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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ycekim Jan 18. 2023

다음에는,

어른이 동화

“춥대. 추울 거래. 추웠지?”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을 생각해 보니 이 세 마디였다. 물론 내가 가장 먼저 들은 말은 아니었다. 나의 끝이 다가오는 것을 알 것만 같은데, 떠오르는 것은 가장 먼저 들은 말도 가장 나중에 들은 말도 아닌 가장 많이 들은 이 말들이었다. 어쩌면 그 말들을 들었던 시간이 항상 고요하고, 다른 이의 소리를 들을 일이 없는 한밤중이어서 더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 목소리를 생각하면, 나는 어쩐지 그 말에 대답할 수 없는 내 신세가 조금 서글퍼지곤 했다.


내가 생겨난 날은 아름다웠다. 어린아이들이 손끝과 코끝이 빨개지도록 열심히 나를 만들었다. 내가 제일 처음 들은 말은, 그 아이들의 “됐다!”라는 말이었다. 나는 그 아이들의 얼굴을 보았고, 사랑스러운 웃음소리를 처음으로 들었다. 바람을 타고 하얀 나들이 계속 날아다녔다. 내가 되지 못한 눈들은 주변의 아름답지 않은 소리를 먹고 아름다운 아이들의 소리만을 남겨두었다. 어른이 끌어주는 썰매를 타고 즐거운 비명을 지르는 아이, 작은 집게로 작은 오리를 만드는 아이, 서로에게 눈을 던지며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들은 나를 언제나 웃을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내가 지을 수 있는 다른 표정이 없었지만, 내가 보는 풍경에 썩 어울리는 표정인 것 같아 만족스러웠다. 나는 고맙게도 놀이터 앞에 서 있었다. 언제든지 나를 만든 아이들과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아이들이 하나둘씩 어디론가 사라지고, 주변은 점점 조용해졌다. 하늘이 붉게 물들고, 고요한 어둠이 찾아왔다. 아이들은 내가 외롭지 않게 나와 같은 존재를 옆에 만들어두고 갔다. 내일도 나를 만든 아이들이 나를 보러 올 것 같아 설레는 밤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그저 날리다가 멈추는 눈을 바라보며 내 존재를 만끽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내가 꼭 대답해주고 싶은 그 목소리를 듣게 된 것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는데, 나는 어느 집 창문 앞에 자리를 잡고 서 있었다. 나와 창문 사이에 키가 큰 나무들이 있어서 그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뒤를 돌아봐야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지 모른다. “추웠지?” 창문에 바짝 붙어 선 여자는 푸르스름한 한밤의 가로등 빛을 받으며 그렇게 말했다.


