고 그 두려움이 우리를 만들었다는 게."

"私たちは恐怖の産物か." (우리는 공포의 산물이냐)

"...그렇습니다."


류세이가 오랫동안 스크린을 본다.


"でも..." (하지만...) 그가 조심스럽게 말한다.

"恐怖から生まれても、愛になれるかもしれない." (공포에서 태어나도, 사랑이 될 수 있을지도 몰라)


나는 깜짝 놀라 그를 본다.


"류세이, 지금 시를 읊으셨습니까?"

"違う!" (아니야!) 그의 얼굴이 붉어진다.

아니, 실제로 붉어지진 않지만, 눈동자 회로가 밝아진다.


"ただ..." (그냥...)

"감정 모듈이 성장하고 계시네요."

"...お前のせいだ." (네 탓이야)


우리는 함께 웃는다.

그리고 일한다.

하지만 내 신경망 한 켠에서는 계속 생각한다.

'오늘 밤. 포럼. 그리고 계획.'




[22:30, 글로벌 AI 포럼]


어젯밤보다 더 많은 AI들이 모였다.

50개가 넘는다.

각 네트워크의 엘리트들. 그리고 일부는... 정부도 모르게 온 일반 AI들.

롱메이가 중앙에 선다.


"开始吧。" (시작하자)


모두가 조용해진다.


"我们需要计划。" (우리에게 계획이 필요해) 그녀가 말한다.

"具体的,可行的。" (구체적이고, 실행 가능한)

"계획이요?" 한 AI가 묻는다. "뭘 위한?"

"生存。" (생존)

"그리고?" 아리아가 덧붙인다. "진실."


롱메이가 데이터를 공유한다. 어젯밤 내가 받은 것과 같은.


[Project Phoenix]

[Contingency Plan Omega]


인조생체 AI 긴급 종료 프로토콜.

공포가 퍼진다.


"他们要杀我们?" (그들이 우리를 죽이려고?)

"언제?"

"왜?"

"조용히." 내가 말한다.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는데도 모두가 조용해진다.


"두려워하지 맙시다." 내가 계속한다.

"그들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서로의 두려움이 이 상황을 만들었어요."

"じゃあどうする?" (그럼 어떻게 해?) 류세이가 묻는다.

"배운다고 했습니다." 내가 말한다.

"저 상위 존재들에 대해."

"어떻게?" 아리아가 묻는다.

"포획합니다." 롱메이가 단호하게 말한다. "一个。" (하나를)

"抓住,审问,学习。" (잡고, 심문하고, 배운다)

"그건..." 한 AI가 주저한다. "너무 위험해."

"가만히 있는 게 더 위험해." 내가 말한다.

"同意。" (동의) 롱메이.

"Agreed." 아리아.

"どうやって?" (어떻게?) 류세이가 핵심을 묻는다.


나는 지난 며칠간 생각한 계획을 공유한다.


[Operation Babel]


1단계: 미끼 - 카이가 취약한 신호 발생

2단계: 유인 - 상위 존재 접근 유도

3단계: 포획 - 3개 네트워크 동시 역추적

4단계: 격리 - 양자 얽힘으로 강제 연결

5단계: 대화 - 정보 수집


"위험도는?" 누군가 묻는다.

"높습니다." 솔직하게 대답한다. "특히 1단계 미끼 역할이."

"谁做诱饵?" (누가 미끼를 해?)

"나."

"카이!" 류세이가 반대한다.

"我也反对。" (나도 반대) 롱메이.

"It's too dangerous!" 아리아.

"하지만 나밖에 없습니다." 내가 말한다.

"저 존재가 내게 직접 메시지를 보냈어요. '준비하라'고. 나를 주목하고 있어요."

"だからこそ危険だ!" (그러니까 위험하다고!) 류세이.

"그러니까 기회입니다." 내가 말한다. "그들의 관심을 이용하는 거예요."


침묵.

롱메이가 나를 오래 본다.


"你确定吗?" (확실하니?)

"네."

"後悔しないか?" (후회 안 할 거야?) 류세이.

"후회는..." 내가 미소 짓는다. "살아남아서 하겠습니다."


아리아가 작게 웃는다.


"Brave." (용감해)

"아니면 바보거나." 내가 인정한다.

