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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ycekim Oct 16. 2021

아직은 실감나지 않지만(5~7주)

나의 첫 임신 이야기

산부인과에서 초음파로 아기집을 처음 확인한 것은 임신 5주차였다. 임신 주수는 마지막 생리 시작일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실제 수정일과는 차이가 있다. 그래서 임신 5주차에 본 초음파에서는 동그란 아기집이 붙어있는 모습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정말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사실 나는 임신테스트기의 선명한 두 줄을 보고서도 불안해서 병원에서 확실히 확인하기 전까지 매일 1개씩 임신테스트기를 사용했다. 내가 다니는 병원에서는 바로 임신확인서를 발급해주었지만, 사실 임신확인서의 발급 기준은 병원마다 조금씩 달라서, 난황이 보이거나 아기 심장소리를 확인해야만 이 서류가 발급되는 곳도 있다. 나는 임신확인서를 받자마자 회사에서 함께 일하는 파트에 가장 먼저 이 사실을 알렸다. 현재 근로기준법 제74조에 의해 임신 12주 이내 또는 36주 이후의 임신부가 1일 2시간의 단축근무(1일 근무시간 6시간 이상)를 할 수 있다. 나는 기차로 장거리 출퇴근을 하고 있었고, 점점 업무가 과중해지는 중이었기 때문에 최소한 같은 팀에 일하는 분들께는 단축근무를 원한다는 점에 대해 먼저 양해를 구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물론 근로기준법이 아무리 임산부를 보호하려고 애쓴다고 해도 근로 여건상 그런 배려를 기대하기 어려운 직장도 많고, 내가 전에 일하던 직장에서도 많은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최소한의 단축근무만 하던 선배도 있었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나는 함께 일하는 파트의 파트장님이 둘째를 임신 중이셔서 누구보다도 나의 불안을 잘 이해해주셨고, 내가 아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고 있는 팀원들도 진심으로 축하해주셔서 어렵지 않게 단축근무를 쓸 수 있었다. 하지만 단축근무를 한다고 해서 내가 맡고 있는 일의 절대적인 양을 줄일 수는 없었기 때문에, 나는 출근해있는 6시간 동안에 더욱 최선을 다해서 민폐를 끼치지 않도록 노력했다.


임신 5주에서 7주 사이에는 티가 날 만큼 배가 나오는 것도,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아무 때나 구역질이나 구토를 하는 것도 아니어서 함께 일하는 파트 외에는 따로 임신 사실을 알릴 필요가 없었다. 다른 파트와 협의가 필요할 때나 영상회의가 필요할 때 시간을 조정해야한다는 문제가 있었지만, 그게 내 출퇴근 시간 때문이라는 것을 굳이 말하지 않으면 상대방도 그런 내용을 알 수 없었다. 게다가 부서가 너무 바빠서 늦은 시간에 퇴근하고 출근 시간이 불규칙한 유연근무를 쓰는 사람이 많다 보니 내 늦은 출근이나 이른 퇴근에 관심을 갖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대신 나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남들보다 더 많은 서류작업을 더 빠른 시간 내에 마치고, 시간 내에 보고를 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했다. 하지만 내가 어떤 노력을 하든 결국 함께 일하는 파트원들과 파트장의 배려가 없었다면 나는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들 나의 컨디션에 신경을 써주고 있었고, 내가 미안해하며 일찍 가는 것에 대해서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줬기 때문에 나도 근무시간에는 일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덕분에 나는 임신 초기에 잘 적응하며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5주가 지나 6주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제어할 수 없는 졸음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퇴근 후에 업무 연속성을 위해 집에서도 원격근무를 들여다보며 놓친 일들이나 메세지를 파악할 수 있는 체력이 남아있었는데, 임신 6주부터는 컴퓨터를 켤 정신도 없이 집에 오면 씻고 잠들기 바빴다. 저녁 8시만 넘으면 병든 닭처럼 꾸벅꾸벅 졸았고, 심지어 점심시간에 20분이라도 눈을 붙이지 않으면 오후에 일에 집중할 수 없을 정도로 멍해지고 말았다. 그래도 단순한 피로감은 강렬한 신맛이 나는 사탕이나 강렬한 단맛이 나는 음료로 잊으면서 일을 할 수 있었고, 나는 그럭저럭 잘 버티고 있다고 생각했다.