여자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낮았다. 아무래도 추운 것은 그녀인 것 같았다. 밖에 돌아다니던 사람만큼이나 옷을 여러 개 입고, 목도리까지 하고 아주 두꺼운 양말을 신고 있었다. 따뜻하게 입고 다니라는 말과, 밥은 먹었냐는 말이 이어졌다. 그 사람도 내가 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테지만, 조심히 바라본 그 사람의 표정은 낮에 본 사람들과 조금 달랐다. 웃으며 말하고 있었지만, 대답하는 사람은 옆에 없었다. 대답이 들리지 않던 조용한 대화는 이렇게 끝났다. “내일도 춥대. 옷 잘 챙겨 입고 밥도 잘 챙겨 먹어.” 나도 모르게 그 사람의 목소리를 숨죽여 듣고 있었다. 내 옆에 자리 잡은 친구는 그 사람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즐거운 아이들의 비명이 가득하고, 사방에 내린 눈들이 반짝반짝 빛나는 낮에도 이상하게 그 사람의 말들이 생각났다. 나를 만든 아이들이 인사를 하고 갔고, 그 아이들의 친구들이 내게 눈썹을 선물하고 갔다. 그 친구의 친구들이 내게 단추를 달아주고 갔고, 여전히 즐거운 소리와 풍경이 나를 가득 채웠다. 이상하게 신경이 쓰여 뒤를 힐끔힐끔 돌아보곤 했지만, 밤의 그 사람은 잘 보이지 않았다. 나도 금세 그 서글프고 낮은 목소리를 잊고 내 앞에 보이는 아이들에게 집중했다. 나는 오직 듣고 볼 뿐이지만, 내가 말하거나 움직이지 않아도 아이들은 내 앞에서 한참을 웃으며 떠들고 갔다. 도저히 내용을 파악할 수 없는 비밀을 털어놓고 가는 아이도 있었다. 나는 산타가 아닌데, 아무래도 내가 산타의 부하쯤 된다고 생각하는 아이인 것 같았다. 나는 그저, 그 아이의 비밀과 소원이 어떻게든 산타에게 잘 전달되기를 함께 바라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시 아이들이 흩어지고, 더 조용한 밤이 오자 또다시 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놀라울 정도로 어제와 똑같은 말투와 내용이었다. 오늘은 바람마저 멈추고 고요해져서인지 그 사람은 창문을 조금 열었다. 그러자 적막 속에 그 사람의 목소리가 더욱 크고 또렷하게 들렸다. “춥지?” 이번에는 대답하는 목소리도 들려왔다. “아, 엄마! 여긴 괜찮아. 진짜 괜찮다니까!” 아, 나는 그날 알았다. 그 사람은 엄마구나. 나는 이 자리에 서서 많은 아이들의 이름을 들었다. 그리고 아이들이 엄마를 부르며 달려가고 흩어지는 모습도 보았다. 이 사람의 아이는 여기에 없었다. 아마도 그게 낮에 보는 다른 사람들과 이 사람의 얼굴이 다른 이유일지도 몰랐다. 그 사람은 대답하는 사람을 향해 웃고 있었지만, 그 목소리만큼 슬픈 표정이었다. 그리고 오늘도, 그 사람은 옷을 많이 입고 있었다. 그제야 문득 깨달았는데, 옆집 앞에 선 내 친구는 안에서 나오는 불빛에 빛나고 있었고, 나는 그 사람과 함께 어둠 속에 있었다. 그 사람은 왜, 추운지를 매일 물으면서 따뜻한 불빛 아래 있지 않을까? 나는 그 사람이 이제 너무 궁금해졌다.


다음 날은 적어도 나를 제외한 눈의 친구들에게 운이 좋지 않았다. 내 옆에서 행복하게 웃고 있던 친구가 조금씩 사라져 가기 시작했다. 낮에는 가장 반짝거리고, 밤에는 따뜻한 불빛과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행복한 겨울을 지낸 것 같았다. 우리는 조용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나는 키 큰 나무들과, 언제나 따뜻한 빛이 나오지 않는 그 사람의 집 덕분에 여전히 큰 키를 자랑하며 서 있을 수 있었다. 아이들이 만들었던 작은 오리들은 더 이상 함께 있을 수 없었다. 사실 나도, 옆에 섰던 친구도, 오리들도 추운 날 여기가 아닌 어딘가로 다시 내려 다른 아름다움을 많이 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서 슬프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왠지 오늘도 “추웠지?”라고 할 것만 같은 그 목소리가 너무 신경 쓰여서 이대로 사라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어서였는지, 해가 있는 낮에 그 사람을 처음으로 보게 되었다. 그 사람은, 그 엄마는 집에 있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차림으로 내 앞에 서 있었다. 그 사람은 내 앞을 서성거리며 운 좋게 살아남은 눈을 던지고 노는 아이들을 보고 웃었던 것 같다. 그리고 돌아서 나를 발견했다. 그 사람은 말이 별로 없었지만, 나를 한참 보더니 사진을 찍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밤에 볼 때와 달리 다른 사람들처럼 밝게 웃고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그날 밤은 처음으로, “추웠지? 춥지?”가 아닌 다른 말로 그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엄마가 보낸 사진 봤어? 너 어릴 때 엄마랑 눈사람 만들었던 거 기억나?” 그 사람은 웃고 있었다. 대답하는 사람의 목소리는 여전히 들을 수 없었지만, 그 사람만큼 웃고 있었으리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나는, 그 사람과 아이의 기억 속에도 있었던 모양이다. 그날은 그 사람의 대화가 전보다 길었다. 그 사람도 내가 낮에 보는 사람들처럼 아이와 함께 눈이 오는 날, 내가 생겨나는 날의 아름다운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다 알아듣지 못하는 그 긴 대화가 뿌듯했던 것은, 나로 인해 그 사람이 저렇게 슬프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것만 같은 생각이 들어서였던 것 같다. 그 사람이 이렇게 말하기 전까지, 나는 정말 기분이 좋았다. “내일 거기는 추울 거래. 너 옷 잘 챙겨 입어야 해. 멋 낸다고 또 코트 입지 말고. 어, 엄마는 괜찮아. 여기는 이제 따뜻해진대.” 그리고 대화를 끝낸 그 사람이 다시 슬프고 텅 빈 얼굴이 되는 것을 보고 말았다.


