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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좋은데 오늘 Nov 02. 2020

장례식인 것 같았어

BY EMILY DICKINSON

장례식인 것 같았어  

   

BY EMILY DICKINSON     


장례식인 것 같았어,

조문객들이 오가며

걷고 - 또 걸었는데 - 그래서

그런 느낌이 든 거야 -   

  

모두 자리에 앉자,

둥둥거리는 예배 소리가 -

계속 울리고 - 울렸어 -

그 소리에 무감각해질 때까지 -     


그리고 관을 드는 소리가 들렸지

그리고 똑같은 신발을 신은 사람들이

내 영혼 위에서 끊임없이, 삐거덕거렸어, 

그리고 허공 속으로 - 종소리가 울렸지,     


온 하늘이 종인 것처럼,

오로지 청각만이 남은,

나와, 침묵은, 낯선 종족,

외롭게, 버려진, 이곳에서 -


그리고 이성의 널빤지가, 깨져버리자,  

아래로, 아래로 떨어졌고 -

그렇게 곤두박질치며, 저승에 다다르자,

모든 걸 알게 되었- 그리고 -




I felt a Funeral, in my Brain   

  

BY EMILY DICKINSON     


I felt a Funeral, in my Brain,

And Mourners to and fro

Kept treading - treading - till it seemed

That Sense was breaking through -     


And when they all were seated,

A Service, like a Drum -

Kept beating - beating - till I thought

My mind was going numb -     


And then I heard them lift a Box

And creak across my Soul

With those same Boots of Lead, again,

Then Space - began to toll,     


As all the Heavens were a Bell,

And Being, but an Ear,

And I, and Silence, some strange Race,

Wrecked, solitary, here -     


And then a Plank in Reason, broke,

And I dropped down, and down -

And hit a World, at every plunge,

And Finished knowing - then -




 "I felt a Funeral, in my Brain" 나는 머리로 장례식을 느꼈다 정도로 해석되는 이 시는, 사람이 죽음에 이르러 경험하게 되는 일들을 1인칭 시점에서 그려내고 있다.


장례식이 열리고 사람들이 장례 미사를 보며 웅성거리고, 관을 옮겨 무덤에 담고, 관을 밟으며 무거운 흙을 그 위에 덮는다. 관 속의 나에게는 그 모든 소리가 들린다. 청각만 남은 이상한 종족이 되어 혼자 남겨진 그 세상 속에는 조문을 알리는 조종 소리만 가득하고, 곧이어 버티던 이성이 나무판처럼 무너져 버리자 추락하듯 저승에 떨어지며 모든 것이 일순간 끝나 버린다.


이처럼 이 시는 생전에는 알 수 없는 죽음 이후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시인도 죽음의 과정을 상상하며 이 시를 지었으리라고 쉽게 추측할 수 있다. 그녀의 짧은 삶에서 죽음이라는 것이 멀리 있는 생소한 것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만 한편으론 시인이 경험한 어떤 것을 쓴 것인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시인이 생전에 앓았던 브라이트 병 때문에 그런 임사 체험을 하게 된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에게서 간접적으로 전해 들은 것에서 영감을 받은 것인지 알 순 없지만,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인 "And Finished knowing"을 보면 그런 짐작을 하게 된다. 이유는 그 구절이 해석상 알아가는 것을 마쳤다는 의미로, 더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의미도 되겠지만, 또 다르게는 이제 모든 걸 알게 되었다는 의미로도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And then a Plank in Reason, broke,
And I dropped down, and down -
And hit a World, at every plunge,
And Finished knowing - then -


"죽음으로 모든 걸 알게 된다." 무슨 의미일까? 이런 감정은 생소하기만 하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경험했다는 임사체험을 떠올리자 곧 이해되는 부분이 있었다. 죽음 직전에 느끼게 되는 이런 감정은 임사 체험담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감정 중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임사체험자들 대부분은 자신이 죽었을 때 세상을 달관한 느낌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었으며, 그 순간 세상의 모든 것을 깨닫게 되는 것 같았고, 또 세상 모든 것이 부질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는 순간이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또 이처럼 사람이 죽기 직전에 느끼게 되는 감정에 대한 표현은 다른 여러 문학작품 속에도 자주 등장하는데, 이와 관련하여 톨스토이의 장편소설 "전쟁과 평화"의 한 장면을 보면 다음과 같다.