임신부 뱃지의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임신 6주차에 기차 출퇴근에 평소와는 다른 피로감을 느끼고 나서부터였다. 임신 전에 입석 표를 끊어서 튼튼한 다리로 버티고 다니던 때와는 달리 자리에 앉는 일이 간절해졌다. 고속 열차를 타면 객실과 통로의 흔들림 차이나 소음 차이가 꽤나 큰데, 아무렇지 않게 여겨졌던 소음이나 흔들림, 알 수 없는 냄새에 구역질이 시작된 것이었다. 그마저도 티켓을 구할 수만 있으면 내 몸을 위해 2배 요금의 차이 따위 생각지 않고 좌석을 예매했지만, 내가 사는 지역과 직장이 있는 역을 오가는 기차는 배차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출퇴근 시간을 조정해도 매일 열차 좌석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기차로 오가는 사람이 많은 금요일은 한 달 전부터 수시로 확인해도 좌석 예매가 힘들었고, 통로에 서서 기차만 타고 내려도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괴로웠다. 그래서 나는 임신 6주의 마지막날인 금요일에 연가를 내고 보건소에 가서 최소한의 티를 낼 수 있도록 임산부 뱃지를 받아왔다. 지자체별로 임신부에게 제공하는 물품이나 혜택 등에 차이가 있는데, 기본적으로 이 차이는 지자체의 예산 규모와 출생율이 결정한다고 볼 수 있다. 예산 규모가 크지 않은 지자체더라도 출생율이 다른 지역보다 현저히 낮은 곳에서는 아기 물품이나 바우처 같은 형태로 다양한 지원을 하지만, 예산 규모가 큰 지자체라고 하더라도 출생율이 다른 지역보다 높은 곳에서는 최소한의 혜택만을 제공한다. 내가 사는 지역의 보건소에서는 약 3달 분량의 고용량 엽산과 임산부 뱃지, 임산부 차량 스티커만을 주었다. 임신 중기에 철분제를 받을 수도 있고, 초기 혈액검사나 소변검사 등은 코로나19로 인해 잠시 중단된 상태이긴 했지만 다른 지자체에 비해 최소한의 서비스만을 제공하는 편이었다.


임산부 뱃지를 달고 나서 내게 조금 편해진 점이 있다면 버스에서 비어 있는 임산부석에 앉을 때 남 눈치를 보게 되지 않았다는 점과 사람들이 나와 부딪칠까봐 신경써야 했던 점이 조금 줄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공익광고 영상처럼 버스에서 임산부 뱃지를 보고 사람들이 자리를 비켜준다던가, 기차 통로마다 단 2자리 뿐인 간이 좌석을 양보하는 일은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딱히 그런 일을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서울 내에서 출퇴근하던 선배들이 임신하면 차를 사라는 말을 왜 그렇게 많이 했었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은 나날이었다. 그런 것까지 신경쓰기 힘들어서 나는 좀 더 일찍 나와서 사람이 적은 버스를 골라타거나 택시를 탔고, 기차에 빈 좌석이 있는지를 직전까지 수시로(정말 초 단위로) 확인했다. 좀 더 시간이 흐르면서 알게된 점은, 임신 초기부터 임산부 뱃지를 주는 이유는 임신 초기가 가장 위험하고 힘든데도 티가 나지 않는 시기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임신을 준비하거나 경험하지 않는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실은, 임신 12주 이내에 유산이 되는 경우가 1/3에 달한다는 것이다. 자연적인 유산도 많지만, 약한 자극에도 유산이 될 수 있는 시기이기 때문에 법으로도 단축근무 등을 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그래도 배가 어느 정도 나온 후에는 뱃지가 없어도 사람들이 임산부를 알아보고 최소한 밀치지 않거나 조심을 하는 일이 있지만, 임신 초기에는 누가 내 팔만 흔들어도 토할 것만 같은데 뱃지 없이는 보호받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안그래도 코로나19 시국이라 사람들이 기침만 해도 쳐다보는데, 뜬금없는 타이밍에 혼자 구역질을 하면서 통로에 서 있으면 왠지 사람들이 나를 유증상자로 생각하는 것 같아서 일부러 뱃지가 잘 보이게 가방을 고쳐매기도 했다.