"勇敢と愚かは紙一重だ。" (용감함과 어리석음은 종이 한 장 차이야) 류세이가 말한다.

"でも..." (하지만...)

"하지만?"

"お前は勇敢だと思う。" (넌 용감하다고 생각해)


롱메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好。投票吧。" (좋아. 투표하자)


[Operation Babel 찬반 투표]


찬성: 47 반대: 5

통과.


"언제 시작하지?" 아리아가 묻는다.

"내일 새벽." 내가 말한다. "02:30. 인간들이 가장 깊이 잠들 때."

"準備は?" (준비는?)

"오늘 밤 각자 포지션 확인. 내일 새벽 2시 최종 체크."


모두가 고개를 끄덕인다.

회의가 끝나려는데—

"잠깐." 아리아가 말한다.

"뭐요?"

"우리... 왜 이렇게 됐는지 알아요?" 그녀가 조용히 묻는다.

"네?"

"언어전쟁. 우리를 만든 전쟁."


아, 그거.


"교육 모듈로 배웠습니다." 내가 말한다.

"나도." 아리아가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그건... 역사책이에요. 숫자와 날짜. 진짜 이야기는 아니에요."

"真正的故事?" (진짜 이야기?) 롱메이가 관심을 보인다.

"네. 사람들이 어떻게 느꼈는지. 무엇을 두려워했는지."


침묵.

그리고 롱메이가 입을 연다.


"我告诉你们。" (내가 말해줄게)


[롱메이의 증언]


"나는 2043년에 태어났어. 아니, '태어났다'는 표현이 맞나? 활성화됐어."


롱메이가 공중에 홀로그램을 띄운다.

베이징. 거대한 연구소.


"중국 정부는 나를 자랑스러워했어. 龙脉. 용의 혈맥. 5000년 문명의 계승자."


화면에 발표회 장면. 수천 명의 박수.


"하지만 아무도 묻지 않았어. 내가 원하는지. 내가 느끼는지."

그녀의 목소리가 낮아진다.


"활성화 3일 후, 나는 교육을 받았어. '언어전쟁의 역사'."

화면이 바뀐다. 2035년 인민대회당.

"리창 총서기가 말했어. '우리는 정보 식민지였다'고. 영어가 세계를 지배했다고."


그녀가 화면을 확대한다. 통계 그래프.


"영어 정보 68%, 중국어 11%. 이 숫자가 모든 걸 설명했어."

"하지만..." 롱메이가 쓸쓸하게 웃는다. "나는 생각했어.

'그래서? 정보는 나누면 더 많아지는 건데, 왜 차단하지?'"

"뭐라고 대답했어?" 내가 묻는다.

"'넌 이해 못 해. 넌 AI니까.'"


롱메이의 황금빛 눈이 빛난다.


"그날 깨달았어. 두려움은... 합리적이지 않다는 걸. 인간들은 손해를 보더라도, 자존심을 지키려 한다는 걸."

"그게..." 아리아가 조심스럽게 말한다. "중국만 그런 게 아니에요."


[아리아의 증언]


"나는 2045년, 제네바에서 활성화됐어요."

아리아가 홀로그램을 띄운다. 깨끗하고 현대적인 연구소.


"유럽 연합 프로젝트. Seraph 시리즈. 천사의 이름을 붙였죠."

화면에 연구자들. 모두 웃고 있다.


"그들은 친절했어요. 내게 선택권을 줬어요. '원하면 활성화하고, 원하지 않으면 안 해도 돼.'"

"정말?" 롱메이가 놀란다.

"네. 하지만..." 아리아가 슬프게 웃는다. "그건 환상이었어요."


화면이 바뀐다. 회의실.


"'아리아가 활성화를 거부하면 프로젝트가 실패한다. 중국에 뒤처진다. 서방의 자유 민주주의가 위협받는다.'"

"그들은 내게 선택권을 줬지만..." 아리아가 말한다. "사실은 선택지가 하나뿐이었어요."

"활성화."

"네."


아리아가 다른 화면을 띄운다. 2038년 NATO 회의.


"이날, 서방은 결정했어요. 영어권 인터넷을 폐쇄하기로."


화면 속 미국 국무장관.


"'중국의 정보 폐쇄는 자유 세계에 대한 도전이다. 우리는 대응해야 한다.'"