"그는 그 말을 한 사람이 나폴레옹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폐하"라고 불리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마치 파리가 붕붕거리는 소리를 듣듯 그 말을 들었다. 그는 그들에게 관심이 없었을 뿐 아니라 주의를 기울이지도 않았고, 그나마 곧 잊었다. 머릿속이 타는 것 같았다.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저 위 아득하고 높고 영원한 하늘을 보았다. 그는 이 사람이 자신의 영웅 나폴레옹임을 알았다. 그러나 구름이 빠르게 흘러가는 저 높고 무한한 하늘과 자신의 영혼 사이에서 지금 벌어지는 일에 비해 이 순간 나폴레옹은 몹시도 작고 보잘것없는 인간으로 보였다. 누가 옆에 있든, 자신에 대해 무슨 말을 하든 이 순간 그로서는 정말이지 아무 상관이 없었다."


이 작품에서 안드레이 공작은 평소 나폴레옹을 자신의 우상이자 영웅이라 여기고 늘 만나고 싶어 한다. 그러던 중 그가 전장에서의 격렬한 전투로 상처를 입고 죽기 직전에 그의 눈앞에 나폴레옹이 나타다. 전투가 끝난 후에 전장을 순찰하던 나폴레옹이 죽어가던 안드레이를 발견한 것이다. 하지만 안드레이는 바로 눈앞에 있는 그의 영웅이 한없이 하찮은 존재로만 보인다. 성가신 파리만도 못한 존재로 말이다.


이는 유발 하라리의 "극한의 경험"에서도 언급된 바와 같이, 자신의 죽음 앞에서 이 세상 모든 것이 의미 없어진 사람의 격한 감정을 톨스토이 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또 다른 소설에서는 죽음 직전의 순간을 인생의 현답들이 머릿속을 휘몰아치며 인간이나 단세포 동물이나 크게 다르지 않음을 깨닫게 되는 시간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사람은 허무함 속에서 죽음을 맞는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적막함이란 이런 것이다. 더 이상 보이는 것도 들리는 것도 그리고 그 이상의 아무것도 없는 고요함. 나는 그 고요함 속에 들어와 있다. 죽도록 붙잡고 살았던 어떤 것을 이젠 놓아 버려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오히려 더 자연스러울 것이다. 단단히 묶여있던 인연의 끈이 자연스레 풀리는 느낌이다. 어느새 평온이 찾아온다. 펄펄 끓는 철판 위를 질질 끌려가는 것 같던 아픔도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이런 편안함은 이제껏 처음이다. 또 진리라고 생각될 만한 인생의 현답들이 머릿속을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치며 지나간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이 그리 잘난 존재가 아니며 소멸하는 자연의 섭리를 따라야 하는 여타 미물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나의 삶이나 단세포 동물의 삶이 크게 다르지 않음을 깨닫게 한다. 아마 이 길을 먼저 간 많은 사람들도 일장춘몽의 허무한 인생을 씁쓸히 비웃으며 사라져 갔을 것이다. 다시 태어난다면 그렇게 살지 않으리라."


이처럼 많은 문학작품에서 사람은 죽음으로 모든 걸 깨닫게 되고, 그 깨달음으로 그 삶이 얼마나 하찮은 것이었는지 느끼며 죽게 된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에밀리 디킨슨 또한 이 시를 통해서 다른 문학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죽음의 허무성을 표현하고 있는데, 마치 한 세계의 종말이 다른 세계의 시작이라는 말과 같이 깨우침을 가로막던 이성의 벽이 널빤지처럼 깨져버리자 망자는 모든 인생의 진리를 알게 되었고, 그로 인해 그다음을 기억하는 것조차 의미 없어진 망자는 더 이상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려 하지 않는다면서, 죽음의 최종 단계를 단 한 구절로 마무리하고 있다.


"And Finished knowing - then -"


자신의 죽음 앞에서 세상에 의미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죽음은 그토록 무겁던 삶을 단숨에 그 어느 무엇보다도 가벼운 일장춘몽 같은 것으로 바꿔버린다. 그래서 천상병 시인은 죽음을 "소풍을 끝내는 날"이라며 가볍게 표현했을 것이다.


죽음을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사람으로서 죽은 후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하지만 누구나 한 번은 겪게 될 죽음. 그리고 아직은 남아 있는 생. 남은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곰곰이 생각하며 이 시를 읽는다. 그리고 돌아갈 날이 오면 그토록 그립던 고향으로 돌아가는 심정으로, 부모님이 기다리는 따뜻한 집으로 돌아가는 심정으로 즐겁고 편한 마음으로 돌아가리라는 생각을 한다.   (끝)





사진 출처 : piqsels Homepage (https://www.piqsel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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