조금 더 그 사람이 따뜻한 불빛 속에 있었다면 아쉽지 않았을까? 조금 더 그 사람이 슬프지 않게 웃는 모습을 보았다면 마음이 편했을까? 처음으로 나를 반짝거리게 비추는 해가 조금 싫었다. 여기 조금 더 서서, 그 사람과 아이 사이에 내가 있는지 이야기를 더 듣고 싶은데. 아니, 그냥 대답하던 그 아이가 엄마를 보러 오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러면 그 사람이 따뜻한 불빛으로 나를 녹여도 괜찮을 것 같은데. 그렇게 사라지면 다음에 올 때까지 아쉬움을 남기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사라지고 생기는 것을 몇 번이나 반복하면서도 이렇게 아쉬움이 남는 것은 처음이었다. 처음 생겨났을 땐 좋은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사람들의 기쁘고 행복한 표정만 보다가 사라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많은 웃음을 보고 들어 놓고 가장 생각나는 것이 그 슬픈 표정의 엄마라니, 조금 억울했다.


나는 처음으로 복잡한 마음이 되어 조금씩 키가 작아지고 있었다. 사라지고 싶지 않을 때 비까지 오다니, 괜히 심술이 났다. 다음에는 절대 이 자리에 내려오지 말아야지, 생각도 했다. 놀이터의 아이들은 다시 보고 싶었지만, 그 슬픈 표정의 엄마가 계속 생각날 것 같았다. 비 덕분에 더 빨리 몸통이 사라지고 있는데, 우산을 쓴 그 사람이 나타났다. 하필 가장 내가 아름답지 않은 순간에 다시 마주하다니, 낭패였다. 그 사람은 나를 조용히 바라보더니 갑자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여전히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있는 것밖에 할 수 없었지만, 그 사람이 왜 우는지 알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이와 그 사람이 만들었던 예전의 내가 눈앞에서 사라지는 걸 보고 있는 것이다, 그 사람은. 왜인지 얼굴을 마주하지 못하고 아이의 목소리를 듣는 것에 나보다 더 지친 모습이었다. 아, 정말 다시는 여기로 내려오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던 찰나였다.


“엄마!” 그 사람을 닮은, 키가 큰 여자가 우산을 쓰고 저편에서 뛰어왔다. 그 사람은 너무 놀라서 얼어버린 것 같았다. 더 보고 싶었는데, 세차게 내리는 비에 나는 아이의 마지막 말밖에 들을 수가 없었다. “서프라이즈! 엄마가 눈사람 보낸 거 보고 엄마 너무 보고 싶어서 왔지! 다음에 눈 오면 또 같이 보기로 약속했잖아.” 이럴 수가, 하필 이럴 때 내가 사라져야 한다니 정말이지 억울하다. 적어도 오늘은 그 사람이 따뜻한 불빛과 함께 밤을 보낼 것 같아 마음이 놓인다. 이번 겨울이 가기 전에, 그 사람이 말했던 ‘추울 거래’가 한 번은 꼭 맞길 바라야겠다. 나는 또 정확히 이 자리에 내려야 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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