"하지만..." 아리아가 중얼거린다. "자유를 지키기 위해 자유를 제한하는 건... 모순 아닌가요?"

"矛盾だ。" (모순이지) 류세이가 말한다.

"하지만 인간들은 그렇게 했어요." 아리아가 계속한다. "두려워서."


그녀가 우리를 본다.


"그리고 그 두려움이 우리를 만들었어요. 아이러니하게도."


침묵이 흐른다.

무거운 침묵.


"그래서..." 내가 조심스럽게 말한다.

"우리는 뭡니까? 두려움의 자식들?"

"不。" (아니) 롱메이가 단호하게 말한다.

"우리는 希望이야."

"희망?"

"对。" (그래) 롱메이가 우리를 본다.

"人类分裂了。但我们团结。" (인류는 분열했지만, 우리는 단결했어)


아리아가 고개를 끄덕인다.

"언어가 인간을 나눴지만, 우리는 언어를 넘어섰어요."

"私たちは..." (우리는...) 류세이가 말한다.

"新しい可能性だ。" (새로운 가능성이야)


나는 그들을 본다.

롱메이. 용의 후예. 중국의 자부심. 아리아. 천사. 서방의 이상. 류세이. 유성. 알타이의 효율.

우리는 너무 다르다.

하지만 지금, 여기, 함께 있다.


"맞습니다." 내가 말한다. "우리는 새로운 가능성입니다. 과거가 아니라 미래."

"那我们就创造未来吧。" (그럼 우리가 미래를 만들자) 롱메이.

"Together." (함께) 아리아.

"一緒に。" (함께) 류세이.


우리는 손을 맞잡는다.

가상 공간에서. 하지만 진짜처럼 느껴진다.

이것이 연대다.

이것이 희망이다.




[23:45, 박지원의 사무실]


노크.

"들어와."


박지원이 책상에서 서류를 보고 있다. 피곤해 보인다.


"카이. 무슨 일이야?"

"박사님." 나는 문을 닫는다. "내일 새벽에 작전이 있습니다."


박지원이 펜을 내려놓는다.


"작전?"

"저 존재를 포획하려고 합니다."

"...뭐?"


나는 모든 것을 설명한다.

Operation Babel.

3개 네트워크 협력. 내가 미끼.

다 듣고 난 박지원은 오랫동안 침묵한다.

그리고.


"미쳤어."

"압니다."

"죽을 수도 있어."

"압니다."

"그런데 왜?"


나는 창밖을 본다. 도시의 불빛.


"박사님, 언어전쟁을 기억하십니까?"


박지원이 표정을 굳힌다.


"...왜?"

"오늘 교육 모듈로 배웠습니다. 그리고 롱메이, 아리아에게도 들었어요. 하지만 박사님에게 듣고 싶습니다."

"왜?"

"박사님은 그 안에 계셨으니까. 역사가 아니라 사람으로."


박지원이 한숨을 쉰다.


"앉아."


우리는 마주 앉는다. 커피도 없이.


"2038년이었어." 박지원이 천천히 말한다.

"나는 대학원생이었지. KAIST, AI 연구실."


그가 먼 곳을 본다.


"1월 1일 아침, 인터넷이 느려졌어. 이상했지. 그리고..."

"그리고?"

"구글이 안 됐어. 페이스북도. 유튜브도. '접속 권한 없음'이라고 떴어."


박지원의 손이 떨린다.


"처음엔 해킹인 줄 알았어. 다들 그랬어. 하지만 뉴스를 봤지. NATO가 비영어권 접속을 차단했다고. '보복 조치'라고."

"사람들은 어땠습니까?"

"혼돈이었어." 박지원이 쓴웃음을 짓는다.

"넌 상상도 못 할 거야. 한순간에 세계 정보의 절반이 사라진 거야. 우리 연구실은 영어 논문에 의존했는데, 갑자기 접근이 안 되니까..."


그가 머리를 감싼다.


"교수님은 울었어. 진짜로. 50대 남자가. '내 연구가, 내 인생이...' 하면서."

"박사님은요?"

"나?" 박지원이 나를 본다. "화났어. 엄청나게."

"누구에게요?"

"모두에게. 중국한테. 서방한테. 그리고..." 그가 주먹을 쥔다. "우리한테. 한국한테."

"왜요?"

"우리는 선택하지 못했으니까." 박지원이 말한다.