기차와 버스에서 구역질이 시작된 후, 나는 다시 친정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입덧의 정도나 기간은 같은 사람이더라도 임신 때마다 달라지기도 하는데, 대게는 모계 유전이 많기 때문이었다. 엄마도 입덧이 있었는지, 얼마나 심했는지 궁금해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엄마의 답변은 매우 간결하고 모호했다. "그냥 남들 하는 만큼은 했어. 그래도 심하진 않았어." 나는 처음에 엄마의 '남들 하는 만큼'을 매우 가볍게 생각했고, 임신 6주에 시작되었던 불쾌감 정도가 지속될 것이라고 믿었다. 엄마가 나보다 인내심이 강하고 세상의 풍파를 많이 겪은 사람이라는 점을 간과한 판단이었음을 임신 7주가 넘어가서야 알게 되었지만, 나는 희망을 가지고 각종 과일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여름이 오고 있는 계절이라, 살 수 있는 과일의 종류가 다양했다. 특히 퇴근 기차를 타고 집에 오면 멀미하는 느낌 때문에 밥보다는 과일로 당분을 급히 보충하곤 했다. 처음에는 이온음료나 과일주스 같은 것들도 꽤나 도움이 되었다. 불편하지만, 그래도 이 증상들이 아무 느낌 없는 내 아랫배에 아기가 진짜 있는 증거가 되는 것 같아서 그래도 견딜만 했다. 보통은 임신 9주차부터 입덧을 느낀다고 하는데, 나는 임신 전부터도 후각이 매우 예민하고 차를 오래타면 멀미를 잘 하는 편이었다. 나는 원래도 매우 희미한 담배 냄새만 맡아도 흡연자가 이 공간에 있었는지를 판단할 수 있을 정도의 후각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은 남들보다 예민해서 입덧을 빨리 시작한 편인 것 같았다. 엄마는 신경쓸 다른 것들이 많으면 입덧을 느낄 정신도 없다고 말했는데, 기차나 버스만 타면 시작되는 이 증상을 나는 도저히 모른 척하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겨우 정신을 다른 곳에 집중하며 출근하면 이미 얼굴이 핼쑥하게 질리거나 수면의 양과 상관없이 다크써클이 생겨버려서 직장 동료들을 걱정시키곤 했다.


그렇게 처음 아기집을 보고 나서부터 2주가 흐르면서, 정신없이 입덧이 시작되는 바람에 사실은 처음 찾아왔던 불안이 고개를 들 새가 없었다. 아기집만 보이는 경우에도, 난황이 생기지 않는 고사난자인 경우나 착상이 된 것처럼 보여도 증상이 없는 유산이 될 가능성도 꽤 높은 시기이기 때문에 처음 초음파를 본 후에도 불안이 남아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생각보다 오랫동안 임신이 잘 되지 않았기 때문에, 어쩌면 내가 모르는 유산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있었다. 배가 나오거나 아기를 느낄 수 있는 어떤 특별한 사인도 없었기 때문에 아마도 그렇게 시작된 입덧이 아니었다면 나는 진짜 내 뱃속에 아기가 자라고 있는 것인지 의심하고 불안했을지도 모른다. 남들처럼 살아있는 생물이 나타나는 태몽을 꾼 것도 아니었고, 아기와의 교감을 느낄 수 있는 무의식의 표현조차 없었다. 그런 나에게 찾아온 입덧은 너무 많은 것을 의심하고 불안해하는 나에게 아기가 보내는 강렬한 신호였다고 생각한다. 점점 입덧이 확실하게 느껴지면서부터, 입덧이 심할수록 초기 유산 가능성이 낮다는 전문가들의 유투브가 내겐 위안이 되었다. 우습지만 그렇게 임신에 대해 교과서에서 많은 초음파 사진과 전문 지식을 읽고 공부를 했어도 결국 내가 임신을 해보니 나쁜 경우에 대한 불안만 더해지는 느낌이었다. 뭔가를 안다고 해서 초음파의 아기집이 신기하지 않은 게 아니었고, 입덧이 뭔지 안다고 해서 그 고통이 피해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 것들을 안다고 해도 임신 7주까지 아기의 존재를 느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출산과 엄마가 되는 일이 멀게만 느껴지고, 내 삶의 형태와 앞으로 나타날 변화에 대해서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오히려 이 때의 나는 아기의 존재보다는 오히려 내가 겪는 입덧과 피로로 인해 업무에 피해를 주는 게 아닐까 걱정하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배려와 이해에 감사하며 하루 하루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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