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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hnstory Jan 23. 2024

정성의 기술

아이에게서 배우다

1. 퇴근하고 오니, 첫째 딸아이가 친구 생일이라 카드를 만들고 그림을 그리며 축하 편지를 쓰고 있었다. 곰인형이 선물을 안고 있는 그림이었는데 자세히 관찰하고 그린 섬세함이 도드라져 보였다. 기억에 두세 살 즈음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고 초3이 된 지금도 꾸준하게 다니는 곳이 미술학원이다. 다양한 그림 그리기 대회에서 수상도 많이 하고 있는 딸아이는 그림 그리는 것에 진심이었고 오늘도 여전히 진심이다. 그렇게 정성을 쏟는다.



2. 대상에 대한 동경과 애정이 전제된 정성은 친절함을 수반한다.

고1 때 3공 바인더, 다이어리가 유행했다. 당시 속지 낱장에 그림을 그려주거나 좋은 글을 써서 서로 교환하는 것이 친구들 사이에서 유행처럼 번졌다. 글 쓰는 것을 좋아했던 난, 친구의 연애편지를 대신 써주기도 했고, 책에서 본 좋은 문장들을 적고 간단한 그림들을 덧붙여 주기도 했다. 당시에도 기록하고 남기는 행위를 좋아했기에 이런 부탁은 번거롭지 않았고 오히려 고마웠다. 친구들은 나에게 친절하다 말했고 이는 나의 정성에 연료가 되어주었다.



3. 처음 팀장이 되었던 날을 기억한다.

신입으로 입사한 친구에게 상세하게 업무 매뉴얼을 알려주고 그간의 경험을 통한 인사이트들을 공유했다. 당시의 일과 사람에 대한 나의 애정은 최고조에 달했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이때의 태도와 습관이 잘 자리 잡은 덕에 지금도 그 혜택을 누리고 있다는 생각이 드니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일을 통해 성장하고 싶었고, 나의 후배들은 나를 통해 실패와 성공의 모델을 찾아 건강하게 성장하길 바랐다.

일과 사람에 대한 열망은, 내 눈앞에 펼쳐지는 세상을 잘 이해하고 미지의 영역에 대해서도 단계적으로 알아가며 전문성을 갖추도록 도움을 주었다.  이 과정에서 쌓게 된 통찰은 어제보다 나은 내가 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음이 분명하다.



4. 난 내게 주어진 감사한 기회들을 허투루 활용하지 않았다.

나에게 있어 일이란 것은, 매 순간 배움이 존재하며 인격적 성장을 도모할 수 있는 마당이었다. 죽도록 힘들었던 시기에도, 과로로 정신을 잃고 은행 객장에서 쓰러진 기억 속에도 나의 생각은 한 지점을 향해 있었고 그 중심에는 일과 사람에 대한 책임감이 있었다. 밀도 높은 삶이길 원했고, 하루 12시간 이상을 함께하는 일에 애정이 가득했다. 초반에 다져둔 마음과 태도는 옳은 방향으로 관성을 갖게 해 주었고 일상의 기준이 되었다.



5. 정성을 다하는 대상이기에 사랑하게 되는 것인지, 사랑하기 때문에 정성을 다하는 것인지 선후관계를 일반화하기는 어렵다. 분명한 것은, 정성을 쏟는 대상에 대한 감정의 파도는 지평선 끝자락의 태양에 맞닿는 뜨거움을 품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주변의 온기가 달라지고 삶의 풍요로움을 불러오는 정교한 설계와도 같은 사랑의 힘은 정성스러운 마음과 태도에 아주 가까이 있다. 또한 주위의 많은 것들을 바라보는 시각을 변하게 하고, 타인 또한 감화시킬 수 있을 만한 위대함을 안고 있다.


오며 가며 마주치기만 했던 다른 부서의 밝은 기운을 갖고 있는 그녀를 유심히 관찰해 보면 자신의 일을 즐기듯 대하는 것이 느껴질 때가 있다. 보는 사람도 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대화를 나눠보니 진지한 태도와 눈빛 그리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몸에 밴 듯한 매너가 내게는 추앙받아 마땅한 가치로 다가온다. 같은 공간에 머무르지만 그녀와는 사뭇 다른 이들이 즐비하다. 대체 무엇이 다른가?



6. 그녀는 줄곧 내가 하는 업무의 영역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어떤 것들이 있는지, 어떤 배경으로 그런 생각들을 하게 된 것인지 어린아이처럼 궁금해하듯 질문을 쏟아냈다.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보였고 이내 그녀의 다양한 생각들이 얼개를 이루며 내 앞에 펼쳐졌다. 일에 대한 진중한 접근으로 회의실의 공기는 숙연해졌고, 그녀의 의견들에 나는 보다 옳은 판단을 할 수 있는 지평을 넓힐 수 있었다.

정성을 다해 나눈 대화 이면에 일에 대한 그녀의 태도를 엿볼 수 있었고 존중을 넘어 존경에 가까웠던 30분 남짓한 시간은 내게 각인되었다.



7. 딸아이는 자신이 완성한 작품에 흡족해하는 듯 보였다.

가로 세로 4cm가 채 되지 않았던 그림에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정성을 쏟았고, 친구가 받고 좋아할 모습에 정말 신난다고 했다. 만면에 가득한 미소에서 주는 이의 순수한 마음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오늘 밤, 아주 작은 일에 정성을 다하는 그 모습에 오늘도 새겨야 하는 분명한 지침을 떠올린다.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작은 일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에 배어 나오고

겉에 배어 나오면 겉으로 드러나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중용 2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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