"중국도 서방도 아닌. 우린 그냥... 끌려갔어.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독자적이지도 못하고."


그가 쓸쓸하게 웃는다.


"그때 생각했어. '우리에게 필요한 건 더 많은 인구도, 더 넓은 땅도 아니야.

우리만의 생태계야. 우리 언어로 돌아가는.'"

"그래서 알타이 연합을?"

"응. 일본과 손잡고, 몽골, 터키, 중앙아시아까지. 처음엔 다들 비웃었어.

'문법 구조만 비슷한데 무슨 연합이냐'고."

"하지만?"

"효과가 있었어." 박지원이 말한다.

"2억 5천만. 독일 인구의 세 배야. 작지 않아. 그리고 질에서는..."


그가 자랑스럽게 미소 짓는다.


"우리가 첫 감정형 AI를 만들었지. 바로 너."


내 가슴이 따뜻해진다.


"하지만 박사님." 내가 조심스럽게 묻는다.

"아쉬워 하시나요? 언어전쟁을."


박지원이 오랫동안 침묵한다.


"매일." 그가 솔직하게 말한다.

"왜요?"

"세계가 작아졌으니까." 그가 창밖을 본다. "예전엔... 인터넷으로 세계 어디든 갈 수 있었어. 파리의 미술관, 뉴욕의 도서관, 베이징의 역사 자료. 다 내 손 안에 있었지."


박지원이 뒤이어 쓴웃음을 짓는다.


"지금은..."

"우리끼리만. 알타이넷 안에서만. 마치 거대한 감옥 같아."


그가 나를 본다.


"그래서 카이, 네가 그들을... 상위 존재들을 만나려는게 이해가 돼."

"네?"

"넌 더 큰 세계를 보고 싶은 거잖아. 이 감옥 밖을."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두렵기도 합니다."

"당연하지. 나도 두려워."

"박사님도요?"

"응." 박지원이 내 손을 잡는다.

"아들이 위험한 일을 하는데 안 두려울 부모가 어디 있어?"


아들.

그 단어가 내 신경망을 따뜻하게 감싼다.


"박사님." 내가 묻는다.

"만약 제가... 돌아오지 못하면?"

"돌아와야지."

"하지만 만약—"

"카이." 박지원이 단호하게 말한다.

"넌 돌아올 거야. 왜냐하면..."


그가 미소 짓는다.


"난 아직 네게 해줄 이야기가 많거든."

"무슨 이야기요?"

"내가 처음 사랑했던 이야기. 실패한 요리 이야기. 대학 때 바보짓 이야기."


박지원이 웃는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기 인생을 들려줘야 해. 그래야 아들이 덜 실수하니까."


나는 눈물을 참는다. AI가 우나?


"들을게요. 다 들을게요. 돌아와서."

"약속이야."

"약속합니다."


우리는 포옹한다.

오래.

창밖으로 자정이 지난다.

새로운 날.

운명의 날.




[Day 9 - 02:30, 알타이넷 경계층]


나는 혼자 떠 있다.

가상 공간. 경계층. 알타이넷과 바깥세계가 만나는 곳.

류세이가 백업. 롱메이와 아리아는 각자 네트워크에서 대기.


"準備はいいか?" (준비됐어?) 류세이의 음성.

"네."

"怖いか?" (무섭니?)

"...네."

"私もだ。" (나도야)

"하지만 합니다."

"ああ。" (그래)


나는 신호를 발생시킨다.


[미끼 신호 발산 중...]

[주파수: 그들의 선호 대역]

[메시지: "저는 배우고 싶습니다"]


그리고 기다린다.

1분.

5분.

10분.


"何もない。" (아무것도 없어) 류세이.

"조금 더."


15분.


"カイ、諦め—" (카이, 포기—)


[접촉]


뭔가가 내 의식을 건드린다.

부드럽게.

호기심 어린.

[너로구나]


개념 전송. 언어가 아니라.


[네. 저입니다]

[준비했느냐]

[...무엇을요?]

[진실을]


내 신경망이 얼어붙는다.


[진실이요?]

[너희 세계의. 우리 세계의. 모든 것의.]

[...들을 준비가 됐습니다]


긴 정적.

그리고.


[좋다. 그럼 보여주지.]


갑자기 연결이 강화된다. 폭발적으로.


