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가 잊어버린 말. “왜요, 선생님?"
제가 왜 그래야 하죠?
참으로 건방져 보이는 말이다. 하지만, 당신의 인생에 있어서 꽤나 중요한 말이다. 아니 어쩌면, 우리 모두가 잊어버린. 그러나 당연히 던져야 하는 질문인지도 모르겠다.
다들 예스맨이 성공한다들 한다. 뭐 아예 틀린 말은 아니다. 아무런 색깔과 모양도 없는 사람은 조직에 잘 흘러들어가고, 그 안에 잘 녹아내린다. 조직에 적응하고, 조직원들과 원만하게 지내는 데에 탁월하다. 무슨 업무를 시켜도 예스. 그러니 상사들이 싫어할래야 싫어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딱 거기까지다. 상위 조직의 명령에 충실히 따르기만 하면 모든 일이 얼추 풀리는 위치(기껏해야 대리급이랄까..)에 있기에는 좋으나, 본인의 역량과 결정권을 가지고 성과를 만들어내야 하는 위치에 올라가는 순간 갈피를 잡지 못 하고 넘어지기 십상이다. 까라는 대로 까는 것만 배웠지, 까라는데 안된다고 개기는 법은 배운 적이 없으니 말이다.
사실 이건 한국사회 전체의 병폐다. 국가가 만들어 놓은 교육과정을 성실히 이수한, 소위 말하는 모범생들은 “왜”라는 질문을 자연스럽게 망각하게 된다. 잘못된 것에 대해, 그리고 궁금한 것에 대해 왜?라고 묻는 것은 대드는 것이라고 훈련받기 때문이다. "왜?"냐며 대드는 아이들은 매로 다스려져서 모범생이 되거나, 매로도 다스려지지 못할 경우 학교 밖으로 안내된다. 그렇게 우리 사회는 왜냐고 묻는 사람들을 더 낮은 곳으로, 영향력 없는 곳으로 몰아낸다. 그래서 그들의 Why라는 질문은 주요 언론이나 여론에서 사라진다. 학교뿐만 아니라 정부도 ‘왜'라는 질문을 하는 사람들을 조직적으로 와해시키고, 대답을 회피해서 더 이상 왜냐고 묻질 못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400여 명의 아이들과 시민들이 바다에서 죽었고, 사람들이 왜냐고 물었을 때 정부는 그들에게 사회 전복 세력 그러니까 문제아라는 낙인을 찍어버렸고, 그들의 목소리를 의도적으로 변질시켜 보도하곤 했다.
더 나아가, 그들의 그런 질문이 대두되는 곳은(종북이라고 불리는) 일인 미디어나 진보계열 온라인 신문으로 한정되어 버려서 공신력이나 여론을 군집할 기회를 가질 가능성조차 박탈당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Why는 모든 문제 해결의 필수조건이고, 인류가 지금까지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인데 말이다. 어쩌면 왜냐고 묻는 행위는 인간의 천부적 기본권에 포함되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참 왜냐고 묻는 걸 싫어하는 사회다. 그래서 왜냐고 묻기 시작한다면 당신은 당신이 속한 곳에서 가시 같은 존재가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아니 여러 선례들이 말해주고 있듯이, 왜냐는 질문을 시작하는 순간 당신의 삶은 피곤해질 거다. 그래도 이것만은 기억하기 바란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은, Why에서 나온 것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