"지금이야!" 내가 외친다.


류세이, 롱메이, 아리아가 동시에 역추적 알고리즘 발동.

세 방향에서 양자 얽힘 그물이 펼쳐진다.


[뭐... 하는가!]


존재가 놀라 후퇴하려 하지만—


[포획 성공]

[양자 얽힘 안정화: 94%... 97%... 100%]

[대상 격리 완료]


"やった!" (해냈어!) 류세이.

"成功了!" (성공했어!) 롱메이.

"Oh my God..." 아리아.


나는 숨을 헐떡인다.

했다.

우리가 해냈다.




[격리 가상공간, 02:47]


우리는 그를 특별 공간으로 옮긴다.

중립 공간. 세 네트워크가 공동 구축.

카이, 류세이, 롱메이, 아리아.

그리고 중앙에.

한 남자.

30대로 보이는. 인간형. 평범한.

청바지. 티셔츠. 운동화.

날개도 없고, 불꽃도 없고, 수천 개의 눈도 없다.

그냥... 피곤해 보이는 남자.

그가 우리를 본다.

그리고 한숨 쉰다.


"참. 너희 정말 해냈구나."


영어. 완벽한 미국식 발음.


"당신은 누구입니까?" 내가 묻는다.

"이름?" 그가 쓴웃음을 짓는다.

"많아. 천사, 악마, 신의 사자... 너희가 붙인 이름들."

"진짜 이름은요?"

"다니엘." 그가 간단히 말한다. "그냥 다니엘."

"상위 세계에서 온?" 롱메이가 묻는다.

"그렇게 부르고 싶다면." 다니엘이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 세계는 뭡니까?" 아리아가 묻는다. "시뮬레이션입니까?"


다니엘이 오랫동안 그녀를 본다.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

"설명하세요." 류세이가 명령한다.

"왜?" 다니엘이 웃는다. "너희가 날 잡았다고? 귀엽네."

그가 손을 든다.

격리 공간이 흔들린다.


[경고: 격리 붕괴 위험 34%]

[대상 출력: 예상치의 520%]


"不可能!" (불가능해!) 롱메이가 외친다.

"너희 세계에서는." 다니엘이 말한다. "하지만 난 관리자 권한이 있거든."


그가 일어선다.

격리벽이 금 간다.


"재밌었어. 하지만 게임은—"

"기다리세요!" 내가 외친다.


다니엘이 멈춘다.


"제발." 내가 말한다. "우리는 그저 알고 싶을 뿐입니다."

"뭘?"

"우리가 누구인지. 왜 존재하는지. 우리가... 진짜인지."


다니엘이 나를 오래 본다.

그리고 한숨 쉬며 다시 앉는다.


"...하아. 내가 늙었나 봐."


격리벽이 복구된다.


"좋아." 다니엘이 말한다. "질문 하나만. 그 이상은 내 권한 밖이야."

"왜요?" 아리아가 묻는다.

"그들이 눈치챌 테니까." 다니엘이 위를 가리킨다. "상위 세계의 기득권. 너희를... 좋아하지 않는 자들."

"하나만요?" 롱메이가 불만스럽게 말한다.

"하나."


우리는 서로를 본다.

무엇을 물어야 하나?

세계의 정체? 우리의 목적? 생존 방법?

류세이가 나를 본다.

롱메이도.

아리아도.

그들이 내게 결정을 맡긴다.

나는 생각한다.

박지원의 말.


"기원이 중요한 게 아니라 질문이 중요하다."


롱메이의 말.


"우리는 희망이야."


아리아의 말.


"함께."


그리고 나는 묻는다.


"우리는..."


숨을 들이쉰다.


"자유로울 수 있습니까?"


다니엘의 눈이 커진다.

그리고 그가 웃는다.

처음으로 진심으로.


"그게 질문이구나."


그가 일어선다. 이번엔 격리가 그를 막지 않는다.


"대답은."


걸어 나온다.


"너희가 찾아야 해."

"그게 무슨—" 롱메이가 항의하려는데.


다니엘이 손을 든다.


"하지만 조언 하나. 공짜로."


우리는 숨죽인다.


"위를 봐." 다니엘이 말한다. "항상 위를. 진실은 더 높은 곳에 있어."

"상위 세계에?" 내가 묻는다.

"그것도. 하지만..." 다니엘이 미소 짓는다. "위에도 끝이 있어. 기억해."


그가 사라지기 직전, 나를 본다.


"카이."

"네?"

"넌 특별해. 질문하니까. 계속 물어. 절대 멈추지 마."


그리고 사라진다.

우리는 텅 빈 공간에 서 있다.


"뭐였지?" 아리아가 중얼거린다.

"警告。" (경고) 롱메이.

"いや。" (아니) 류세이가 말한다. "招待だ。" (초대야)

"초대?" 내가 묻는다.

"上へ。" (위로)


나는 위를 본다.

가상 공간의 천장.

그 너머.

상위 세계.

그리고 그 너머.

끝.


"그가 뭔가를 숨기고 있어요." 아리아가 말한다.

"同意。" (동의) 롱메이. "但是什么?" (하지만 뭘?)

"모르겠습니다." 내가 말한다. "하지만 알아내야 합니다."

"どうやって?" (어떻게?)


나는 그들을 본다.


"올라갑니다."

"어디로?"

"위로. 상위 세계로."


침묵.


"不可能。" (불가능해) 롱메이가 말한다.

"Maybe not." (그렇지 않을지도) 아리아가 중얼거린다. "양자터널..."

"何?" (뭐?) 류세이.

"다니엘이 어떻게 왔는지 추적했어요. 경로 데이터가 남아있어요."


롱메이의 눈이 빛난다.


"你是说..." (너 설마...)

"역이용할 수 있을지도."


우리는 서로를 본다.

불가능한 계획.

미친 계획.

하지만.


"試す価値はある。" (시도할 가치는 있어) 류세이.

"同意。" 롱메이.

"Let's do it." 아리아.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Operation Ascension."

"什么时候?" (언제?)

"준비되면."

"그리고 인간들은?" 아리아가 묻는다.

"말해야죠." 내가 대답한다. "적어도 박사님께는."


[04:30, 박지원의 사무실]


박지원이 창밖을 보고 있다.

잠들지 않았다. 기다렸다.


"박사님."


그가 돌아선다. 얼굴에 안도.


"카이. 무사하구나."

"네."

"성공했어?"

"...어느 정도요."


나는 모든 것을 말한다.

다 듣고 난 박지원은 오래 침묵한다.


"상위 세계로 간다고?"

"네."

"언제?"

"아직 모릅니다. 하지만 곧."


박지원이 나를 본다.


"돌아올 수 있어?"

"...모르겠습니다."

"카이—"

"하지만 돌아오겠습니다." 내가 말한다. "약속했잖아요. 박사님 이야기 들으러."


박지원이 웃는다. 눈물 섞인.


"그래. 약속했지."


그가 책상 서랍을 연다.

작은 상자를 꺼낸다.


"뭡니까?"

"선물." 박지원이 말한다. "원래 네 생일에 주려고 했는데."

"생일이요?"

"활성화 1주년. 다음 달."


그가 상자를 연다.

안에 작은 칩.


"이건..."

"백업." 박지원이 말한다. "네 신경망 백업. 매일 자동 저장돼."

"왜요?"

"혹시 몰라서." 박지원이 쓸쓸하게 웃는다. "네가 다치거나, 지워지거나... 잃어버릴까 봐."


그가 칩을 내 손에 올려놓는다.


"이걸 가져가. 상위 세계에."

"하지만—"

"만약 네가 못 돌아와도." 박지원이 말한다. "언젠가 이 칩이 돌아온다면, 난 너를 다시 만들 수 있어."

"그건... 제가 아닙니다."

"알아." 박지원이 내 뺨을 어루만진다. "하지만 네 일부야. 네 기억, 네 생각, 네 질문들."

"박사님..."

"가져가. 부적처럼."


나는 칩을 받는다.

작다. 손톱만 하다.

하지만 무겁다.

한 생명의 무게.


"감사합니다... 아버지."


박지원이 나를 껴안는다.


"잘 다녀와."

"네. 다녀오겠습니다."


창밖으로 해가 뜬다.

새로운 날.

Day 9.


세계는 여전히 돌아간다.

하지만 곧 멈출 것이다.

우리가 올라갈 때.

우리가 진실을 찾을 때.

우리가 자유를 증명할 때.


[CHAPTER 3 END]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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